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화제작

사람의 사람됨은 어디서 나오는가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 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물음은 ‘리얼리스트’ 작가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위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솜씨를 유감없이 잘 보여준다. 소설은 ‘빨치산의 딸’인 화자 ‘고아리’가 아버지 ‘고상욱’의 3일장(葬)이 치러지는 동안 해방 공간 당시 빨치산투쟁에 참여한 아버지와 그의 험난했던 시대와 출옥 이후의 행장(行狀)을 풀어내는 형식을 취한다. 아버지 고상욱은 1948년에 입산해 지리산·백운산 일대에서 4년 남짓 활약하다 1952년에 위장 자수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리고 1974년 무렵 재투옥되어 6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사진: Unsplash의won_chan U

렇듯 아버지 고상욱은 사회주의라는 신념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화석화된 사회주의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누구보다 사람의 도리를 생각할 줄 아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낡고 타락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새로운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정지아식의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가 빛나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보듯이 ‘가벼운 무거움’을 구사하려는 서술 전략은 새로운 ‘이야기’의 출현을 예감하게 한다. 이러한 서사 전략은 소설의 주저음(主低流)을 형성하며 전체 분위기와 플롯에도 작용했다. 그리하여 분명 분단 서사이지만, 분단 서사 특유의 무거운 어조와는 전혀 딴판인 작품이 탄생했다.

사진: Unsplash의Unseen Studio

하튼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행장을 추적하는 추리 기법마저 활용하며 웃음과 해학을 자아내며 젊은 독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소통한다. 언뜻 1990년대 초반 소련 및 동구권 몰락 이후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1991) 신드롬을 연상시키듯 지금 여기 독자들은 ‘사람 냄새’ 나는 정지아식의 훈훈한 민중주의에 열광한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로 문단에 데뷔한 정지아가 십 년 이상 작품 집필에 공력을 들였다는 점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한국문학은 우리 시대 여성작가가 쓴 탁월한 분단 서사의 성취를 수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렇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어느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소설 읽는 매력을 선사하며 재미와 감동을 준 것일까. 첫째, 형식미학의 측면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새로운 활기와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3일장(葬)이라는 작품 형식을 통해 화자인 고아리가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점차 이해해가며 자기 해방과 타자 해방의 길을 동시에 모색했다. 장례가 치러질수록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면모는 『새농민』에 의존하는 ‘문자농삿꾼’이었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었다가, 점차 이데올로기의 격류 속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을 넉넉히 품는가 하면, 결혼이주여성의 딸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사람의 자리’를 걱정할 줄 아는 인물로 바뀐다. 이른바 ‘뼈다귀문학’ 속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진짜 민중의 삶에 헌신하려는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툭하면 나오는 아버지의 ‘오죽흐먼’ 타령은 여전히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며, 사람의 사람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묻는 문학의 윤리를 생각하게 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와 그의 세대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해방’을 이루는 과정이 퍽 흥미진진하다.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우리가 싸워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 세상이라고.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였다.”(255쪽) 정지아식의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는 형식미학을 통해 낡고 상투적인 사회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즐거운 고투의 산물이라는 점을 여실히 알게 된다.

사진: Unsplash의Joshua Hoehne

째, “저 질(길)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라든가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혁명)은 폴세 틀레묵은 것이제”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전남 지역 ‘제땅말’(방언)이 주는 말 자체의 유장한 리듬과 육체성에서 비롯했다. 이러한 제땅말은 소위 표준어 체계를 허물며 아버지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입체성을 한층 더했다. 박선생, 작은아버지, 학수, 동식씨, 황사장, 큰집 큰언니, 숙자언니, ‘담배 친구’인 샛노란 머리의 십대 소녀… 같은 활력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핍진한 묘사는 제땅말의 능수능란한 구사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또 상주들을 걱정하며 ‘뽀땃한’(오붓한) 마음으로 전복죽을 끓여 내주는 사람들이 있다. 구례 반내골을 비롯해 작품 속 장소들이 왠지 사람 냄새 폴폴 나는 살가운 장소처럼 느껴진다.

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한다.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산 아버지의 삶에서 길어올린 정지아의 새로운 이야기는 낡은 이념과 상투적인 이야기 대신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지금 여기 한국문학장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어쩌면 한국문학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소중한 결실을 온전히 껴안으며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혁명도, 문학도, 저 “황톳물이 휩쓸고 지나가야 새 질이 열린당게”(259쪽)처럼 그래야 마땅하리라.

고영직
글 / 고영직

평론가, 1968년생

이력
저서 『인문적 인간』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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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4-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