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헌책방 50년 순례기

그 시절 유일한 문화시설 책방은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우리를 품어주었기에 더욱 간절히 그리운 것 같다. 국민소득이 100불 남짓해 북한은 물론 아프리카 저개발국보다도 가난했던 시절, 동네에 하나씩은 있었던 헌책방은 마을의 유일한 문화시설이었다. 신경림 시인도 헌책방을 통해서 한국문학의 명작들과 만났다.

스무 살의 독서는 동대문의 헌책방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이전이다. 청계천에서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개울가로 줄지어 서 있는 헌책방에는 전쟁통에 쏟아져 나온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며칠에 한 번쯤 나가 손이 새까매지도록 뒤지고 나면 말로만 듣던 귀한 책들이 어수룩한 책방주인의 눈을 피해 자장면 한두 그릇 값으로 내 손에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구해 읽은 책들이 홍명희의 『임거정』, 이태준의 『복덕방』, 김남천의 『대하』, 한설야의 『탑』 같은 소설과 이용악의 『낡은 집』, 『오랑캐꽃』, 오장환의 『병든 서울』, 『성벽』, 백석의 『사슴』 등 시집들이다.1)

시 영문과 학생이었던 그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호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 시인 신경림도 지식의 갈증을 해결할 곳은 헌책방밖에 없었다. 1958년의 청계천 복개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으니 궁핍이 오죽했을까! 시인은 그런 곤궁 속에서도 책더미를 뒤져, 강의 시간에는 만날 수 없었던 백석의 『사슴』을 구해 밤을 새워 읽었다 하니 그에게 있어 이 시절 헌책방은 도서관이면서 강의실이었다.

문과 새내기였던 필자가 헌책방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찌 보면 70년대 치열했던 데모 덕분이었다. 1975년 봄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되고, 대학 캠퍼스를 군인과 탱크가 차지하게 되어 강의는커녕 도서관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정처 없던 발길이 헌책방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나게 된 ‘헌책방’이 평생의 벗이 될 줄을 당시에는 꿈도 못 꾸었다.

자의 집 근처인 연신내(갈현동)에도 헌책방이 몇 곳 있었다. 연신내 개울 건너 중앙서점이 있었고, 조금 올라가 일문서점, 왼쪽으로 꺾어지면 문화당이 있었는데 중앙서점 아저씨는 아직도 현역으로 행운서점(종암동) 사장님이시다. 소위 변두리 서점인 이 책방들은 주변 고물상을 통해 물건을 조달해가며 근근이 버티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 강남 개발과 해외 이민으로 인해 이사 가는 집들이 많아져 물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렇게 나온 책들은 삼성출판박물관과 마포의 범우사를 비롯해 각 대학 도서관 등으로 모두 들어갔다. 국문과 학부생인 필자로서는 권당 30원 하던 《사상계》, 《현대문학》 등 월간잡지를 사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용돈을 아껴 서정주의 『귀촉도』, 김명순의 『생명의 과실』 등을 구하기도 하였다. 잡지 수십 권을 양손에 나눠 들고 서너 정거장을 걸어 집에 가서는, 책이라면 진저리치시는 모친의 눈을 피해 장독대에 감춰두었다가 밤비에 책을 모두 적셔버린 씁쓸한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변두리 헌책방 리가 쉽게 만나는 헌책방은 변두리 헌책방이다. 서울 어느 지역이든 초‧중‧고등학교가 있는 곳 주변에는 대부분 헌책방이 있었다. 헌책방의 스테디셀러인 교과서와 참고서를 사고파는 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영세한 변두리 헌책방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화, 교과서, 참고서 등을 사고팔아서 점포의 월세를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서울지역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겠지만 필자가 다녀본 변두리 헌책방을 살펴보면, 앞에 거론한 연신내를 비롯해 신촌과 남가좌동, 마포 합정동과 망원동 일대, 서울대 앞과 신림동, 봉천동 지역, 삼선교와 돈암동 일대, 장승백이(현 장승배기) 삼거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신흥 주택가가 형성된 지 십 년가량 지났든지 대학 등 교육기관이 들어선 곳이다. 헌책방 운영에 있어서는 판매할 헌책을 구하는 것이 관건인데, 갈현동이나 수유리 등지는 60년대에 들어선 국민주택이 있어 그것이 비교적 용이했다. 또한 주택단지가 개발될 때 대부분 학교도 설립되기 때문에 고객의 확보에도 문제가 없었다. 요컨대 헌책의 수요와 공급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중심으로 헌책방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70년대 후반 경북 예천 출신 분들이 시내 곳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는데 옥호(屋號)가 모두 ‘문화당’이었다. 청구동, 장승백이, 연신내 등 여러 곳에 있었는데, 현재는 정릉에 한 군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두리 헌책방에서 거둬들이는 헌책은 그곳에서 모두 판매되지 못하고 거간꾼(중개인, 일본말로 나까마)을 통해 시내로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청계천 헌책방이다. 한국전쟁 이후 혜화동에서 문리대를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대학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헌책방 거리가 생겼다. 60년대에는 180여 곳이나 되었다는데 전성기를 지난 90년대에 이르러서는 30여 곳으로 줄어든 이후 현재에는 동묘 근처와 부근 몇 곳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책을 멀리하는 세태로 변하였고, 책을 구하기도 어려워졌으며, 가게 월세가 지나치게 비싸져서 결국 헌책방은 사양(斜陽) 업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필자는 청계천 헌책방을 자주 찾지는 않았다. 급히 필요한 책이 있으면 마지못해 찾았는데 집집마다 찾는 책을 말하기도 힘들어 종이에 써서 보여주면서 순회하였다. 동대문야구장에 갔다가 시간 나면 들리기도 했는데 좁은 책방에서 책 구경하다 주인장의 따가운 눈총에 서둘러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대학교재나 사전류 등을 구할 때는 청계천이 고마웠고, 덤핑 책이나 심지어 ‘19금(禁)’책도 청계천에는 지천이었다.

