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1710년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천보산(天寶山) 근처에서 이정지(李挺之, 1685~1718)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인상의 자는 원령(元靈)이며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보산인(寶山人), 종강칩부(鍾岡蟄夫), 뇌상관(雷象觀), 운담인(雲潭人) 등 다양하다. 이인상은 인조(仁祖)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현손(玄孫)이다. 그러나 그의 증조부인 이민계(李敏啓, 1637~1695)가 이경여의 서자였던 관계로 이인상은 서얼로서 평생을 살았다. 당대서출(當代庶出)이 아닌 원대서출(遠代庶出)이었지만 한번 서얼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면 영원히 자손에게까지 신분이 대물림되는 서얼제도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이인상은 서얼로서 불우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서얼은 음보(蔭補)로 벼슬을 할 기회는 있었지만 중앙관청의 하급직이나 지방의 찰방(察訪) 혹은 현감(縣監) 정도의 한미한 직책 정도를 맡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부분의 서얼들은 경제적 곤궁에 시달렸으며 은거자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인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9세 때 부친을 여의고 22세 때인 1731년에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는 10년 동안 집이 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곤궁한 삶을 살았다. 1741년에 친구 신소(申韶, 1715~1755)가 남산 아래에 있는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사주어서 그는 겨우 무주택자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이인상은 1735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이조(吏曹)의 내자시 (內資寺)와 같은 관청에서 하급직으로 근무하였으며 1747년에 사근역찰방(沙斤驛察訪)을 지냈다. 1752년에 음죽현감(陰竹縣監)을 끝으로 이인상은 관직 생활을 마쳤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마지막 임지였던 음죽현(현재의 경기도 장호원) 근처의 설성(雪城)에서 은거자로 여생을 보냈다.
이인상은 글에서 서얼로서 느낀 비애를 일절 토로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서얼의식’을 드러냈다. <수석도(樹石圖)> (173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그의 서얼의식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그림 1). 이인상은<수석도>에서 바위와 나무들만을 소재로 선택하여 차갑고 황량한 풍경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세 그루의 나무와 바위들만으로 이루어진 <수석도>는 단순한 구도 속에 경물 (景物)이 요점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몇 개의 윤곽선과 담묵(淡墨)으로 처리된 각진 바위의 모습은 간일(簡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하는 이인상 산수화의 요체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적 측면 이외에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면 전체에 퍼져있는 마치 비장감(悲壯感)이 감도는 듯한 고요하고 냉랭(冷冷)한 분위기다. 화면을 관통하는 적막한 분위기는 스산한 풍경과 조응하고 있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이인상은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상태였다. <수석도>를 그린 다음 해인 1739년 음력 7월 말에 그는 종9품의 최하위직인 북부참봉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따라서 <수석도>를 그릴 당시 이인상은 서울에서 집도 없이 셋방을 전전했던 극빈자였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대한 비애와 우울감에 시달렸다. <수석도>에 흐르는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좌절감을 반영하고 있다. 이인상이 겪은 모든 개인적 불행은 그가 서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732년에 덕수 장씨와 결혼을 했다. 1737년에 장남인 이영연(李英淵, 1737~1760)이 태어났다. <수석도>를 그릴 당시 이인상은 부인과 첫돌이 지난 어린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었지만 관직이 없는 포의라서 수입이 없었다. 서얼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곤궁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인상의 서얼의식은 <수석도>의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나무는 차가우나 빼어나고 돌은 문채(文彩)가 있으나 추하다. 무오년(1738)의 한여름에 (이)인상이 장난 삼아 그리다(樹寒而秀 石文而醜 戊午仲夏 麟祥戱寫)”라는 그의 관서(款書)에 나타나 있다(그림 2). “나무는 차가우나 빼어나고 돌은 문채(文彩)가 있으나 추하다”라는 구절은 이인상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소식(蘇軾, 1036~1101)이 문동(文同, 1019~1079)의 그림을 보고 쓴 「문여가화찬(文與可畵贊)」 중 “대나무는 차가우나 빼어나고 나무는 말랐지만 오래되었으며 돌은 추하지만 문채가 있다(竹寒而秀, 木瘠而壽, 石醜而文)”라는 구절에서 온 것이다. 이인상은 소식의 글 중 대나무를 나무로 바꾸었다. 아울러 그는 “돌은 추하지만 문채가 있다”를 “돌은 문채가 있으나 추하다”로 선후를 바꾸었다. 돌은 추하지만 문채가 있다는 말은 옳다. 돌은 겉으로는 못생겼지만 속으로 아름다운 무늬가 있다는 말은 돌이 지닌 내면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다. 돌은 이러한 속성 때문에 전통시대에 군자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문구의 선후를 바꾼 “돌은 문채가 있으나 추하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이상한 표현이다. 이것은 단순한 오기(誤記)일까? 오기가 아니라면 이인상은 왜, 어떤 의도로 문구의 순서를 바꾼 것일까? 이인상의 의도는 이 구절을 비틀어서 자신이 서얼이며 사회적 냉대와 차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인상의 관서에서 돌은 서얼을 지칭한다. “돌은 문채가 있으나 추하다”는 표현은 서얼은 겉으로는 품위 있는 양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멸시와 조롱을 받는 추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돌은 문채가 있으나 추하다”는 표현은 서얼은 겉으로는 양반처럼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폐부를 찌를 것 같은 날카로움이 서린 이인상의 패러디(parody)이다. 그는 겉으로는 높은 학문과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지만 과거 시험을 통해 높은 관직에 나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 불쌍한 절름발이[蹇脚] 양반이었다. 전통적으로 수석도(樹石圖)는 문인화의 핵심적인 장르로 사대부의 도덕적인 고결함을 대변하는 상징적 그림으로 여겨졌다. 특히 한림고목 (寒林古木)은 혹한 속에서도 굳건히 삶을 이어가는 늙은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고난의 시절’을 상징하는 회화적 주제로 특히 원대(元代) 이후 많은 작품들이 그려졌다. 한림고목은 특히 개인적 절망과 좌절의 세월을 암시하는 회화적 주제로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도덕적 고결성을 잃지 않은 사대부들의 내면 풍경을 대변하였다. <수석도>는 ‘한림고목도’의 전통을 바탕으로 서얼이라는 신분으로 말미암아 불우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인상의 서얼의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1738년 여름에 그려졌으나 당시 이인상의 마음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보라 치는 겨울이었다.
