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 가는 망원시장에서 어제 일어났던 일이다. 할아버지는 시대가 바뀐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습이고, 젊은 여자분은 난데없이 돌 맞은 격이다. 다행히 충돌은 3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끝났고, 서로를 재수 없어 하며 각자 갈 길을 갔다. 최근 들어 이런 황당한 충돌을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생활에서 일어나는 충돌이 흔히 그렇지만, 여기에도 여러 가지 가치관이 뒤섞인 채 대립하고 있다. 언뜻 생각해보더라도, 남에게 관여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시각의 차이, 나이가 힘을 갖는 영역에 대한 견해의 차이, 반려동물을 대하는 인식의 차이 등이 뒤섞여 있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다. 즉 인간이 반려동물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대략 1천만 명에 이르고, 그 수가 매우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2016년 7월 기준) 다섯 명 중 한 명이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공원에 가면 많은 이들이 개와 산책을 하고 있고, 텔레비전을 틀면 광고나 프로그램에 고양이가 수시로 나온다. 반려동물 관련 컨텐츠가 넘쳐나고 있고, 반려동물 관련 산업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한,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활영역에서 직간접적으로 반려동물과 접하고 있는 셈이다. 반려동물과 관련하여 왜 이렇게 많은 관심이 생기는 것일까? 산업적인 측면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다른 영역에 비해 가히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는 ‘애완동물(pet)’이라고 부르던 것을 언젠가부터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용어는 이제 아주 익숙해졌다. ‘애완동물’이 동물을 키우는 데서 인간이 느끼는 즐거움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반려동물’은 동물이 단지 장난감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친구, 혹은 반려의 존재임을 강조한 말이다. 1983년 10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움에서,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개념이, 국내에서는 2007년 동물보호법 개정 이후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원이야 어찌되었든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며, 자연스럽게 ‘반려동물’이라는 용어의 정착이 이뤄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려동물을 대하면서 사람들이 갖는 만족감에 대해, 동물병원에서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도 해보고, 이런 저런 책을 보기도 하고,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자료를 접하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느낀 부분이 있는데, 반려동물을 대하면서 보호자들이 갖는 정서적 변화를 표현하는 포커스의 이동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귀엽다. 예쁘다. 멋있다. 즐겁다. 재미있다. 나를 돋보이게 한다. 내 이미지가 좋아진다.“
“심심하지 않다. 외롭지 않다. 편하다. 마음이 포근하다. 안정된다. 여유가 생긴다. 피로감이 가신다.
마음이 달래진다. 상처가 치유된다. 존중받는 느낌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관련 산업이 팽창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고, 진심을 나누는 관계가 줄어들고 있다. 모두들 너무 외로워하고, 피로에 지쳐있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역사적 국면, 글로벌한 차원의 경제적 상황에 더하여, 대한민국이란 사회의 특수한 요인들은 이런 변화 양상을 더욱 극렬하게 재촉한다. 몇 년째 지치도록 듣고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이혼율, 자살률, 저출산 추세, 고용불안, 사회적 불평등, 계층 갈등 등의 용어들은, 우리 삶의 물질적, 정서적 토대가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불안정한 상황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위안을 얻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서, 반려동물이 우리 삶에 점점 더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다른 위안거리와 질적으로 다른 점은 그들이 독자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결국 상호적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반려동물이 귀엽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며 재미있기도 한 ‘애완(사랑스런 장난감)’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만족스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본적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와 똑같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독자적 존재이고,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생명체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체임을 알아야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관계에서 지친 우리가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들은 인간보다 덜 분열적이고, 덜 계산적이며, 훨씬 더 순수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그들에게서 포근함을 느끼고, 존중받는 느낌을 가지며, 믿음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반려동물과 맺는 관계방식의 변화는, 인간이 타인과 맺는 관계 방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타인과의 관계 방식이란 점에서, 적대적인 투쟁이 만연했던 야만사회, 지배/예속 관계가 지배했던 전근대사회와, 민주와 평등을 지향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 인간끼리 평등하게 관계 맺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수세대 지속되면서, 그러한 관계맺음의 방식은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다른 존재들, 특히 반려동물에게까지 확대되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방적으로 잡아먹고, 일 시키고, 데리고 놀던 존재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배려하고 존중해야한다는 사고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역사적 상황 변화와 다르게, 반려동물에 대해 발생하는 이러한 변화가 당사자(인 동물들)의 저항이 아니라, (동물의) 보호자들의 자각에 의한 나타났다는 점은 매우 큰 차이이다. 인간이 동물과 맺어야하는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지속적 고민과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수 만년 이상 인간이 동물과 맺어온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런 변화는 혁명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저항과 충돌이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예를 든 망원시장의 그 할아버지로서는 개를 아기처럼 대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처음 본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 할아버지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발생하는 충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은 사실상 수없이 많은 충돌 중 하나에 불과하다. 동물복지나 동물권과 관련된 신문기사마다 댓글의 앞부분은 꼭 개고기 식육 문제와 개 돌볼 힘 있으면 인간에게 잘 하라는 이야기가 도배가 되곤 한다. 관계도 없는 기사에 대해 이런 댓글을 달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지배하고 마음대로 하던 존재에 대해 함부로 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존중해야한다고 하는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개나 고양이를 반려의 존재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매우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수가 된다하더라도, 오래 지속되어온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이러한 충돌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의와 설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설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려동물과 보호자가 편안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중요하다. 애지중지하며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기보다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그들이 본성대로 살 수 있게 배려해줘야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과 믿음을 나누며 아름답게 지낼 수 있다. 애초에 이용당하며 놀이개감으로 살기위해 태어난 개, 고양이는 없다.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 서로가 바람직한 모습으로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은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 즉 먹이와 생활공간을 마련해주고, 건강하고 활력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은 기본이다. 즉 반려동물이 스트레스를 적게 느끼며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보호자인 내가 건강하고 여유 있어야 한다. 내 삶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연스런 교감의 완성을 추구하는 방식이어야 하고, 그것은 나 스스로가 건강해야만 가능하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이 천만인 시대가 되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되돌이켜 생각해볼 시점인 것이다. 반려동물과 만나게 된 계기가 무엇이든, 현재 그들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고, 내가 그들과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있건간에, 함께 하기로 했다면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들과 더욱 친밀해지고, 그들의 입장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가 그들과 맺어야 하는 바람직한 관계의 구체적 모습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 입장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신뢰와 애정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를 고양시키는 관계가 될 것이다. 우리 삶이 어딘가에 던져진 채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고, 나의 개와 고양이도 나에게 던져진 채 그들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내 삶의 동반자이며, 나는 그들에게 하나의 우주다.
이원영
수의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복돌이'라는 개 한 마리를 만난 후 수의학을 전공해 수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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