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는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 김홍도는 중인 출신으로 그의 고조부, 증조부가 모두 무관이었다. 즉 그는 무관 벼슬을 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김홍도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도화서 화원(畵員)이 되었는지 등 그의 초년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21세 때인 1765년에 도화서 화원으로 《경현당수작도계병》을 제작한 것을 보면 그는 대략 10대 후반에 도화서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경현당수작도계병》은 1764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즉위 40년, 나이 7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1714~1782)과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윤성(李潤成, 1719~?)이 발의하여 제작한 병풍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병풍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김홍도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즉위하면서 일약 최고의 도화서 화원으로 입신했다.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신뢰는 매우 깊어 궁중의 그림 관련 일을 모두 김홍도에게 맡겼다. 김홍도는 정조의 성은에 감격해 울곤 했다.
김홍도는 30대 초반에 《군선도》(1776년)(그림 1), 《행려풍속도》(177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 명작을 그렸으며 명성이 날로 높아져 국중(國中) 최고의 화가가 되었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아 밀려드는 그림 주문을 감당하느라 먹고 잘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김홍도는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타고난 천재였다. 아주 어렸을 때 문인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에게 기초적인 그림 기법을 가르쳐주기는 했다. 그러나 김홍도와 강세황은 그림 실력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강세황이 김홍도의 그림 선생으로 자주 이야기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기록에도 김홍도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나와 있지 않다. 김홍도가 선생 없이 독학했음은 이용휴(李用休, 1708~1782)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용휴는 “김군 사능(김홍도)은 스승이 없이도 지혜로써 새로운 뜻을 창출하고, 그 붓이 간 곳에는 신(神)이 모두 함께 하니… 옛 사람이 보지 못함이 나의 한이다”라고 홍도가 스승 없이 그림의 대가로 성장했다고 말하였다. 홍신유(洪愼猷, 1722~?)는 “김사능(김홍도)은 나이 삼십이 채 못 되어 화명(畵名)을 세상에 떨쳤으니 대개 천재(天才)가 높은 탓이다”라고 김홍도가 천재였다고 평가하였다.
김홍도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도석화(道釋畵, 도교 및 불교 관련 그림) 등 그림의 모든 장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그의 천재성 때문에 가능했다. 도화서 화원 집안 출신의 쟁쟁한 선배 및 동료 화원들을 제치고 천재성 하나로 국중 최고의 화가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김홍도는 정조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화가가 되었다. 정조는 1783년에 시행한 자비대령화원(차비대령화원) 선발에서 김홍도를 제외했다. 그 이유는 실력 면에서 김홍도와 자비대령화원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도화서 화원들 중 우수한 화가 10명을 선발해 자비대령화원으로 삼았으며 이들을 규장각에 배속시켰다. 자비대령화원들은 당시 최고급의 화가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위에 김홍도가 있었다. 정조의 치세 기간 내내 김홍도는 자비대령화원이 아닌 매우 특별한 ‘왕의 화가’로 활동했다. 정조는 이와 같이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김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화가였다.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공로로 김홍도는 안기찰방(1784~1786)과 연풍현감(1792~1795)을 지냈다. 그는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만년의 김홍도는 초라했다. 1800년 6월 28일, 자신의 최대 후원자였던 정조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일대 충격이었다. 정조의 사망은 김홍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정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1년 반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김홍도는 본래 자비대령화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1804년 5월 5일 김홍도는 자비대령화원으로 처음 선발되어 이후 다른 자비대령화원과 함께 인사고과 시험인 녹취재(祿取才)에 응하게 되었다. 자비대령화원으로 선발된 것은 김홍도에게 엄청난 수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회갑이 다 된 김홍도는 젊은 자비대령화원들과 함께 이제 녹봉을 받는 직책을 다투기 위해 녹취재를 치러야 했다. 당시 그가 느꼈을 인간적 모멸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1805년 8월 19일에 마지막 녹취재를 치른 이후 김홍도는 병고에 시달렸다.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하며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 같다. 그의 병은 점점 위중해져 생사를 오갈 정도로 심각해졌다. 정조가 죽은 후 김홍도에게 불어 닥친 시련은 혹독했다. 국중 최고의 화가에서 일개 자비대령화원으로 전락한 현실을 그가 감당하기는 너무도 어려웠던 것이다.
