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한낮의 우울과 한밤의 음악

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우리를 한순간에 일제 강점기의 경성 한복판으로 안내한다.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 소설은 일제 강점기 엘리트의 날카로운 비애와 무기력한 자의식을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주저하고 주춤거리는 속도로 보여준다. 근대의 음악 문화를 살피는 데 있어서도 이 소설은 단지 그 시절에도 클래식 문화가 있었고 경성 한복판에 낭만적인 다방이 있었다는 식의 단순 정보 이상의 비애를 들려준다.

설가 구보 씨는 경성 시내의 다방을 전전한다. 먼저 전차에서 내려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 자리) 쪽으로 걸어서 소공동 입구의 다방 ‘낙랑파라’로 들어간다. 박태원 자신을 비롯하여 화가 구본웅, 문필가 김소운 등이 드나들던 곳으로 해방 이후 서울대 미대 교수로 석조 공예 분야의 1세대로 활약한 이순석이 차렸다. 당시 경성 한복판에는 영화감독 이경손의 ‘카카듀’(1927년 개업), 영화배우 복혜숙의 ‘비너스’(1928년 개업), 영화배우 겸 미술감독 김인규의 ‘멕시코’(1929년 개업), 시인 이상의 ‘제비’(1933년 개업), 극작가 유치진의 ‘플라타느’(1934년 개업) 등이 서구에서 일제를 경유하여 강제로 이식된 문화를 나름대로 변용하여 근대문화의 일상적 장소로 삼았다.

공동에 위치한 유치진의 ‘플라타느’는 실험적인 전시회가 자주 열렸고 구보 씨가 소설 속에서 들어섰던 ‘낙랑파라’ 역시 전시회, 발표회, 음악 감상회가 자주 열렸다. 박옥화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삼천리》 1933년 10월호)이라는 글에서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 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을 걸었고,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어놓아 있어 어쩐지 실내 실외가 혼연조화되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고 썼는데, 딱 그와 같은 실내에서 박태원과 문우들이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곳에서 박태원의 주인공 구보 씨는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우울한 사색에 사로잡힌다.

“다방의 오후 두 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동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랑파라를 나온 구보 씨, 이번에는 경성역으로 가서 홍차를 마시고 비범한 모더니스트 이상이 운영하던 종로경찰서 쪽 제비다방에도 들르고 저녁이 깊어서는 광화문통의 다방에 들어간다.

“다방을 찾는 사람들은, 어인 까닭인지 모두들 구석진 좌석을 좋아하였다. 구보는 하나 남아 있는 가운데 탁자에 가 앉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곳에서 엘만의 ‘발스 센티멘털’을 가장 마음 고요히 들을 수 있었다.”

날 구보 씨는, 정확히 말하여 소설가 박태원은 미샤 엘만의 연주로 ‘발스 센티멘털’을 들었는데, 당대의 예술가들이 열렬히 좋아했던 연주가가 바로 미샤 엘만이다. 소설가 이태준은 「음악과 가정」(<중앙>, 1934년 6월)에서 “B박사가 걸어준 판은 엘만의 바이올린 ‘오리엔탈’인데 나는 그때처럼 잊을 수 없는 음악을 들은 적이 없다”고 썼고, 이른바 ‘엘만 톤’이라고 불리는 지극히 감상적이고 유려한 소리를 싫어했던 이상 또한 도쿄에서 엘만의 공연을 직접 본 후 김기림에 보낸 1937년 2월의 편지에서 “그의 슬라브적인 굵은 선은 그리고 분방한 데포르마시옹(예술가가 대상을 변형시켜 주관적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경탄할 만” 하다고 썼다. 다방을 전전하는 구보 씨의 행로는 일제 강점기의 음악문화, 특히 이식된 서구의 음악(특히 클래식)을 당대의 도시문화 조건에서 변용하고 이로써 자기 시대의 사건과 상처와 비애를 투영하던 경성 한복판의 문화적 풍경을 보여준다.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

‘제국’ 일본을 문화적으로 경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일제 강점기에 앞서 말한 미샤 엘만은 물론이고 프리츠 크라이슬러, 야사 하이페츠, 아돌프 부슈, 파블로 카잘스, 아르투르 슈나벨,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등 당대에 이미 ‘젊은 거장’이었고 지금은 아예 ‘20세기의 전설’이 된 연주자들이 경성부립공회당(현 대한상공회의소). 경성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 경성 외국인구락부(덕수궁 중명전) 등에서 공연을 하였고 경성 한복판의 다방이며 음악 감상실에서 강제적 이식과 주체적인 변용의 클래식 선율이 흘러넘쳤다.

