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얼음의 근대사


근대 예술의 풍경 : 얼음의 근대사 근대 예술의 풍경 : 얼음의 근대사

“한반도에 제빙공장이 들어선 때는 1913년 4월”

“1920년대 중반, 인조빙(人造氷)이라는
새로운 얼음이 등장”

“평양 냉면집에서는 식중독을 걱정하여
냉면에 식초를 뿌려서 먹도록 권장”

여름 : 대륙적 영향으로 여름날 열도가 상당히 높은 평양에서 더위가 몹시 다툴 때 흰 벌덕 대접에 주먹 같은 얼음덩어리를 숨겨 감추고 서리서리 얽힌 냉면! 얼음에 더위를 물리치고 겨자와 산미에 권태를 떨쳐버리네.

이 글은 1929년 12월 1일에 발간된 잡지 《별건곤》 제24호에 실린 「사계절 명물, 평양냉면(四時名物 平壤冷麵)」 중 여름 편에 나온다.

저자의 필명은 ‘김소저(金昭姐)’이다. 본디 냉면은 한겨울에 평양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지만, 1910년대 초중반부터 여름에 먹는 음식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에 ‘냉면’이란 이름에 걸맞은 차가운 육수를 만드려면 당시나 지금이나 얼음이 필수품이다. 지금이야 집에 있는 전기냉장고의 냉동실에 물을 담은 용기를 그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이 만들어지지만, 1910년대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조선시대 서울을 비롯하여 고위직 관리가 머무는 고을의 으뜸 도시인 도읍에는 ‘석빙고(石氷庫)’라는 얼음 저장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겨울에 강에서 꽁꽁 언 얼음을 캐서 지하에 구성된 석빙고에 보관했다. 지금은 동네 이름으로 알려진 서울의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얼음을 저장해둔 창고의 이름이었다. 동빙고의 얼음은 음력 3월부터 9월 사이에 왕실의 제사에 올리는 음식을 차갑게 하는 데 쓰였다.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의 구성원과 활인서(活人署)의 병자에게 제공되었다. 하지만 두 곳의 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음력 6월 즈음이면 대부분 녹아 없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제빙기술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한반도에 근대적인 제빙공장이 들어선 때는 1913년 4월이다. 이 제빙공장은 경부선 기차 안에서 한여름에 시원한 음료를 제공하기 위해 지금의 서울 용산 제1철로 근처에 들어섰다. 한겨울에 한강에서 얼음을 캐내서 그것을 소량의 암모니아로 녹지 않게 하는 공장이 당시의 제빙공장이다.
1910년대 중후반 서울과 평양 등지에 들어선 제빙공장의 이름은 ‘천연빙주식회사(天然氷株式會社)’였다. ‘천연빙’은 한겨울에 강에서 캐낸 얼음을 한여름까지 저장소에 보관해 둔 것이다. 매년 3월 초순이면 겨울에 강에서 캐낸 얼음의 양이 얼마인가를 두고 신문에는 뉴스로 알리기도 했다. 가령 매일신보 1926년 3월 15일자 2면에는 “금년은 얼음 풍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한겨울에 강에서 캐낸 천연빙과 함께 인공으로 만든 인조빙(人造氷)이라는 새로운 얼음이 등장했다. 인조빙은 압축한 액체 암모니아의 증발열을 이용하여 만든 얼음이다. 1880년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기를 차단한 상태에서 400 ~ 600℃의 온도에서 석탄을 태워 고체가 분리되면서 생겨난 암모니아를 얻었다. 1913년 이후 암모니아 생산은 공업적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이 기술은 일본을 통해서 한반도에 들어왔다. 값싼 암모니아를 활용한 인조빙 공장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다. 조선인이 운영한 천연빙은 인조빙과 경쟁하면서 한여름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 사진 1. 깨끗한 물을 붓고 암모니아 압축간을 통과시켜
    얼음을 만드는 과정(조선일보, 1926.08.23.)

빙삭기 특허, 1887년 일본

한여름에도 얼음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식민지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빙수점(氷水店)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빙수는 본래 일본에서 만들어진 음료다. 1890년대 일본의 대도시에는 여름이면 거리 곳곳에 빙수점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당시 빙수점에는 얼음을 눈처럼 분쇄하는 철제 빙삭기(氷削機)를 갖추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람이 직접 얼음을 깨서 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하얀 보자기에 넣고 잘게 부수어 빙수를 만들었다.
철제 빙삭기는 1887년경 일본에서 발명 특허를 얻었지만, 1900년대 후반에 상용화되었다. 조선에서 일확천금을 노렸던 일본 상인들은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철제 빙삭기를 수입했다. 조선 거주 일본인을 위한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朝鮮新聞)의 1929년 4월 29일자 6면 광고란에는 일본 제품 빙삭기 광고가 두 개나 실렸다. 이 광고에는 빙삭기 사진이 실렸는데, 1980년대까지 한국의 빙수점에서 사용했던 빙삭기와 그 모양이 유사하다.