이인상의 서얼의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다른 작품은 <검선도(劒僊圖)>(그림 3)이다. 이 그림은 거대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교차하고 있는 곳을 배경으로 칼을 옆에 두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백발의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 왼쪽 하단에 보이는 이인상의 관서를 통해 그가 중국 사람이 그린 검선도(劒僊圖)를 모방하여 그렸으며, 이 그림을 취설옹(醉雪翁)에게 봉증(奉贈)했음을 알 수 있다. 취설옹은 이인상이 존경했던 선배 서얼인 유후(柳逅, 1690~1780)이다. 유후는 궁핍한 생활과 사회적 멸시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의식과 도덕적 고결함으로 당시 모든 서얼 지식인들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이인상은 <검선도>에서 강직한 성품과 맑은 정신으로 평생을 깨끗하게 살았던 유후의 모습을 냉혹하리만치 차갑고 엄격한 모습을 한 채 거대한 소나무 아래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노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왼쪽 아래에 보이는 칼은 군자의 지조와 절개에 대한 상징이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서얼들 사이에서 칼은 신분제의 모순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한(恨)을 대변해 주는 상징으로도 인식되었다. 서얼 시인들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칼집 속의 칼[匣中劍]’에 비유하였다. 칼은 칼집에서 나와 휘둘러질 때 그 가치를 발한다. 칼집 속에 갇혀있는 칼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양반이었지만 서얼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일반적인 지조와 절개의 상징을 넘어 대표적인 서얼 지식인이었던 유후의 신분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이인상 자신을 포함한 서얼들의 고난과 좌절의 삶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유후의 인간적 위엄과 기품은 화면 뒤쪽의 쌍송(雙松)을 통해 더욱더 강조되고 있다. 소나무는 고난의 시절을 살아가는 군자의 불굴의 의지와 지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거대한 두 그루 소나무가 교차하는 모습은 가난과 사회적 멸시 속에서도 당당하게 평생을 살았던 유후의 고귀한 풍모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인상의 서얼의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작품은 <설송도(雪松圖)>(그림 4)이다. 위로 굳건히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몸통과 옆으로 휘어져 누운 소나무가 교차하는 모티프는 <검선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설송도>는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에 자리 잡은 두 그루 소나무가 엄혹(嚴酷)한 겨울을 이겨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강풍이 불어 꼿꼿이 선 소나무의 가지는 아래로 꺾여 흔들리고 있다. 다른 소나무는 강풍을 이기지 못해 옆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이 소나무는 강한 바람 때문에 곧 뿌리가 뽑혀 고사할 운명 속에 있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견디고 있는 옆으로 휜 소나무의 모습은 너무도 처연하다. 이인상은 왜 이와 같이 비극적인 운명에 놓인 소나무를 그린 것일까? 바위 위로 앙상하게 드러난 소나무의 뿌리는 <설송도>가 서얼 지식인으로서 불우하게 한평생을 보냈던 이인상 자신의 내면 풍경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 그림에 보이는 겨울 풍경은 냉혹한 삶의 조건을 암시하며, 뿌리를 드러낸 채 추위 속에서 생명을 보전하려는 소나무의 참혹한 모습은 사회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이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서얼들의 뿌리 뽑힌 삶을 상징하고 있다. <설송도>에는 어떤 글도 적혀있지 않다. 흥미롭게도 화면의 왼쪽 아래에 있는 바위에, 즉 옆으로 휜 소나무의 뽑힌 뿌리 바로 밑에 ‘이인상인(李麟祥印)’이 찍혀있다. 이 인장은 곧 이인상 자신이 뿌리 뽑힌 소나무와 같은 신세라는 것을 암시한다. 조선에서 서얼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고 정착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설송도>는 이인상의 자화상과 같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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