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미술관

가장 밝게 빛난 열정의 화가, 반 고흐 1편



가장 밝게 빛난 열정의 화가, 반 고흐 1편 가장 밝게 빛난 열정의 화가, 반 고흐 1편
고흐는 참 많은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에 그려진 작품인데요,
일렁이는 푸른빛 배경과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죠?
고흐만의 소용돌이치는 붓 터치를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담긴 열정이 끓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너무 유명해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 드네요,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유명세에 비해 그에 대해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생전 단 한 점을 판매한 화가, 단명했지만 현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동생 테오가 많은 지원을 해줬고 그들이 나눈 편지가 유명하다는 것 정도?

그럼 저와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영상으로 들여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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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가장 밝게 빛난 열정의 화가, 반 고흐 1편 가장 밝게 빛난 열정의 화가, 반 고흐 1편

알려진 천재가 아닌 ‘숨겨진 노력파’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작은 마을, 브라반트에서 3대 째 목사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목사, 어머니는 무명화가였죠. 고흐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죽은 형이 있었는데 형의 이름도 ‘빈센트’였습니다. 부모는 죽은 첫째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고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슬퍼할 때면 자신이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혔어요. 어린 시절부터 고흐는 사려가 깊고 현명한 아이지만 정신적 불안의 징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고흐는 알려진 것처럼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재능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었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작품, 그의 붓 터치는 순전히 그의 순수한 노력과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고흐의 첫 직업은 화가가 아닌 화상이었는데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16세에 구필 화랑에서 작품 판매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능력도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 관력 서적을 읽었던 고흐는 이 일에 매우 만족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가 유능한 화상이 될 것이라 믿었죠.

그 능력을 인정받고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아 일하던 고흐. 한순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외젠 로이어, 고흐가 지내던 하숙집 주인의 딸이었는데요, 그녀에게 푹 빠진 고흐는 오랜 시간 고민을 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녀는 숨겨둔 약혼자가 있었고,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이 일은 고흐에게 큰 아픔으로 남았죠. 고흐는 현실을 잊으려는 듯 오히려 성경을 탐독하게 됩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당시 테오와의 편지를 보면 성경 구절로 가득했지요. 그는 이후 파리 지점으로 발령받았지만 미술을 돈벌이에만 이용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며 화랑을 뛰쳐나오죠.

이후 고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신학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말죠. 포기할 수 없었던 고흐는 전도사 학교에 요청해서 임시 전도사 활동을 허가 받는데요. 전도를 위해 벨기에의 탄광촌으로 향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전도 활동에 전념하지만 고흐의 성격은 너무 격정적이었어요, 결국 교회 지도부의 거부감을 사 목사의 꿈은 좌절됩니다.

당시 고흐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그의 뇌리를 스쳐간 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고흐가 생각한 화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흐는 예술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섬기고자 했고 그렇게 고흐는 1880년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예술을 통해 행하고자 한 일

당시 고흐가 마음에 품은 스승은 프랑수아즈 밀레였습니다. 밀레는 농민, 노동자 계급의 모습을 숭고하게 담아냈는데요. 고흐가 살던 19세기 후반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도시와 농촌의 괴리가 심화되었습니다. 고흐는 농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성실한 삶에 감동했고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의무감에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레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겠노라 다짐하죠.

초기작을 보면 밀레의 영향을 알 수 있는데요. 전체적으로 굉장히 어둡고 칙칙한 그림들이 위주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을 보면, 좁은 방안에 모인 가족이 램프 하나에 의지한 채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나이 든 어머니에게 감자를 건네고 아내는 남편에게 하루 일을 이야기하죠, 고단한 환경 속에 비록 감자 몇 알이지만 그조차 나누는 배려의 마음을 나타낸 겁니다.

그리고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를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노동의 정직함, 고흐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죠?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해 스스로 만족했고 의도도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화가들은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손, 비정상적으로 긴 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당시 미술계의 대세였던 밝고 아름다운 인상주의 그림에 반한 어둡고 칙칙한 고흐의 그림이 인기 있을 리 만무했죠. 대세에 맞지 않으니 판매는 당연히 어려웠습니다.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에게 이 작품을 판매하고 싶다고 하자 테오는 형이 마음 상하지 않게 거절하며 위로해 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새로운 예술 열정을 불러 일으킨 사람들

1886년, 고흐는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성공을 꿈꾸며 모인 파리! 이곳은 고흐에게도 새로운 예술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고흐의 그림은 더욱 밝아지는데요, 사람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는지에 따라 변화하게 되어있죠. 밝아짐과 동시에 질감도 더욱 가벼워졌습니다. 이전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고흐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밝은 풍경을 그렸어요. 당시 인상주의자들의 풍경화와 굉장히 흡사한데요. 그가 인상주의 작품에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중 ‘르픽 아파트의 풍경’을 자세히 보면 마치 점을 찍은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이런 방식을 점묘법이라고 하는데, 색을 팔레트에 섞지 않고 캔버스에 점을 찍듯이 그린 겁니다. 신인상주의 ‘조르주 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죠. 이렇게 동생의 조언과 유행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지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자신만의 색을 찾아 떠나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삶이 고흐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고흐의 눈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 겉멋 만을 쫓는 세련된 파리지앵 신사들의 모습은 점점 매력이 아닌 환멸과 허무로 다가왔습니다. 도시의 세련된 화가들, 친목과 파티를 좋아하는 그들과 어울리기에는 고흐의 복장과 행동들은 용납 받지 못했습니다. 고흐 또한 순간의 인상만을 담은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죠. 고흐는 여기서 결단을 내립니다. 무작정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유행하는 스타일을 수용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색을 찾기로 한 것이죠. 당시 인상주의자들이 개발한 색면 분할식 터치를 얻은 겁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아는 그 살아 숨 쉬는 듯한 붓 터치가 고흐의 스타일로 재탄생 했습니다. 당시 고흐의 순수한 노력이 남아있는 정물화와 남긴 글을 볼까요.

“어려움이 많지만 열정을 가지고 색채에 대한 자신만의 감성을 개발한다면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겠지… 나는 모델을 구할 돈이 부족해서 인물화를 포기했네, 대신 꽃, 빨간 양귀비, 물망초, 흰색과 붉은 장미, 노란 국화와 같은 꽃들을 그리며 색채를 연구했네…”

이 시기에 반 고흐의 자화상은 자신을 바라보며 그린 색채, 미학적 실험의 결과였습니다. 마치 정물화처럼 자신의 모습으로 예술적 실험을 계속해서 이어갔던 겁니다. 그는 파리에서 지낸 2년이란 시간 동안 무려 230점의 작품을 남겼는데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점 우리가 아는 고흐 고유의 스타일로 변해갔습니다. 회오리 붓 터치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1888년, 2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친 고흐는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로 향하기로 결심합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화가들이 다 같이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고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장소. 그 탄생을 꿈꾸며 고흐는 떠나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사랑하는 고흐의 작품들은 가치 있는 삶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으며 외로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열정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기 위한 여정은 항상 고되며 외로움이 동반되죠. 이 여정이 잘못된 길은 아닐까 걱정도 되고요.

하지만 쭉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보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지나고 나면 더 아름다운 것처럼 시간이 지나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정우철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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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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