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국(金明國, 1600~?)은 17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도화서 화원으로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취옹(醉翁)이다. 그의 출생과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생몰년도 명확하지 않다. 김명국은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중국 절파(浙派) 화풍을 활용하여 호방한 필치로 그린 산수인물화로 저명했다. 그는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일본에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다녀왔다. 김명국은 산수인물화에도 능했지만 달마도(達磨圖),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등 선종 및 도교 관련 그림에 뛰어났다. 현재 그가 그린 도석인물화 중 남아있는 작품은 <달마도>(국립중앙박물관),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갈대를 탄 달마]>(<달마도> 또는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로도 불림, 국립중앙박물관), <수로도(壽老圖)>(1643년, 일본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수노인도, 壽老人圖)>(일본 쿄토 개인), <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간송미술관)이다. 김명국은 인물의 특징을 속필(速筆)을 사용해 간략하게 묘사했으며 붓질은 매우 힘차고 빨랐다. 그는 먹의 농담(濃淡, 진하고 옅은 먹)과 필선의 비수(肥瘦, 굵고 가는 선)를 적절히 활용하여 인물을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빠르고 간략히 묘사 대상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감필법(減筆法) 또는 감필묘(減筆描)로 유명했다. 감필법은 중국에서 선승화가들이 애용했으며 남송(南宋)시대의 궁정화가였던 양해(梁楷, 12세기 말~13세기 초 활동)가 감필법으로 저명했다. 그의 <이백행음도(李白行吟圖)>(토쿄국립박물관)는 감필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명국의 <수성도(壽星圖)>(그림 1) 또는 <수노인도>는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인 남극성(南極星)을 의인화해서 그린 작품이다. 수성도는 도교의 신선 사상을 배경으로 한 수성(壽星) 신앙 또는 노인성(老人星) 신앙에 기반한 신선도의 일종으로 생일 특히 회갑 축하용 그림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즉 수성도는 장수를 축원하는 축수용(祝壽用) 그림이다. 수성도는 수노인도, 노인성도, 남극성도,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로도 불렸다. 때로는 복성(福星), 녹성(祿星)과 함께 삼성도(三星圖)로 제작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수성도를 보면 수노인은 키가 작고 머리가 크며 이마가 높은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수노인은 긴 수염을 지니고 있으며 발목까지 덮은 도의(道衣, 도포)를 입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거나 또는 두루마리, 불로초, 복숭아, 지팡이, 부채 중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울러 수노인은 산수를 배경으로 옆에 학이나 사슴 또는 동자(童子)와 함께 그려지기도 했다. 김명국의 <수성도>(그림 2)는 화면 왼쪽 아래(수노인 본인의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노인을 그린 작품으로 큰 머리와 높은 이마, 긴 수염 묘사에는 옅은 먹과 가는 필선이 사용되었다. 반면 도의와 신발은 진한 먹과 굵은 필선으로 그려졌다. 김명국은 백발을 한 수노인의 머리와 얼굴 부분은 천천히 섬세한 필선으로 묘사했지만 도의의 윤곽선은 속필을 사용해 단숨에 그려냈다. 먹의 농담 대비 및 필선의 비수 차이가 매우 선명하다. 김명국은 일체의 배경 없이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를 한 수노인만을 간결 명료하게 그려냈다. 그림 왼쪽에는 ‘취옹(醉翁)’이라는 관서(款署)와 ‘김명국씨(金明國氏)’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이와 똑같은 ‘취옹’ 관서 및 ‘김명국씨’ 인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노엽달마도>에서 발견된다. <수성도>에 찍힌 ‘김명국씨’ 인장 아래를 보면 끈이 달린 납작한 물체가 보인다.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본래 거북이이다. 수노인은 거북이를 끌고 다녔는데 김명국이 속필로 이 모습을 간략하게 표현하다 보니 이와 같이 추상적인 형태로 거북이가 표현되었다. <수성도>는 일체의 배경 없이 화면 왼쪽을 바라보며 거북이를 끌고 가는 수노인만을 그린 점에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그림 3)와 화면 구성 및 인물 표현에 있어 유사하다. ‘수로예구’는 거북이를 끌고 가는 수노인을 지칭한다.
