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허구를 통해 역사가들이 꿈꾸는 현실 혹은 진실에 도달하고, 문제의 발견에 탁월한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역사의 진상을 유추한다.”
옌롄커가 한 말이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상상을 통해 진정한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하는 장치가 허구이다. 옌롄커 스스로 창제한 신실주의(神實主義)라는 새로운 소설미학에 따르면 이러한 상상 혹은 허구야말로 오염된 현실에 의해 감춰진 진실한 현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을 재현하는 장치이자 소설의 필수불가결한 토대이다.
캄캄한 낮, 환한 밤-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그런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설의 핵심적 장치인 허구 안에 자기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을 편입시키고 있다. 그것도 전부 가장 통속적인 가치인 명리(名利)를 원리로 하여 진행되는 구차한 생활의 단면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실존인물로서 그의 생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유명한 제5세대 감독 구창웨이[顧長衛]와 양웨이웨이[楊薇薇]나 장팡저우[蔣方舟] 같은 젊은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소설의 내용도 그동안 그가 써온 웅장한 서사에 비하면 일종의 확장 혹은 일탈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누추한 스토리다. 원제인 ‘속구공면(速求共眠)’은 직역하자면 “빨리 저랑 자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어떤 목적에서인지 모르지만 젊은 엘리트 여성이 나이 많은 남성 노동자를 유혹하면서 하는 말이다.
소설은 작가 자신의 생활에 관한 서술과 리좡[李撞]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또 한 편의 소설, 그리고 이를 각색한 시나리오로 구성된다. 소설과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같지만 스토리의 진행과 결말은 다소 다르다. 요컨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명리에 대한 욕망 즉, 자신이 쓴 한 편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면서 작가가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을 다 맡음으로써 명예와 부를 독차지하겠다는 야무진 꿈이 다양한 인물들과의 심리적 갈등과 좌절, 사실과 허구의 착종,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긴장과 장력(張力)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한 달 전 제6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시상식을 위해 내한한 바 있는 작가는 그동안 중국의 역사와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과 상처의 기억을 소설을 통해 가장 과감하고 솔직하게 재현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열세 권의 작품 대부분이 그가 체험한 중국과 중국인들의 고통의 기억,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부조리한 풍경들을 웅장한 서사로 재현하면서 고통에 대한 지상의 영약으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그가 중국 제도권 문단이 제공하는 모든 특혜와 지원에서 배제되고 있고 상당수의 작품이 금서로 규정되어 출판과 유통이 제한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처럼 기존의 서사방법에서 벗어나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산작가로서 이제 쓸 만큼 썼다는 여유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동안의 열독과 글쓰기에 지친 그의 영혼의 일탈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 연마한 영화예술에 대한 내공의 발로일까?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이 작품을 대상으로 한 홍콩 독자들과의 대담에서 이른바 ‘커튼콜의 글쓰기’를 제시한 바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예술이 일종의 구경거리 혹은 장난이 되는 현실에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작가가 느끼는 허탈감과 아직 만족할 만한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는 초조감의 토로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그는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문학과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은 시대의 예열 속에서 먼저 뜨거워져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각오인 동시에 글쓰기에 대한 다짐이다. 그는 인생 만년의 글쓰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것과 관련하여 아무런 논쟁이나 반박, 저항이 없이 운명의 계획과 조치, 순서를 그대로 다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의 글쓰기에는 젊은 시절의 분투와 목표가 없이 생명의 마지막 구간에서의 침묵과 무언, 미소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커튼콜의 글쓰기’이고 그 시작이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접하게 될 옌롄커 문학이 어떤 양상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번역가, 중국문학 연구자, 1959년생
역서
역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풍아송』 『미성숙한 국가』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고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