1805년 11월 그는 한창 병이 깊어 생사를 오가는 처지에 있었다. 이해 11월 29일에 김홍도는 김생원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가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 차례 겪고 생사 간을 오락가락하였으니 오랫동안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중에 한 해의 끝이 다가오매 온갖 근심을 마음에 느끼지만 스스로 가련해 한들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편지를 쓴 지 며칠 후 김홍도는 생애 마지막 그림인 <추성부도(秋聲賦圖)>(그림 2)를 완성하였다. <추성부도>를 그릴 무렵 김홍도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아팠다.
<추성부도>는 북송(北宋)의 저명한 문인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지은 「추성부(秋聲賦)」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추성부」는 어느 날 구양수가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를 듣고 놀라 동자(童子)에게 무슨 소리인지를 알아보라고 한 것에서 시작된다. 동자는 그 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나는 바람 소리라고 알려준다. 이것을 듣고 구양수는 조락(凋落)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자연은 영원한데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청년 시절의 붉은 얼굴이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버리고 까맣던 머리도 백발이 되어버리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결국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은 영원한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며 그는 「추성부」를 마쳤다.
김홍도는 <추성부도>의 끝에 구양수의 「추성부」 전문(全文)을 직접 써넣었다. 이 그림에서 김홍도는 마른 붓질인 갈필(渴筆)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가을날의 쓸쓸함, 차가운 공기와 매서운 바람, 처연한 달빛, 거칠고 황량한 나무 등 스산한 분위기의 가을밤 풍경을 그려냈다. 대각선 방향으로 포치(布置)된 바위산과 언덕은 초옥과 마당을 감싸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초옥(草屋) 안의 구양수와 나무를 가리키는 동자가 나타나 있다(그림 3). 「추성부」를 통해 구양수가 전하고자 했던 인생의 허망함과 쓸쓸함이라는 메시지를 김홍도는 <추성부도>를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추성부도>는 구양수의 문학작품인 「추성부」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추성부도>는 실은 죽음에 직면한 김홍도가 자신의 심정을 그림으로 전한 것이다.
그가 「추성부」를 자신의 마지막 그림 주제로 정한 것은 그 의도가 매우 심중(深重)하다. 젊은 시절 김홍도는 고금의 어느 화가도 그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라는 극찬을 주위로부터 받은 조선 최고의 화가였다. 임금인 정조의 후원 속에 그는 화가로서 빛나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만년에 그는 선생님 댁에 보내는 삭전(朔錢), 즉 아들의 한 달 치 교육비도 내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으며 생사를 오갈 정도로 아팠다. 매우 위중한 상태에서 김홍도는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추성부도>를 그렸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비애와 슬픔을 전하고자 했다. 김홍도는 <추성부도>에서 가을의 소리인 바람 소리를 흔들리는 나무들과 마당에 나부끼는 가을 나뭇잎을 통해 시각화하였다(그림 4). 이것을 보면 그가 천재화가였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죽음 직전에도 거장은 역시 거장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김홍도는 사력을 다해 이 그림을 완성하였다. 동아시아에서 그려진 어떤 <추성부도>도 김홍도의 이 작품을 능가하지 못한다. <추성부도>는 죽음 앞에서 느낀 김홍도의 슬픈 심정을 알려주는 그의 자화상이자 그가 남긴 최후의 역작이었다.
<추성부도>를 그린 후 그는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로 갔다. 얼마 후 평소 김홍도와 친분이 있었던 전라도 관찰사(전라감사)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1805년 12월 31일 형조판서인 서용보(徐龍輔, 1757~1824)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홍도가 굶주리고 아픈 상태로 취식(取食)을 위해 이곳에 왔다. … 어렵고 딱하기가 이와 같으니 동국(東國)의 타고난 재주로 가당치도 않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김홍도가 1805년 말에 밥을 얻어 먹으러 전주에 내려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김홍도에 관한 다른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1806년에 그는 전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 시대를 울린 거장의 마지막은 너무나 초라했다.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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