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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터너는 1775년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드로잉에 소질을 보였는데요.
숲길이나 시골길을 걸을 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풍경을 그렸고 그 습관이 평생 지속됐습니다. 터너의 부모님은 아들의 재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림을 가게에 걸어 판매하기도 했죠. 17세가 되던 해, 폐허가 된 중세 수도원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정확한 원근법을 적용해서 그렸지만 잘 보면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초록색과 푸른색을 더욱 강조해서 그렸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낭만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표현했죠. 아름다운 풍경이나 분위기를 낭만적이라고 표현하죠? 이와 같습니다.
터너의 재능은 일찍부터 주변에서도 알아볼 정도였는데요. 14살이 되던 해,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스물 한 살 때, 수채화 수업 뿐만 아니라 유화 수업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 첫 유화를 출품했는데 이곳에 전시한다는 것은 정부에서 인정하는 화가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24살엔 아카데미의 준회원, 그리고 무려 27세에 정회원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평생을 정회원이 되지 못하는 화가들도 많았는데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에 정회원이 되었죠. 이후 그 실력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원근법을 가르치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은 그.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터너는 주변의 인정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합니다.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여행’ 이었습니다. 깊은 산골이나 협곡, 폭포 등 거대한 자연의 풍경을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왔죠. 당시 터너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에는 거대한 자연의 위력과 압도감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자연 앞에서 직접 느낀 경험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 그리고 색채에 대한 연구를 더해갔습니다. 자연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자연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길 원했는데요. 결국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아카데미 강의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술가가 시대의 요구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예술을 발전시키는 것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겁니다. 그저 의뢰 받은 그림을 그리며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에게 물질적 성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캔버스에 진정한 자연을 담는 것이었죠.
광활한 자연을 오랜 시간 관찰하던 중 문득 자신의 실험을 완성할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눈으로 관찰한 풍경은 완벽하게 잘 짜인 그림과는 다르다는 것이었죠. 구름과 파도, 자연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회화는 결국 평면적이고 정지된 화면을 그리는 것. 터너의 방향이 확실히 정해졌습니다. 관람자가 광활한 자연의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자연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기존 회화의 모든 법칙을 내려놓아야 했고 미술의 모든 전통을 거부해야 했어요. 이는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죠. 주변 지인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연의 움직임을 담기 위한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터너는 무모한 도전을 하는데요.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어느 날 배에 몸을 실어 눈보라의 소용돌이에 들어가게 되죠. 선원들이 안으로 대피할 때 그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최대한 또렷이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두 눈에 담았습니다. 처절한 싸움이었어요. 그 사투를 무려 4시간 가량을 했다고 하는데요. 목숨까지 건 도전이었던 거죠. 신체는 나이 들었지만 이뤄야 할 정확한 목표가 있는 사람의 내면은 늙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가 이상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비웃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런데도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죽는 순간까지 그림에 모든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대중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터너의 연구는 위대한 탄생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사진의 발명으로 정확한 재현의 벽에 부딪힌 미술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프랑스의 한 화가가 영국을 방문합니다. 그는 터너의 그림에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이곳에 그림이 가야 할 미래가 담겨있음을 꿰뚫어 보았죠. 프랑스로 돌아간 화가는 그 충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였습니다. 해가 지는 광경을 빠르게 담아낸 이 그림에 명확한 부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터너의 그림처럼 해가 뜨는 순간의 인상만을 빠르게 그려낸 것이죠. 모네는 빛과 공기를 그리는 힌트를 터너에게 받았던 겁니다. ‘인상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며, 한 화가가 평생을 바친 실험과 노력이 미술의 흐름을 바꾸는 순간이었죠. 한 화가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만든 새로운 회화, 육신은 늙어갈지라도 도전과 용기는 결코 늙지 않았습니다.
터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하기로 하는데요. 개인의 소유에 그치지 않고, 조국의 자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기부’한 것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의 후기 대표작인 전함 테메레르는 BBC 라디오 4 여론조사에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현재 영국 미술계에는 1984년에 제정된 최고 권위의 미술상이 있는데요. 해외에서 활동하는 영국 국적의 미술가나 영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미술가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 바로 ‘터너 상’입니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 할 만하지 않나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 성공만은 아니라는 것을요. 물론 먹고사는 문제인 만큼 중요하죠. 하지만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을 이루기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도 의미 있는 삶 아닐까요?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