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순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

그녀의 사회적 정체성 르본 대학의 어학 수업은 늘 자기소개로 시작했다. 어느 나라 출신으로 시작하여 잘 부탁한다는 말로 끝이 나는, 이른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시간이었다. 대학 진학 전에 등록했던 수업의 첫날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까만 머리털을 가녀린 목이 아찔하게 드러날 만큼 짧게 자르고, 다갈색의 눈동자가 안경알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고 가는 검은 테의 둥근 안경을 쓴 여학생이 자기 차례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는 프랑스 사람입니다.” 한국, 미국, 이탈리아, 일본, 핀란드, 중국 등지에서 온 수강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여학생에게 쏠렸다. 출석부를 손에 들고 살펴보던 교수도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겉모습으로 보면 아시아의 어느 국가 출신이 분명해 보이는 그 여학생이 늘 있어온 일인 듯 자기소개를 계속했다. “정말로 프랑스 사람이에요. 부모님께서 파리 보자르에서 유학하셨고, 전 그때 파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어요. 그런 후 부모님을 따라 대만으로 돌아갔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이곳, 그러니까 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자, 보세요.” 린은 지갑을 펼쳐 프랑스 정부가 외국인에게 체류를 허가할 때 주는 체류증이 아닌 우리의 주민등록증과도 같은 ‘carte nationale d’identité’를 보란 듯이 내밀었다. 그러자 교수가 린이 밝힌 국적을, 즉 그녀의 사회적 정체성을 이렇게 정정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대만 사람이로군요. 파리에서 태어난.”

개인의 정체성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일라 슬리마니의 『타인들의 나라』를 읽은 후, 린이 떠올랐다. 스스로를 프랑스 사람이라 소개했지만 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를 지닌 프랑스인 교수에 의해 파리에서 태어난 대만인이라 정의되었던 린이. ‘나의, 즉 한 개인의 정체성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흥미로웠던 그날의 경험으로부터 품게 된 이 의문은 해외에 체류했던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생각보다 더 자주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같은 모양의 도형이라도 색깔이 다르면 금세 눈에 띄는 것처럼, 다른 외양을–무엇보다 다른 피부색을-지닌 이에게 사회는 익명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의 정체를 묻는 행위에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심리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은 어디에 소속된 사람입니까’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파악하여 우리라는 집단과 남의 나라에서 온 개인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년에 『타인들의 나라』를 출간한 후, 레일라 슬리마니는 한 인터뷰를 통해 외조모가 프랑스 사람이고 외조부가 모로코 사람인 자신을 향해 모로코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이라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모로코 사람이라 하기 때문에, 자신은 결국 두 국가 모두에서 외국인이자 이방인이라고 했다. 복수국적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두 나라 모두 그녀에게는 타인들의 나라인 셈이랄까. 레일라 슬리마니는 『타인들의 나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국적, 종교, 문화, 이념, 성별 등 사회적으로 부여된 정체성이 과연 ‘나’를 정의하는 본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에게 직접 제시하는 대신,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식민주의, 모로코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거대 서사 속에서 마틸드와 아민, 아이샤, 무일랄라, 오마르, 셀마, 무라드, 드라간, 코린, 조르주, 이렌을 비롯해 모로코 토착민들과 유럽에서 모로코로 건너온 식민자들이 어떻게 그들만의 작은 서사를 형성하는지에 주목하게 한다.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갖고 있는 사상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타인의 정체성을 거론하지만, 작가가 발휘한 우아하면서도 섬세한 다성성 덕분에 독자는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며 문장을 향유하고 사유할 수 있다.

사진: Unsplash의Ben Sweet

국문으로 읽는 『타인들의 나라』 문 텍스트를 국문으로 옮기며 원문을 읽으면서 경험했던 공감각적 심상과 교묘히 마음을 건드리던 인물들의 감정선, 그리고 노맨즈랜드(no man's land)와 시트랑주(citrange) 등 은유가 지닌 함의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거침없고 유려한 필치와 세밀하면서도 입체적인 묘사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주특기라고도 할 수 있기에 이를 국문으로 『타인들의 나라』를 읽는 독자들도 그대로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타인들의 나라』 속 마틸드가 아버지 조르주와 언니 이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 일부러 라지아, 펠라, 진, 젤리즈 등 프랑스어로 존재하지 않는 이국적인 어휘들을 편지에 그대로 썼듯이 작가가 사용한 우리말 사전에 없는 단어들과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식민지 프랑스어 표현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리고 일일이 주석을 달아 설명하려 했다. 수식어구가 많은 긴 문장 또한 특별히 가독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함부로 나누지 않았다.

사진: Unsplash의Mikołaj

제 강점기와 해방, 6·25를 겪은 우리의 근현대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린 개개인에 주목하여 집필한 대하소설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타인들의 나라』 제1부의 마지막 문장을 국문으로 옮기고 난 후에 박경리의 『토지』가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자, 흥미롭게도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출판사로부터 교정 원고가 오기를 기다리며 펄 벅의 『대지』와 카렌 블릭센의 자전적 소설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다시 읽은 것도 이러한 경험 덕분이었다. 1968년에서 1978년을 배경으로 펼쳐질 『타인들의 나라』 제2부 「Regardez-nous danser」의 마지막 문장을 옮기고 나면 이번에는 어떤 작품이 떠오를까? 기대되는 여정이다.

※ 『타인들의 나라』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은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9번으로 출간되었다.
황선진
글 / 황선진

프랑스문학 전문 번역가, 미술사가, 1977년생

역서
『타인들의 나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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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5-2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