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의 처음과 끝

프레드릭 배크만 저 <오베라는 남자>- 그는 왜?

그 소설의 처음과끝 : 하가시노 게이고 저<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그 소설의 처음과끝 : 하가시노 게이고 저<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그 소설의 처음과끝 : 하가시노 게이고 저<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소설의 처음

“오베는 59세다.
그는 사브를 몬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그 사람은 강도고 자기 집게손가락은 경찰용 권총이라도 되는 양 겨누는 남자다.”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 포토 스틸 컷>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포토 스틸 컷

‘그는 왜?’ 한 편의 소설이 쓰이는 것은 결국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왜 그는 그인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며 왜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읽고 난 우리가 그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고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음을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자면 프레드릭 배크만의 장편 <오베라는 남자>는 오베가 왜 오베인지에 대한 긴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읽고 나면 오베를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긴 하지만, 이게 당연해 보여도 실은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해두자. 알다시피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당신이 누구든 그 사람이 누구든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며, 당신이 누구건 간에 그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면 그 난이도는 아득해진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데 하필 이런 남자가 이웃이라고 치자. 그는 사브를 몬다. 오로지, 오로지 (그에게는 ‘국산’일) 사브만 몬다.

매일 아침 6시 15분 전에 눈을 떠 늘 정확히 같은 양의 커피를 담은 여과기를 작동시킨 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침 시찰’이라는 이름의 산책을 나선다. 거주 지역 내 자동차 운행을 금지하는 표지판이 제자리에 제대로 박혀 있는지 발로 차 확인하고, 자신의 사브를 세워둔 차고 문손잡이를 세 번 당겨 확인하고, 최대 24시간까지만 주차가 허용되는 방문객 주차 구역에 정해진 시간을 넘겨 불법 주차된 차량이 없는지 제 수첩의 기록을 짚어가며 꼼꼼히 확인하고, 쓰레기 처리장에 들러 잘못 버려진 재활용 쓰레기를 규칙대로 분류한 후 처리장 문을 세 번 당겨 확인하고, 자전거 보관소 밖에 세워진 자전거를 제 위치에 옮기고서 보관소 문을 세 번 당겨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와 추출된 커피를 마신다.

59세가 되기까지 오래도록 이 일을 반복해온 그가 바로 오베라는 남자다.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 포토 스틸 컷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포토 스틸 컷

이 남자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멋대로 남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대답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쉽게 알겠지만, 당신이 정직한 사람이라면 끝내는 아니라고 대답하지 싶다. 저 짧은 아침 산책만으로도 우리가 ‘꼰대’라고 부르는 이들의 뻔한 모습들을 그가 다 보여주는 이상 별수 없는 일이긴 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베는 그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서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아버지가 일하던 철도 회사에 찾아갔다가 승객이 두고 간 서류가방에서 흘러나온 지갑을 주워 유실물 보관소에 맡겼던 아홉 살의 어느 날 저도 모르게 배우게 된 그것, 곧 “옳은 건 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67쪽)을 평생 몸으로 실천해온 이다. 그것은 또한 막 열여섯 살이 된 그에게 사브(!) 한 대와 곧 무너질 듯한 집과 상처 난 손목시계 하나를 남기고 사고로 세상을 뜬 아버지가 몸소 보여주었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였다.
훈장이나 학위나 칭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소냐는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를 꼭 잡았다.”

- p. 206

그걸 소냐라는 여자가 알아본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오 년 만에 처음으로 그를 웃게 한 그녀. 소설의 시작점에서 이미 육 개월 전에 암으로 세상을 뜬 것으로 되어 있는 그녀와의 만남으로부터 이별까지의 과정은 오베의 삶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지금의 오베가 오베인 것은 결혼 후 출산을 앞두고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 버스 사고를 당했을 때 하필 그 순간 잠시 자리를 뜨는 바람에 그녀의 옆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은 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사고 이후 경찰과 법원과 정부에 띄운 탄원의 편지들을 무시했던 ‘하얀 셔츠’를 입은 이들에 분노가 뒤섞인 결과라는 식이다.

그렇게 점차 자신과 소냐만이 존재하는 작은 세계에 저를 가두어 왔던 오베였으니 소냐가 세상을 뜬 지금 그에게는 오직 소냐를 따라가는 일만이 남았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 p. 189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 포토 스틸 컷>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포토 스틸 컷

그렇다면 다시금 같은 질문, 이런 남자라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미리 말하건대 2018년 현재에서 한국 소설을 읽는 이로서 오베라는 인물을 설득하는 이 소설의 방식은 얼마간 구태의연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비단 사브만이 아닌바, ‘남자’다운 삶의 태도가 대물림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더구나 오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서 그에게 숨을 불어넣은 ‘여자’인 소냐는 그간 익히 봐왔던 성녀와 같은 인물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데도 다시 속아진다.

너무 많이 보았던 이야기라는 것은 그게 일종의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의미이기도 할 터, 탄생의 순간에 만난 저와 많이 닮은 이를 흉내 내면서 그와 조금씩 더 닮아가는 이런 이야기는 혹 지겹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또 속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성녀로 인한 구원의 이야기? 그건 이런 구차한 설명도 필요치 않다. 그녀가 그의 전부였음을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이 그걸 차분히, 그러나 기어이 설득하고 만다.

