서울역 뒤편, 잊혀 가던 어느 길
불과 수십 년 만에 빠르게 발전하며 변화한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는, 시간이 멈춘 듯 옛날 그대로인 동네들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역 뒤편 중림동이 그렇죠. 이곳에 세워진 지 벌써 50년이 넘은 최초의 복도식 주상복합 아파트이자, 1970년 준공 당시 최신식 건축물이었던 ‘성요셉 아파트’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언덕의 높낮이를 그대로 따라 무려 115미터로 길게 지어졌습니다. 70년대 우리나라의 개발과 성장을 상징하는 근대 건축물 성요셉 아파트의 1층은 모두 상가로, 길을 따라 쭉 늘어선 시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하던 ‘중림시장’은 1980년대까지도 아주 활발했던 수산물 시장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도 이후, 본격적으로 가게들이 노량진과 가락동으로 이전했고, 몇몇 상인이 남아 이 동네에서 계속 장사를 이어갔다고 하죠. 이처럼 쇠락한 시장의 옛 흔적은 바로 ‘버려진 창고 건물들’이었습니다. 성요셉 아파트가 접한 기다란 길을 따라 늘어선 무허가 판자 건물들과 폐창고들은 어느덧 서울 한복판, 도시의 흉물이 되어있었죠.
그러던 중 서울시가 서울역 주변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펼치면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아 잊혀 가던 중림동 거리를 정비합니다. 성요셉 아파트 맞은편 창고건물 부지를 매입해 이 거리를 다시금 살려 나가기로 한 것이죠. 그렇게 2019년 11월, 비로소 새롭게 ‘중림창고’가 문을 열었습니다.
하나가 되다, 길과 건축
중림창고의 대지 길이는 55m, 폭이 가장 좁은 곳은 1.5m이고 가장 넓은 곳은 6m인 모양새입니다. 건축물을 짓기 굉장히 어려운 땅이죠. 좁고 기다란 건축물은 공간 활용이 까다롭고, 통상적인 건축물 계획을 구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덕길을 따라 길게 남아있던 이 땅 위에, 새로운 역할을 지닌 공간이 꼭 다시 생겨나야만 했습니다.
중림창고를 설계한 ‘에브리아키텍츠’는 이렇게 특수한 형상의 대지에 어울리는 해법을 찾아 건축물을 완성했습니다. 중림창고를 방문하였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이 장소의 특징, 바로 ‘길과 건축이 하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넓지 않은 언덕길과 마주하며 수십 미터에 달할 정도로 쭉 뻗은 대지, 그리고 그 위에 기다랗게 새로 생겨난 건축물. 언뜻 보면 건축물이 몇 동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모두 이어진 하나의 건축물입니다. 하지만 길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열고 시선이 머무를 수 있도록 ‘분절’과 ‘연속’이 동시에 존재하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다양한 높낮이의 공간이 때로는 나뉘고, 때로는 함께 인식되어 변칙적으로 활용된다는 특징을 갖죠.
중림창고는 오래된 이 동네와 어울리는 노출 콘크리트와 시멘트 벽돌 마감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건물이지만, 어딘지 동네의 원래 분위기와 잘 맞아, 이질적인 느낌이 없습니다. 또한 중림창고의 1층은 길을 지나가다 언제든 쉽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심지어 대부분의 공간은 길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제는 서울에 몇 안 남은 정 많은 옛 동네 중림동에서, 주민들은 새로 태어난 중림창고에 들러 언제든 시간을 보내고, 길가에 마련된 의자와 턱에 앉아 잠시 쉬어 갈 수 있죠.
동네의 새로운 거점, 불을 밝히다
중림창고가 생겨나며, 이 ‘길’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한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오래된 동네이지만, 분명히 중림동은 서울의 중심지이자 번화한 도심 근처에 있죠. 그렇기에 중림창고는 다양한 방문객을 위한 상점, 팝업공간,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프로그램 구성과 콘텐츠도 고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운영하죠. 때로는 작품이 전시되기도, 상품이 판매되기도, 모임이 열리기도 합니다.
도시재생의 좋은 사례로 평가받는 중림창고의 진면목 중 하나는, 길을 따라 지역이 활성화되도록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소통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책방으로 운영하는 중림창고는 다양한 강연과 워크숍이 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서재 혹은 사랑방으로 제 역할을 다하죠.
지금 이 오래된 동네와 길에, 사람들이 새롭게 찾아옵니다. 나아가 무심코 지나던 사람들의 눈길이 다시 이 동네를 주목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길을 따라 흘러 들어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에 잠시 머물고, 다시 길 위로 흘러갑니다.
오래된 무엇인가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
사람도 늙고, 마찬가지로 도시도 시간이 지나면 늙습니다. 안타깝지만 건축물도 수명이 있죠. 하지만 어쩌면 ‘길’은 수명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도시는 언제나 개발과 보존의 논리 속에서 평가를 거친 후 가꿔집니다. 때론 개발이 어울리고, 때론 보존이 어울리죠. 하지만 무엇인가를 보존하고, 지키는 방법들 가운데에는 원래 있던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축물을 만드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길과 동네를 보존해 오히려 활기를 만든 ‘중림창고’ 처럼요.
이제 다양한 사람이 중림동과 성요셉 아파트가 맞닿은 길을 찾아옵니다. 새로이 이곳에 정착한 젊은 상인들은 옛 상인들이 장사하던 성요셉 아파트 1층에서 멋진 카페와 베이커리 등 새로운 가게를 만들어 나갑니다. K-POP과 넷플릭스에서 비추는 현대의 서울이 있기 전, 옛날 그 시절 찬란했던 기억을 간직한 중림동은 변화와 동시에 추억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명이 다한 건물을 허물어 새로운 건물을 짓되, ‘길’을 보존하는 것. 오래된 무엇인가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인 듯합니다. 바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죠.
정림건축에서 건축설계와 공간기획·컨설팅을 맡고 있습니다.
다양해지고 있는 공간, 그리고 입체적인 경험에 대한 인사이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