<수성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림의 형식이다. <수성도>를 보면 폭이 좁고 상하로 매우 긴 축(軸)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의 대략 1/3 정도가 그림이고 그 위의 공간은 본래 비어있었다. 그림 상단에는 임제종(臨濟宗) 사찰인 쿄토의 토후쿠지[東福寺] 류민안[龍眠菴]의 제241대 주지(住持)였던 타이카 레이센[太華令瞻, 1610~1691]이 쓴 찬시가 적혀있다. 타이카 레이센은 1663년 5월부터 1665년 4월까지 이테이안[以酊菴]의 윤번승(輪番僧)으로 대(對)조선 외교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테이안은 일본이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대마도에 케이테츠 겐소[景轍玄蘇, 1537~1611]가 세운 사찰이다. 1635년에 대마도 번주(藩主)인 소 요시나리[宗義成, 1604~1657]와 가로(家老)인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1603~1684]가 에도막부와 조선 정부 사이에 오간 국서를 위조한 사건인 이른바 ‘야나기 잇켄[柳川一件]’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막부는 대조선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통신사 응접, 조선과 대마도 간 무역에 대한 감시를 위해 쿄토의 임제종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사찰인 오산(五山, 고잔)의 승려들 가운데 유능한 인원을 차출하였다. 대조선 외교 업무를 위해 차출된 승려들이 바로 윤번승이다. 이들은 이테이안으로 파견되어 대조선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직책이 바로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이었다. 대조선 외교문서의 해독 및 작성을 위해서는 고도의 한문 지식이 필요했는데 과거제도가 없었던 일본에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은 불교 승려였다. 윤번승은 처음에는 1년마다 교체되었는데 나중에는 2년마다 바뀌었다. 타이카 레이센이 윤번승이었다는 것은 그가 쿄토 지역에서 당시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수성도> 상단에 보이는 타이카 레이센의 제시(題詩)는 동 시기에 활동한 저명한 주자학자(朱子學者)이자 에도막부의 3대 쇼군[將軍]인 토쿠가와 이에미츠[1604~1651]의 시강(侍講)으로 활동하며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던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 쓴 「코소세츠[後素說]」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코소세츠[後素說]」는 『논어(論語)』」 「팔일(八佾)」 편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뒤로 한다[그림은 흰 화면 위에 그려진다])’라는 구절과 관련된 것으로 후소(後素)는 회사(繪事, 그림 그리기)의 이칭(異稱)이다. 즉 「코소세츠(後素說)」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수성도>는 폭이 좁고 상하로 긴데 화면의 1/3은 그림이, 1/3은 타이카 레이센의 화찬이 차지하고 있으며 중앙 부분은 현재 비어있다. 폭이 좁고 상하로 긴 이러한 축 형식은 이 그림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3~1573], 특히 15세기 초인 오에이연간[1394~1427]에 크게 유행했던 시가지쿠[詩畵軸]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가지쿠는 그림과 글이 하나로 된 축으로 먼저 화가(주로 선승화가)가 축의 1/3 또는 1/4의 공간에 그림을 그리고 다수의 선승들이 이 그림을 감상한 후 자신들의 소회를 화찬으로 남긴 것이다. 선승들은 시가지쿠의 감상과 평가를 위해 자주 시회(詩會)를 가졌다. 어떤 시가지쿠의 경우 화찬을 남긴 사람이 20명을 넘는 예도 있다. 시가지쿠는 서재도(書齋圖), 친한 친구와 이별할 때 준 송별도(送別圖), 중국의 유명한 시를 소재로 한 시의도(詩意圖) 등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시가지쿠 중에는 매화(梅花), 중국의 고사인물(故事人物), 도교 및 불교 관련 인물을 그린 작품도 있다. 서재도 형식으로 그려진 <계음소축도(케이인쇼치쿠즈)>(그림 4, 1413년, 쿄토, 콘치인(金地院))는 시가지쿠의 전형적인 예로 상, 중, 하 3단 구도로 되어있다. 15세기 초에 유행했던 시가지쿠의 대부분은 가로 30~34cm, 세로 100~120cm의 크기를 보여준다. <수성도>는 가로 26.6 cm, 세로 112cm로 높이는 일반적인 시가지쿠의 높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수성도>의 폭은 일반적인 시가지쿠의 폭보다 좁다고 할 수 있다.
김명국의 <수성도>는 그림에 ‘취옹[술에 취한 노인]’이라는 호를 사용해 서명한 것을 고려해 보면 그가 1643년에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린 그림으로 생각된다. 김명국은 ‘연담’과 ‘취옹’ 두 호로 그림에 관서를 했는데 취옹이라는 호가 ‘술에 취한 노인’이라는 뜻을 고려해 볼 때 연담보다 늦게 쓴 호로 여겨진다. <수성도>는 전형적인 시가지쿠 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일본인들이 김명국에게 특별히 의뢰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이 그려졌을 때 이미 시가지쿠는 일본 회화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그림 형식이었다. 시가지쿠는 200여 년 전인 무로마치시대 초기에 유행했다. 따라서 김명국의 <수성도>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15~1868] 초기에 그려진 매우 희귀한, 아울러 조선의 화가가 그린 시가지쿠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15세기 이후 제작된 시가지쿠 중 알려진 예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수성도>는 일본회화사 연구에 있어서도 희귀성 면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그림이다. 결론적으로 김명국의 <수성도>는 1643년에 시가지쿠 형식으로 그려진 수노인 그림으로 형식 면에서 매우 진귀한 작품이다. 조선통신사 수행화원들이 남긴 작품들 중 시가지쿠로 제작된 그림은 현재 <수성도>를 제외하고 알려진 것이 없다. 또한 조선통신사 수행화원들이 방일(訪日) 중 제작한 그림 중 연대와 제작 배경이 명확한 그림이 거의 없는데 <수성도>는 김명국이 방일 중 제작한 그림이 확실하다. 아울러 <수성도>는 현존하는 수성도 중 시가지쿠 형식으로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또한 이 그림은 한일(韓日) 회화 교류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지만 일본회화사에서 17세기까지 잔존했던 시가지쿠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줄 수 있는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다. 아울러 1663~1665년에 이테이안의 윤번승으로 대조선 외교 업무를 담당했던 저명한 선승인 타이카 레이센이라는 인물과도 관련된 그림인 <수성도>는 에도막부와 조선 조정 사이에 전개되었던 외교사를 밝히는데도 크게 기여할 중요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 학계의 관례를 따른다는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 원발음에 가깝게 표기하였습니다.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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