묘석과 고양이 모두 그의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오베가 잠시 자기 신발을 바라보았다.
신음 소리를 냈다.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묘석에서 눈을 더 털어냈다. 조심스레 그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오베의 눈가가 살짝 반짝였다. 그는 뭔가 뭉클한 게 팔을 누르는 걸 느꼈다.
잠시 뒤 그는 고양이가 자기 머리를 그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 240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 포토 스틸 컷>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포토 스틸 컷

소냐 아버지 생전의 유일한 동무이자 그녀가 직접 ‘어니스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그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이 고양이를 포함해 오베가 죽으려 할 때마다 마침맞게 찾아와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아직 많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파르바네 등의 이웃들로 인해 그의 죽음이 조금씩 미뤄지는 과정이나, 그러면서 오베가 다시 조금씩 마음을 열기에 이르는 과정을 여기 다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오베는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였다고 적는 것만으로 충분할 테니까.

그런 일들로 북적였던 사 년여의 시간 끝에 그가 자신의 침실에서 고양이 한 마리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이 눈을 감았다는 게, 온갖 서류와 증명서와 설명서 등과 함께 제 장례식과 그 이후의 지시 사항을 (참으로 그답게) 하나하나 적은 편지를 봉투에 담아 협탁 위에 고이 올려놓고 떠났다는 게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끝나기로 되어 있었던 하나의 인생이 마침내 그렇게 조용히 끝난다.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 포토 스틸 컷>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베라는 남자> 포토 스틸 컷

마지막으로 다시, 우리는 오베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제는 대답이 전만큼 어렵지만은 않고, 이런 게 바로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우리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다. 소설을 읽는 일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새삼스러운 말은 아니겠으나, 이렇듯 그걸 배우고 또 배우게 된다는 건 새삼스러움을 넘어 경이로운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누구나가 다 별다른 이들이기에 매번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그것은 오베를 떠나보낸 자리에 다시 누군가를 받아들이게 된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 뒷이야기는 뭐, 아마 또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는 그대로 그렇게 될 것이다.

소설의 끝

하지만 젊은 남자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광고에 나온 ‘그 차고’에 대해 묻자,
파르바네는 그를 유심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차를 모는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처음으로 몸을 곧게 펴더니,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오로지 딱 한 단어만이 안겨줄 수 있는 불요불굴의 자존심을 담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브요.”

<오베라는 남자>는 어떤 책?

스웨덴의 한 블로거에서 전 세계를 사로잡은 초대형 작가로 거듭난 프레드릭 베크만의 데뷔작이자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원래 그의 블로그를 통해 처음 시작되었다가 수많은 독자들이 ‘오베’라는 캐릭터에 반해 이야기를 더 써볼 것을 권유했고, 2012년 마침내 소설 <오베라는 남자>가 정식 출간됐다. 이 작품은 출간 즉시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인구 9백만의 스웨덴에서 7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무엇이든 발길질을 하며 상태를 확인하고, BMW 운전자와는 말도 섞지 않는 까칠한 남자 오베는 매일 아침 6시 15분 전 알람도 없이 일어나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양의 커피를 내려 마시는 규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일생을 바친 직장에서 쫓겨나고, 반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다.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오베가 자살을 기도할 때마다 기막힌 타이밍에 그의 자살을 방해하는 새로운 이웃이 나타난다. 이 작품은 2016년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스웨덴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유럽영화상 코미디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베라는 남자>의 또 다른 문장들 곱씹어보기

 

오베의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말은 엔진에 대한 말들이었다. 그는 상당한 시간을 엔진에 대해 말하며 보냈다. “엔진은 받은 만큼 준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엔진을 존중해서 다루면 엔진은 네게 자유를 줄 거다. 네가 바보처럼 행동하면 네게서 자유를 빼앗을 거고.” - p. 61

그는 철도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차를 탔다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처음 웃은 게 바로 그날이었다. 인생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 p. 69

그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간절한 건, 정말로 다시 하고 싶은 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집게손가락을 접어 그의 손바닥 안쪽에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가 그럴 때면 세상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리웠다 - p. 102

소냐는 오베가 ‘세상에서 가장 융통성 없는 남자’라며 웃곤 했다. 오베는 그걸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세상사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있어야 했고 그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는 그게 어떻게 못된 성질머리가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p. 352

품위라는 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p. 371

집 안은 무척 조용했다. 실은 동네 전체가 다 그랬다. 모두들 자고 있었다. 그제야 오베는 총소리에 고양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베는 그 가�은 동물에게 넋이 나갈 정도로 겁을 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보고는 단호하게 라이플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 라디오를 켰다. 자기 목숨을 거두는데 음악이 필요해서도 아니고, 그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나서도 라디오가 전력량을 딸깍딸깍 올릴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다. 만약 고양이가 총소리에 깬다 해도 요즘 라디오에서 줄창 나오는 최신 팝송의 일부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다시 잠들겠지. 그게 오베의 사고 과정이었다. - p. 377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 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 p. 411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을 유지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때로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 p. 471

 

문학평론가 황현경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평론 <반격! 김사과>로 등단 / 현재 명지대, 서울예대, 추계예대 등에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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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2-0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