느 음악 장르와 달리 클래식은 그것을 낳은 유럽에서도 일정한 경제적 여유와 기본적인 교양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에서는 아예 ‘교양 엘리트층 양성’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의도적으로 추진된 ‘교양화 프로젝트’의 하나였는데, 식민지 경성에서는 유럽의 ‘교양 문화’와 일제의 ‘교양시민 양성’에 더하여 한없이 쓸쓸한 식민지 엘리트의 비애까지 겹쳐졌다.

『탁류』, 『태평천하』 등으로 필명을 날린 38살의 채만식은 <매일신보> 1940년 3월 14일자 기고에서 자신을 ‘갈 데 없는 ‘세기(世紀)의 쌍놈’’이라고 위악적으로 자처하면서 “손쉽게 그 놈 음악을 알아듣는 묘방이 있거들랑 좀 전수를 시켜주셨으면 싶다”고 썼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채만식 자신이 도쿄 유학생 출신 아닌가. 박태원 또한 다방을 전전하는 구보 씨를 통해 깊은 밤 광화문통 거리에서 “갑자기 부란(腐爛)된 성욕을, 구보는 이 거리 위에서 느낀다”고 썼다. 부란(腐爛)은 썩어 문드러졌다는 뜻이니, 일제 강점기의 클래식 음악 듣기, 즉 부민관의 실황 공연이나 종로나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 축음기 듣기는, ‘그 시절 그 노래’ 식의 흘러간 낭만적 추억이 아니라 ‘부란’에 몸부림치는 일제 강점기 교양 지식인층의 비애이기도 하다.

방 이후, 음악을 감상하는 문화와 공간은 훨씬 더 풍요롭게 전개되었다. 박용찬이 일본 유학 시절부터 수집한 음반과 오디오로 6·25 한국 전쟁 무렵인 1951년에 피난지 대구에서 ‘르네상스’를 개업하였고 이 장소가 1954년에 인사동으로 다시 1960년에 종로1가로 터를 잡아 오랜 세월 동안 클래식 음악 문화의 일상적 공간이자 애호가들의 집합처가 된 것은 유명한 일이다. 1987년에 문을 닫았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르네상스’의 마지막 모습을 몇 번 보았다. ‘르네상스’의 유성기 음반 약 3,000점, LP 음반 약 3,400점, 도서 약 400권, 축음기 등 관련 자료 총 6,800여 점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적 기록으로 보존되고 있다.

출처 향촌문화관

은 시기에 같은 맥락으로, 부산의 ‘에덴’, ‘밀다원’, ‘비원’, ‘망향’ 등이 있었고 대구에는 ‘녹향’이 있었다. 나는 2016년에 대구의 ‘녹향’에 가본 적이 있는데, 1946년에 문을 연 뒤로 대구에서만 열 번씩이나 이사하면서 버텨온 ‘녹향’의 의자와 커피잔과 음반들은 그저 퇴락한 옛 시절의 물건들이 아니었다. 작은 역사였다. 한편, 서울에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명동의 ‘필하모니’, 신촌의 ‘에로이카’와 ‘난다랑’, 대학로의 ‘학림’ 등이 한 시절의 헛헛한 마음을 채웠으며 이러한 음악 감상실 문화의 거의 마지막 장소로 1985년 안국역 사거리에 문을 연 ‘브람스’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평적 관점에서, 이 공간들은 신생 독립국에 전쟁과 분단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 중산층으로 도약하고자 했던 한국의 발전주의적 교양문화의 일면을 담고 있다. 1977년에 개봉한 김호선 감독의 영화 <겨울여자>를 보면, 음악 감상실 ‘나목’에 들어간 남자 주인공(김추련)이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눈을 감고 인상을 쓰면서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듣는데 이 모습을 맞은편에 앉은 여자 주인공(장미희)이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쳐다본다. 이 한 장면은 한국에서 클래식 문화가, 그리고 그것을 듣기 위한 도시 공간의 특정한 장소, 즉 ‘음악 감상실’이 음악 문화 그 자체의 수용과 이해의 측면만이 아니라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 그리고 경제적 발전에 따른 중산층 욕망의 모더니티가 클래식이라는 교양문화의 배타적인 수용과 주관적인 이해로 전개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럼에도 각각의 시절에, 각각의 개인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사연과 감성에 따라 그 무렵의 견딜 수 없는 환멸과 그 무렵의 애착했던 감정을 열망하며 진실로 어느 한순간, 두 눈을 감고 귀로 들려오는 음악과 자기 자신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소리의 황홀한 일체감을 느끼고자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황홀한 순간이 비평적 관점의 해석보다 더 소중한 집합적 기억일 것이다.

정윤수
글 / 정윤수

문화평론가,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1968년생

이력
저서 『클래식 시대를 듣다』 『인공낙원(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23-04-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