  • 사진 2. 일본 제품 빙삭기 광고(조선신문, 1929.04.29.)

1929년 8월 1일자 잡지 《별건곤》 제22호에는 철제 빙삭기로 갈아내는 빙수집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글이 실려 있다.

“찬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얼음덩이를 물 젖은 행주에 싸 (중략) (빙삭기에서 얼음이) 써억 써억 소리를 내면서 눈발 같은 얼음이 흩어져 날리는 것 (중략) 눈이 부시게 하얀 얼음 위에 유리같이 맑게 붉은 딸기물이 국물을 지을 것처럼 젖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글의 저자는

“빙수에는 바나나 물이나 오렌지 물을 쳐(서) 먹는 이가 있지만은 얼음 맛을 정말 고맙게 해주는 것은 새빨간 딸기물이다.”라고 덧붙였다.

그즈음 철제 빙삭기 위에 오른 얼음은 천연빙도 있었고, 인조빙도 있었다.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방정환(方定煥, 1899 ~ 1931)은 “여름에 빙수점에서 파는 빙수 같은 것은 보통 오십 그릇은 범〔호랑이〕본 사람의 창(窓) 구멍 감추듯” 즐겨 먹었다. 비록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였지만, 음식의 취향은 그런 정치적 사정을 구분하지 않았다.
빙수 다음으로 얼음이 제공해 준 새로운 식품은 아이스크림이었다. 1920년대 한여름의 서울에는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사람을 공원이나 한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장수는 미국인 낸시 존슨(Nancy Maria Donaldson Johnson, 1794 ~ 1890)이 1843년 9월 9일 미국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은 ‘인공 냉동고(artificial freezer)’라는 기계를 사용해서 즉석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었다.

  • 사진 3. 낸시 존슨의 '인동 냉동고'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1930년 6월 8일자 매일신보 2면에는 ‘여름의 여왕, 애인의 키스보다 한층 더 그리운 여름 하늘 더운 날, 아이스크림 맛’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의 저자는

“혀끝에 녹아 혀끝을 녹이는 맛이 애인의 ‘키쓰’도 비할 바이 못된다”고 너스레를 피웠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던 음식인 아이스크림을 1930년대 서울 사람들은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이 모두 ‘아이스크림 제조기+인조빙+밀크’의 결합에서 나온 결과였다.

  • 사진 4. 아이스크림 장수(조선일보, 1934.06.23.)

식민지기는 물론이고 지금도 얼음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냉장용이나 의료용 따위에 쓰이는 것으로 나뉜다. 1930년대 한여름이면 대도시에서 얼음의 수요가 엄청났다. 부유층 가정에서는 나무로 만든 냉장고에 얼음을 넣어서 음식을 보관했다.
병원에서도 얼음 수요가 적지 않았다. 당연히 빙수나 아이스크림, 냉면이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음식점에서의 얼음 수요가 매우 많았다. 그러자 마실 수 없는 물로 인조빙을 만드는 나쁜 얼음제조업자들이 생겨났다. 조선총독부의 단속이 있었지만, 이런 혼란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평양 냉면집에서는 한여름에 콜레라나 식중독을 걱정하여 냉면에 식초를 뿌려서 먹도록 권장했다.

이런 얼음의 시대는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도시의 중상층 가정집에서는 발포성 수지인 스티로폼으로 만든 ‘아이스박스’에 한여름 김치와 반찬, 그리고 과일·음료 따위를 저온 저장했다. 아이스박스가 진정한 아이스박스가 되기 위해서는 얼음이 필수품이었다. 동네 골목마다 ‘어름’이라는 간판을 붙인 가게가 있었다. 매일 30원이나 60원어치 한 덩어리 얼음을 사와서 아이스박스에 넣어두면 차가운 음료를 먹을 수 있었다. 전기냉장고가 가정의 필수품이 된 1980년대 초반부터 동네 골목마다 있었던 ‘어름’가게도 사라졌다.

주영하
글 / 주영하

음식인문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962년생

저서
『그림으로 맛보는 조선음식사』 『음식을 공부합니다』 『백년식사』 『조선의 미식가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장수한 영조의 식생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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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2-2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