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순례

커튼콜 글쓰기의 시작

“소설가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허구를 통해 역사가들이 꿈꾸는 현실 혹은 진실에 도달하고, 문제의 발견에 탁월한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역사의 진상을 유추한다.”

롄커가 한 말이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상상을 통해 진정한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하는 장치가 허구이다. 옌롄커 스스로 창제한 신실주의(神實主義)라는 새로운 소설미학에 따르면 이러한 상상 혹은 허구야말로 오염된 현실에 의해 감춰진 진실한 현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을 재현하는 장치이자 소설의 필수불가결한 토대이다.

캄캄한 낮, 환한 밤-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런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설의 핵심적 장치인 허구 안에 자기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을 편입시키고 있다. 그것도 전부 가장 통속적인 가치인 명리(名利)를 원리로 하여 진행되는 구차한 생활의 단면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실존인물로서 그의 생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유명한 제5세대 감독 구창웨이[顧長衛]와 양웨이웨이[楊薇薇]나 장팡저우[蔣方舟] 같은 젊은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설의 내용도 그동안 그가 써온 웅장한 서사에 비하면 일종의 확장 혹은 일탈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누추한 스토리다. 원제인 ‘속구공면(速求共眠)’은 직역하자면 “빨리 저랑 자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어떤 목적에서인지 모르지만 젊은 엘리트 여성이 나이 많은 남성 노동자를 유혹하면서 하는 말이다.

© Elisa Calvet B., 출처 Unsplash

설은 작가 자신의 생활에 관한 서술과 리좡[李撞]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또 한 편의 소설, 그리고 이를 각색한 시나리오로 구성된다. 소설과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같지만 스토리의 진행과 결말은 다소 다르다. 요컨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명리에 대한 욕망 즉, 자신이 쓴 한 편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면서 작가가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을 다 맡음으로써 명예와 부를 독차지하겠다는 야무진 꿈이 다양한 인물들과의 심리적 갈등과 좌절, 사실과 허구의 착종,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긴장과 장력(張力)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달 전 제6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시상식을 위해 내한한 바 있는 작가는 그동안 중국의 역사와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과 상처의 기억을 소설을 통해 가장 과감하고 솔직하게 재현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열세 권의 작품 대부분이 그가 체험한 중국과 중국인들의 고통의 기억,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부조리한 풍경들을 웅장한 서사로 재현하면서 고통에 대한 지상의 영약으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옌롄커 작가, 사진=이호철통일로문학상 홈페이지 제공

는 그가 중국 제도권 문단이 제공하는 모든 특혜와 지원에서 배제되고 있고 상당수의 작품이 금서로 규정되어 출판과 유통이 제한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처럼 기존의 서사방법에서 벗어나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산작가로서 이제 쓸 만큼 썼다는 여유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동안의 열독과 글쓰기에 지친 그의 영혼의 일탈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 연마한 영화예술에 대한 내공의 발로일까?

©Rob Laughter, 출처 Unsplash

와 관련하여 그는 이 작품을 대상으로 한 홍콩 독자들과의 대담에서 이른바 ‘커튼콜의 글쓰기’를 제시한 바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예술이 일종의 구경거리 혹은 장난이 되는 현실에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작가가 느끼는 허탈감과 아직 만족할 만한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는 초조감의 토로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그는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문학과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은 시대의 예열 속에서 먼저 뜨거워져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각오인 동시에 글쓰기에 대한 다짐이다. 그는 인생 만년의 글쓰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것과 관련하여 아무런 논쟁이나 반박, 저항이 없이 운명의 계획과 조치, 순서를 그대로 다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의 글쓰기에는 젊은 시절의 분투와 목표가 없이 생명의 마지막 구간에서의 침묵과 무언, 미소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커튼콜의 글쓰기’이고 그 시작이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접하게 될 옌롄커 문학이 어떤 양상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김태성
글 / 김태성

번역가, 중국문학 연구자, 1959년생

역서
역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풍아송』 『미성숙한 국가』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고치』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23-02-2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