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설레는 표정으로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한 남자
그런데 한국 땅을 밟자마자 그는 간첩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그런가 하면 사후, 47억 원이라는 고가의 그림을 남긴 또다른 남자
그는 궁핍에 시달리며 가족을 그리워하다 마흔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데…
안타까운 사연의 두 주인공은 화가 이응노와 이중섭
비극적 운명에도 그들이 국민화가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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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응노 화백이 감옥에서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유럽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펼치던 화가 이응노. 그러던 중 6·25 사변 때 소식이 끊어진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으로 단숨에 향했던 이응노. 하지만 아들은 만날 수 없었고 이는 간첩이라는 오해를 사게 해 이응노를 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힙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이응노 화백. 놀랍게도 옥중에서 그가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넘치는 창작 욕구였는데요. 그는 먹다 남은 밥풀이나 나무 그릇, 간장과 고추장 등 감옥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옥중에서 탄생한 작품만 3백여 점. 수감생활 중에서도 그의 예술 세계는 멈출 줄 몰랐죠.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던 가난
이중섭이 평생 그리워했던 아내와 두 아들. 이들을 헤어지게 한 것 역시 전쟁의 아픔이었습니다. 이중섭의 나이 35세 때, 네 가족은 이미 제주도까지 쫓겨 내려와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죠. 하지만 언젠가 가족을 일으켜 세울 그날을 기다리며 그림을 놓을 수 없었던 이중섭. 종이를 살 돈조차 없었던 당시, 이중섭은 쓰레기통을 뒤지며 담배나 초콜릿을 싼 은박지를 골라 내기 시작합니다. 손바닥만 한 은박지에 그림을 채우고 종이를 긁어 채색까지 했던 천상 화가. 재료의 부족이라는 벽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은 독창적인 은지화를 꽃피워내는데…
도전하는 삶 vs 뚝심 있는 삶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완성한 두 화가의 작품은 어땠을까? 두 사람 모두 미국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될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이름을 떨쳤지만 그 예술 세계는 조금 달랐습니다. 백남준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월드클래스 화가로 손꼽히는 이응노 화백. 예술에서 도전과 변화를 모토로 삼았던 이응노는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익히고 변신하며 유럽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중섭은 자신을 의인화 한 소의 모습을 일생 동안 그리며 그가 처한 현실과 심리상태를 표현하려 했고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 간 가족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편지화에서도 그림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창이었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작품, 걸작으로 남다
어쩌면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두 사람. 재료의 벽을 넘어선 두 사람의 열정은 그 어느 시대에도 없을 독창적인 작품을 완성해냈고 역경의 상황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삶을 개척하는 자세로 세상에 맞섰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주목받는 이유가 아닐까? 예술 작품의 의미는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낳는 것. 하지만 고단하고 괴로운 시대 속에서도 포기를 몰랐던 이응노와 이중섭의 정신만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작품 속에 남아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