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미술관

끝없는 고통이 찾아와도 인생이여 만세, 프리다 칼로

드디어 휴가철이 시작됐네요~
신나는 음악과 함께 휴가 즐기고 계시나요?

오늘은 신나는 휴가에 알맞은 <콜드플레이 - viva la vida>와 연관 있는 화가를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프리다 칼로입니다.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는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에너지 넘치는 콜드플레이의 음악에 비해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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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어린시절

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의 가난한 사진사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 인생의 고통은 너무 빨리 찾아왔는데요. 여섯 살에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아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더디게 자라서 짧고 얇습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프리다를 놀렸고 따돌렸죠.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프리다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배워야 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프리다를 세심하게 보살폈고 꾸준히 운동시켜 다리가 많이 좋아졌죠. 프리다는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적이 우수해 의사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프리다를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큰 사고가 찾아오고 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의 가난한 사진사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 인생의 고통은 너무 빨리 찾아왔는데요. 여섯 살에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아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더디게 자라서 짧고 얇습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프리다를 놀렸고 따돌렸죠.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프리다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배워야 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프리다를 세심하게 보살폈고 꾸준히 운동시켜 다리가 많이 좋아졌죠. 프리다는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적이 우수해 의사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프리다를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큰 사고가 찾아오고 맙니다. 학교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길, 프리다가 탄 버스를 전동차가 들이받으며 충돌했고 버스가 뒤집어지는 큰 사고가 발생하는데요. 다리만 11곳 이상이 골절되고 골반과 쇄골,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부러진 버스 손잡이가 배를 관통해 자궁을 크게 다쳐 불임 판정을 받습니다.

람들은 프리다가 수술대 위에서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모두의 상상을 뒤엎고 깨어납니다. 프리다는 약 1년간 척추 고정용 코르셋을 착용한 채 병원 생활을 했고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예술성을 발견해준 화가

프리다 칼로,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 oil on canvas, 78.7 x 58,4 cm, 1926

가가 되기로 결심한 프리다, 그녀의 어머니는 움직일 수 없는 딸을 위해 침대에 거울을 붙이고 특수 이젤을 만들어서 자기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프리다의 작품 중 1/3이 자화상이기도 한데요, 그리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 프리다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디에고 리베라. 그 또한 화가였어요.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피카소, 모딜리아니'와 활동했고 벽화를 주로 그렸죠.

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던 프리다는 그림을 정확히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다는 벽화를 그리던 디에고를 불쑥 찾아가 자기 그림을 내보이며 평가해 달라며 부탁합니다. 디에고는 그림을 극찬하고 프리다의 재능을 인정하죠. 프리다의 예술성을 발견해 준 화가입니다.

운명적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

프리다 칼로,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 oil on canvas, 78.7 x 58,4 cm, 1926

에고의 나이는 42살로, 프리다보다 21살이나 연상입니다. 그리고 프리다보다 100킬로나 더 나가는 거구에 문란한 여자관계로 가족들이 둘 사이를 반대했지만, 디에고는 프리다 가족의 빚까지 갚아주며 결혼 승낙받습니다. 가족들은 이 커플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 불렀는데요. 앞으로는 행복한 일들만 가득할 것 같았던 프리다를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디에고의 엄청난 바람기였습니다. 디에고는 화가로 승승장구했고 수많은 여성이 그에게 접근했죠. 프리다엔 꿈이 있었는데요. 바로 아이를 갖는 것. 의사가 위험하다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신 3개월째 아이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병상에 누워있는 자기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냅니다. 바로 이 작품이 <헨리포드병원>입니다.

프리다 칼로, 헨리포드 병원, oil on metal panel, 30 x 38 cm, 1932

난과 고통의 반복이나 그런데도 프리다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그림 활용법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프리다의 자유로운 교육 방식에 살아 숨 쉬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녀를 존경했죠. 그리고 프리다는 파리의 전시회에 초청받고, 그녀의 전시는 대성공을 이룹니다. 당시 위대한 예술가들이 찬사를 보냈고, 그림을 본 피카소는 디에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당신도 프리다 칼로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프리다는 이 전시를 통해 프랑스 예술계에서 주목받게 됩니다.

강력했던 삶에 대한 의지

리고 얼마 뒤 멕시코로 돌아온 프리다는 척추 통증이 재발하여 더 이상 앉을 수도 설 수도 없게 됩니다. 척추에 금속을 박는 큰 수술을 받죠. 늘 긍정적이던 프리다도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온 겁니다. 남들에겐 그저 주어지는 것들이 나에겐 전부 허락되지 않는 건지 한탄했죠. 하지만 끝까지 삶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기장에 이러한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나는 일 년을 앓았고, 척추 수술을 일곱 차례나 받았다. 자주 절망에 빠진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그런데도 살고 싶다” 이후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디에고와 친구들은 그녀를 위해 생전 마지막 전시회를 열어줍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자기 전시회를 보지 못할 정도로 악화하였고, 친구들은 그녀를 위해 전시회 한가운데로 그녀의 침대를 옮겼습니다. 프리다는 침대에 누워서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즐겼고 전시회는 그렇게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멕시코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화제가 되며 고난과 고통의 연속인 그녀의 삶에도 봄날의 햇살 같은 행복이 드리웠죠.

프리다 칼로, 비바 라 비다, Oil on masonite, 51 x 60 cm, 1954

녀는 평생 총 32번의 수술을 받지만, 삶에 대한 집념은 누구도 꺾지 못했어요. 이윽고 그녀는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죠. 정물화로 파란 하늘 아래 싱싱한 수박이 속살을 드러냅니다. 겉으로는 견고하지만, 한없이 연약한 과육 식물인 수박은 프리다의 삶과도 닮았는데요. 어쩌면 겉으로 강한 척 살아야 했던 자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작품 밑에 그녀의 한마디가 적혀 있습니다. ‘VIVA LA VIDA’ 해석하면 ‘인생이여 만세'입니다. 프리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인생이여 만세!”

정우철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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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8-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