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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이 아를에 도착합니다. 고흐는 예술가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을 이룰 것만 같아 행복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고갱을 위해 그의 방을 해바라기로 장식했고,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갱은 오히려 고흐를 무시하는 마음이 컸어요.
사실 고갱은 화상이었던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와 작품 구입을 약속 받고 온 것이었죠. 그래도 초기 둘의 사이는 괜찮은 듯 보였습니다. 날이 좋으면 함께 나가서 그림을 그렸고 흐린 날엔 방안에 같은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했거든요.
이 시기 고흐는 또 하나의 대작을 탄생시킵니다. 밀레를 존경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의 새로운 버전을 출품하죠. 어쩌면 고흐는 본인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림 속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느껴지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두 예술가는 함께 지내기에는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했습니다. 예술관의 차이로 트러블이 조금씩 생기던 와중에 둘 사이가 완전히 갈라지는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고흐는 아를에 올 때 이곳의 주인인 ‘지누 부인’에게 짐을 맡기며 친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흐와 고갱은 지누 부인의 초상을 동시에 그리게 되었는데요. 이 둘의 시선은 너무 달랐습니다. 같은 모델이지만 다른 느낌의 작품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의 작품을 비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고흐는 노란 배경 앞에서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고 고상하게 보입니다.
반면, 고갱의 그림에서 지누 부인은 화면 앞쪽에 턱을 괸 채 묘한 웃음을 짓고 있으며 고흐의 작품과는 다르게 앞에는 술병이 놓여 있었죠. 이 그림을 본 고흐는 ‘지누 부인을 천박하게 그렸다’며 화를 냈고 고갱은 고흐가 ‘술집 여자를 고상한 척 그렸다’며 분노했어요, 말다툼은 점점 더 심해졌고 둘의 감정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고갱이 그린 작품 한 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립니다.
고흐는 자신을 미치광이로 표현한 것에 분노해서 들고 있던 압생트 잔을 고갱에게 던졌습니다. 그날 밤 둘은 격렬하게 싸웠고,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고흐가 자신의 귀를 면도 칼로 잘라내는 자해를 하며 공동생활은 두 달 만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고갱은 다음날 아침, 피투성이가 된 고흐를 발견하고 동생 테오에게 연락한 뒤 아를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 자해 사건에 대해서는 지금도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죠, 고흐가 자해를 했다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고갱의 증언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흐는 이 사건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적이 없어요.
고흐는 이후 아를의 요양병원에 입원하는데요, 그곳의 모습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정신이 이상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굉장히 차분한 그림을 그렸는데요. 알려진 것과 다르게 고흐의 지인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치의조차 고흐의 흥분 상태를 일시적인 것으로 진단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고흐는 2주 후에 노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퇴원을 하고 돌아온 고흐는 또 하나의 명작을 남기는데요.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정신병원을 다녀온 고흐에게 마을 사람들은 적대감을 드러냈고 그를 정신병자라며 조롱했습니다. 너무 힘들었고 마음 아파하다 결국 다시 발작을 일으켰죠. 주민들의 탄원으로 노란 집은 경찰에 의해 폐쇄되고,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들 마저 탄원서에 서명한 것을 안 고흐는 절망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생레미의 정신요양원에 찾아갑니다. 그림만큼은 자유롭게 그리게 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사람들과 트러블로 마음이 상하는 것보다는 이곳이 마음이 편했던 거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는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죠. 창살 너머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고흐는 편지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별이 비치는 모습은 나에게 항상 꿈을 꿀 수 있게 하지…. 저 별에 가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겠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야.”
고흐에게 밤 하늘의 별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꿈을 꾸게 했습니다.
고흐는 곧 테오에게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테오는 농촌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거주지를 옮길 것을 제안하죠. 그렇게 고흐는 1890년 5월 20일 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는 그곳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69일 동안 영혼을 불사르며 몇 점의 그림을 완성하는데요. 당시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치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한 심정이 느껴집니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간단히 식사를 하고 여느 때처럼 그림 도구를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림 속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쐈고 이틀 후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의사의 치료도 거부했고 담담하게 그 순간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기 전 자신을 찾아온 테오를 보니 고흐는 눈물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뒤에서 지원해 주던 동생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쏟아졌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테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고흐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테오야, 이렇게 죽고 싶었다.”
그렇게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그림뿐만 아니라 테오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들이 공개되었는데요. 그 편지들엔 고흐의 힘겨웠던 삶, 인정받지 못한 예술, 순수한 마음이 전부 남아있습니다. 고흐는 눈을 감는 순간, 비록 힘겨웠지만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본 인간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죠? 후회할 무엇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마지막 순간을 담담히 맞이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고흐의 삶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순간 후회하지 않을, 원하는 삶을 살고 계시나요?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