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구한말 신종교의 발흥과 개벽적 사유

암흑기에 등장한 신종교 19세기 조선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오랜 세도정치는 과거시험을 비롯한 모든 인사의 원칙과 공정성을 무너뜨렸으며, 세도가에 대한 줄서기가 가장 중요한 처세의 술로 여겨지도록 만들었다. 정치는 백성의 삶을 돌보기보다는 세도가들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그들의 권력을 확대하는 모략과 권모술수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삼정의 문란’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생존조차 버거운 극심한 고통과 질곡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돈으로 벼슬을 산 지방 수령들은 가혹한 세금 착취로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고, 민심은 더욱 각박해졌다. 사람의 마음이 각박해지자 하늘의 마음도 끊기고 땅의 기운도 막혀, 매년 가뭄과 홍수, 그리고 괴질이 횡행했다. 모순과 부조리,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팔도를 뒤덮었다.

러한 시기에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살 길을 안내해야 할 학문은 오히려 신분적 질서를 강화하고 온갖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 아노미적 상황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이 시기를 “악질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고 탄식했다. 또 시인 신동엽은 당시 상황을 수운의 관점에서 이렇게 읊기도 했다.

짚신 신고
수운(水雲)은, 3천리
걸었다.

수도(修道) 길.
터지는 입술
갈라지는 발바닥
헤어진 무릎.

10년을 걸으면서,
수운은 보았다.
팔도강산 딩군 굶주림
학대,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農奴).
학정(虐政)
뼈만 앙상한 이왕가(李王家)의 석양(夕陽).

런가 하면, 19세기 중엽부터 서양 제국의 동양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조선땅에도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른바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서양은 대포를 실은 군함을 앞세우고, 선교사를 뒤로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양을 그야말로 유린했다. 중국의 천진에 이어 북경마저 서양의 무력에 무릎을 꿇게 되자, 조선 천지는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러한 서구의 충격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의 대응은 크게 둘로 나눠졌다. 하나는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 수호를 위한 극렬한 저항, 다른 하나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수용이었다. 이른바 위정척사와 개화사상이다. 이 둘은 모두 양반 지식인의 위로부터의 대응이었다.

런데 이 외에 서양의 충격에 대해 단순한 저항이나 무조건적 수용이 아닌, 민중의 입장에서 서양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되, 이미 가지고 있었던 민족의 영성과 지혜를 바탕으로 그것을 녹여낸 사례가 바로 동학을 비롯한 증산, 원불교 등의 신종교였다. 이들 신종교들은 위에 언급한 절체절명의 대내외적 위기에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려 하였다.

‘다시 개벽’의 열망, 동학 중에서 그 시작을 열었던 최수운(1824~1864)의 동학(東學)은 원래 ‘동국(東國)의 학’이란 의미로, 우리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한 ‘우리 학문’이자 ‘우리의 도(吾道)’였다. 그 핵심적 내용은 모든 사람들이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최수운은 이 시천주의 자각을 통해 하늘님은 우리의 안팎에서 우주적 기운과 우주생명으로서 실재하되, 이 우주생명은 인간의 행위를 판결하고 심판하는 존재가 아닌, 선악(善惡)의 상대적 세계를 넘어선 ‘불택선악’의 궁극적 실재이자, 그 자체로 신성한 생명의 에너지, 창조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과 화복(禍福)은 전적으로 인간 스스로의 마음 씀에 달렸으며, 하늘님은 그 마음 씀에 따라 그것을 구현시켜 주는 창조성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인간 스스로가 자기 운명을 만드는 창조적 주체, 자율적 주체라는 각성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신분에 관계 없이 하늘님을 모신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운을 계승한 최해월(1827~1898)은 시천주를 다시 “모든 사람들을 하늘님처럼 섬기라”고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과, 모든 만물을 공경하는 경물(敬物)의 삶, 그리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돕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전통으로 재해석하는 한편, 천지부모와 이천식천 등의 생태학적 사유를 통해 동학을 진정한 평민의 철학이자 생명사상으로 발돋움시켰다. 이러한 수운과 해월의 동학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 신분을 넘어선 수평적 공경과 평등, 외세와 학정에 대한 민중적 저항성, 그리고 ‘다시 개벽’의 새로운 삶과 문명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편 동학을 이어 ‘해원상생’을 부르짖은 고부 출신의 강증산(1871~1909)은 모든 밑바닥 중생들의 원한과 아픔을 풀고,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가장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역사의 정면에 등장하고, 가장 모순이 극심한 땅에서 진정한 개벽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는 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방법은 대립과 투쟁이 아닌 조화와 화해, 상생과 용서라는 것을 가르쳤다. 이로써 인류의 오랜 대립과 투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선천의 모든 문명, 인간을 포함한 중생계 전체의 뒤틀린 상극의 문화와 이로부터 파생된 모든 혼란을 바로잡음으로써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공존공생과, 상생의 가치에 바탕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개벽종교의 가르침

편, 원불교를 창도한 소태산(1891~1943)은 독자적인 수도(修道)를 통해 우주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부처와 성인의 심인(心印)이며 중생의 본성자리인 일원상(一圓相)을 깨쳤다. 그는 이 깨침을 불교를 중심으로 펼치되, 불법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누구나 일상에서 부처님의 법을 실천할 수 있는 생활불교를 제창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상의 밑바닥에는 개벽의 사유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개교 표어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正典」)”고 하였다.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한 세상은 묵은 세상의 끝이요 새 세상의 처음”이라 하면서 “앞으로 올 새로운 세상은 과학으로 인한 물질문명과 도덕으로 인한 정신문명이 만나 조화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수운과 증산을 계승한 개벽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처럼 한국 근대 신종교들은 ‘개벽’이라는 공통된 키워드를 가진 ‘개벽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날과 같이 투쟁과 상극(相剋)이 지배하는 세상이 곧 끝나고 모심과 살림, 상생(相生)의 정신에 의한 살기 좋은 세상이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예정론이나 말세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날이 언제 오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대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자연을 대하는 삶의 방식의 전면적 전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자기 삶의 자율적 주체로서 서야 한다. 바깥의 수직적인 위계의 절대자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천지를 공경하되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로서 몸과 마음을 공경하고, 주변의 사람과 뭇 생명을 공경하고 살리는 ‘생명살림’의 삶으로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물질적으로는 많은 개선이 있었지만, 구한말 못지않은 민생의 불안, 불평등과 차별이 엄존하고 있다. 게다가 기후위기를 비롯한 생태계의 절멸적 위기, 그리고 정신적인 어려움은 더 가중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시기에 개벽종교의 가르침은 한때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날 서구의 근대문명과 동양의 유교문명을 넘어서 새로운 도의적 생태문명을 열어 나갈 수 있는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 마음에서 우주가 열리고, 한 마음으로 우주가 닫힌다. 그 우주적 열림이 개벽이다.

* 사진: 필자 제공

김용휘
글 / 김용휘

대구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 대표, 종교환경회의 공동대표, 1969년생

저서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
『손병희의 철학: 인내천과 이신환성』 『최제우, 용천검을 들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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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1-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