제강점기 경성의 고서점2)들은 충무로와 관훈동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충무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군서당, 문광당 등이 있었고, 관훈동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한남서림, 삼중당, 금항당, 문우당 등이 있었다. 한남서림 주인이기도 했던 간송 전형필은 그 인연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했다고 한다. 고서점(古書店)은 사실 ‘헌책방’의 다른 표현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이다. 1970년대에는 청계천의 한두 곳을 제외하고 고서점은 모두 인사동(관훈동)에 자리해 있었다. 1934년 ‘금항당’으로 시작해 이제 곧 90주년을 맞이하는 통문관을 비롯하여 경문서림, 영창서림, 문고당, 승문각, 관훈고서방 등 고서점이 즐비했으나 필자는 찾는 책들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돌이켜 보건대 그 고서점들에 필자가 찾던 책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애송이 대학생이 고가(高價)의 책을 찾으니 아예 상대를 안 했을 것이다. 결국 인사동에서도 원하는 책은 구할 수 없었다.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머니가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헌 이야기가 된 헌책방 퓨터의 개발과 인터넷 보급으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고, 헌책방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헌책방의 쇠락(衰落)은 인터넷 때문만은 아니다. 교육현장의 변화가 가장 심각했고, 쓰레기 수거 방식의 변화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교과서나 참고서를 팔아서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고, 쓰레기들이 ‘분리수거’되면서 헌책방으로 리사이클 되는 데에 문제가 많았다. 결국 ‘못 먹고 못 살던’ 시대에서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면서 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변했고, 거기에 ‘인터넷’까지 나타나게 되자 헌책방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변두리 헌책방이나 청계천 헌책방들 대부분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인터넷 헌책방이 차지하였다. 헌책방 통합검색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현재 접속이 되지 않는 곳을 포함하면 100여 곳의 인터넷 헌책방들이 올라와 있다. 인터넷 헌책방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데, 필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대부분 오프라인 매장을 겸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인터넷 고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곳이 한때 인기가 높았는데 물건을 지속적으로 구하지 못하게 되어 요즘은 그 인기를 경매회사 측에 빼앗기고 말았다.

책방을 ‘책을 사는 곳’이라고만 한다면 그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헌책방에서는 책만 사는 게 아니라 주인아저씨가 타 주는 달달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적당한 수다와 에누리, 먼지까지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집을 사러 갔다가 다른 손님과의 대화 끝에 잡지를 사기도 하고, 소설책을 사러 갔다가 주인장의 권유로 회고록을 사서 나오는 곳이 헌책방이다. 헌책방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외눈박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헌책방”이라는 시인 이승하의 말3)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먹고 살기가 넉넉해지면서 많은 헌책방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분명한 것은 헌책방이 그립다고 다시 가난한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헌책방은 헌 이야기가 되었다.

1) 신경림, 「동대문 헌책방 돌며 맛본 명작의 감동」, 동아일보, 1993. 07. 21.2) 일본식 표현으로는 ‘고본옥(古本屋)’임.3) 이승하, 『헌책방에 얽힌 추억』, 모아드림, 2002, 126면

오영식
글 / 오영식

근대서지학회 회장, 대전광역시 문화재위원, 1955년생

저서
『해방기 간행도서 총목록』 『한국 근현대 시집 100년』(공저) 『김광균 문학전집』(공저)
『틀을 돌파하는 미술-정현웅 미술작품집』(공저) 『오래된 근대, 딱지본의 책그림』(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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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6-2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