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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소설의 통념을 깨버린 멜빌의 마지막 장편소설


당대 소설의 통념을 깨버린 멜빌의 마지막 장편소설 당대 소설의 통념을 깨버린 멜빌의 마지막 장편소설

SUMMARY

법률 소설과 미국을 대표하는 해양 소설가
『모비딕』보다 더 읽기 어렵고 현대적인 작품
당대 비평계와 독자의 혹평을 받은 소설

법률 소설의 대가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해양 소설가라고 불리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대표적인 작품은 『모비딕(Moby-Dick)』이다. 나는 이 작품을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이 에이허브 선장으로 등장했던 영화로 먼저 접했었다. 영화 속에서 신비롭게 등장하는 하얀색 향유고래 모비딕과 원주민 퀴퀘그(Quequeg)가 너무 인상적이라서 그 후 소설도 읽게 되었는데, 스토리와 상관없는 장황한 부분이 많이 있어서 이왕 시작한 독서, 어떻게든 끝내겠다는 각오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기꾼

1857년에 발표된 멜빌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사기꾼』은 『모비딕』보다 더 읽기 어렵고 현대적인 작품이다. 19세기에 출판된 이 소설은 비평계와 독자들에게 혹평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소설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당시의 통념을 다 깨어버렸기 때문이다. 내용의 대부분이 알레고리적 인물 간의 대화로 구성되고, 등장하는 사기꾼이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과연 존재하는 사람인지도 확실하지 않으며, 멜빌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갑자기 끼어들어 자신의 소설론을 펼치는 등 일반적인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19세기 독자들이 소설답지 않다고 여겼던 이런 특징들이 시대를 앞서는 현대적인 특질로 재평가되어 오히려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랑장’으로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적은 피켓을 든 벙어리가 미시시피강의 피델호에 승선한다. 이후 사기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번갈아 등장하며 하루를 보내는데 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사람들을 기망하는 미연(靡然)의 존재에 대해 느끼게 되고, 또한 이들에게 농락당하는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책장을 넘기다가 급기야 나도 이들처럼 속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점을 자책하고 미안함에 대한 보상으로 사기꾼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자진해서 주게 되는데 현실 속에서도 이런 경우가 영 낯설지 않다.

이 작품의 영문 제목은 ‘The Confidence-Man: His Masquerade’이다. 사기꾼을 의미하는 ‘confidence-man’이란 단어는 ‘신용’, ‘신뢰’라는 의미의 ‘confidence’에 ‘man’을 붙여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단어의 원뜻만 본다면 confidence-man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란 의미가 있어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기꾼’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자신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며 피해자에게 신뢰의 징표로 시계나 다른 물건을 요구하여 받아내는 사기꾼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믿어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작품을 번역하며

이 소설을 번역하게 된 것은 2013년도 대산문화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 사업을 통해서였다. 이 사업에 응모하기 얼마 전부터 나는 우연히 접하게 된 이 작품이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와서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가, 외국문학 번역지원의 공모작 중에 이 작품이 있는 것을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번역 중 힘들었던 점은 지나치게 긴 원작의 문장들과 시인이기도 했던 멜빌이 내용과 무관하게 특정 리듬을 살리도록 단어들을 특이하게 배치한 부분들이었다. 일단 원작의 정보를 번역본에서도 원작과 비슷한 순서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의 순서를 되도록 살리고 필요시에는 문장을 나누어서 번역하였다. 그리고 원본의 리듬감은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살려보려고 노력하였다.

작품의 제목을 처음에는 ‘사기꾼, 그의 변장’이라고 하려다가 이후 ‘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로 바꾸었다. 사기꾼이 돌아다니면서 피해자를 농락하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사물놀이에서처럼 탈을 쓰고 하는 놀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고를 번역하여 넘긴 것이 2016년 12월이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2022년에야 출판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독자의 눈으로 나의 번역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본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신 대산문화재단과 문학과지성사의 편집부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손나경
글 / 손나경

계명대학교 타불라라사대학 교수

저서
『과학소설 속의 포스트휴먼』

역서
『미 외교관 부인이 만난 명성황후·영국 선원 앨런의 청일전쟁 비망록』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1』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2』 『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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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1-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