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수원 기생 김향화

조선시대 기생 화보집 『조선미인보감』 금 내 앞에는 1918년 간행된 『조선미인보감』이 있다.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조선팔도 권번 소속의 미인 기녀들 사진과 기예, 이력을 수집하여 그 정보를 언문과 한문으로 저술한 책”이라고 하였다. 고급스런 종이에 인쇄하고 양장본으로 만들었다. 누가 이런 책을 구해서 읽었을까? 독자가 누구였을까? 이 책은 기생조합에 비치해두고, 고객에게 마음에 드는 기녀를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화보집이었던 것이다.

선시대 공연예술을 담당하던 이들이 바로 기생이었다. 말을 이해하는, 즉 한문을 이해하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리던 기생은 조선의 신분제 안에서 천민에 속했다. 기생은 관노청 아래 교방청 혹은 기생청에 소속된 관노비로서, 국가행사나 지방관아의 행사에 예술과 재능을 보여주는 예인으로 활동하였다. 교방청에서는 기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을 따로 두어, 여러 해 동안 철저하게 가무악을 가르쳤다. 게다가 예의범절이나 시서화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도 받아서 기생 스스로도 스스로의 품격을 높여갔다. 한양에서 벌어지는 큰 행사를 위하여 지방의 관기들까지 동원되는 일도 많았다. 지방의 관기로서 한양에 공연목적으로 올라오는 이들을 특별히 선상기(選上妓)라고 불렀다.

생들의 일반관리는 호방(戶房)에서 하였고, 급여나 수당 등은 예방(禮房)에서 관리하였다. 교방(敎坊)에는 가무악 등 공연을 담당하는 기생 외에도, 기생들이 가무를 펼칠 때 동반하는 악기 연주자들인 악공도 소속되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고, 1897년부터 궁중과 지방 관아에 속해 있던 관기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기생들은 자생적으로 ‘기생조합’을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런데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총독부에서는 기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기생단속령’을 제정하여 기생들을 통제하였다. 기생들은 기생조합에서 관리되다가 권번(券番)으로 이양되었다. 권번에 속해야 기생이 될 수 있었다. 권번에서는 기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양성소를 두었을 뿐 아니라, 기생들의 공연활동과 요정활동을 지휘·감독했다. 권번은 철저하게 일본의 예인(게이샤[芸者])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기관이었는데, 이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기생 양성 및 관리기구가 된 것이다. 권번 입학은 8살부터 20살 여성으로 제한됐고, 시와 노래, 가무(歌舞), 악기연주, 예의(禮儀)를 교육받고, 졸업시험에 통과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발급받아 기생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일제는 기생 이미지를 식민지 조선여성의 상징으로 이용하였다. 기생을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적 대상물로 각인 시켜갔다. 기생의 이미지는 사진엽서와 사진첩 등 각종 인쇄물로 제작되어 조선의 문화상품 또는 성 상품으로 팔려 나갔는데, 『조선미인보감』의 출간 배경도 여기에 해당된다.

조선미인보감 속 김향화

시 『조선미인보감』의 내용 가운데 한 인물을 골라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자 속에 일제강점기 조선의 내로라하는 기생 611명의 프로필이 수록되어 있다. 수원 기생 김향화를 주목해보자.

부분에는 원적(原籍), 현주소, 이름, 나이, 사진, 기예(技藝)를 나타내고 있고, 아랫부분에는 한문으로 된 가곡창과, 한글로 된 창가로 해당 기생을 율격을 붙여서 소개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군 수원조합에 소속된 22세 기녀 ‘金김杏향花화’에 대한 얼굴 사진과 정보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을 한자로는 金杏花라고 쓰고, 한글 이름은 ‘김향화’라고 부르고 있다. 본명은 ‘김행화(金杏花)’이면서, 김향화로 읽고 부르는 게 편해서 이렇게 같은 사람을 두 이름으로 쓰고 부르고 있다. 행화(杏花)는 은행꽃이다. 공자가 설법하던 은행나무 강단인 행단(杏檀)과 연결되어, 지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예명의 기생이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그녀 이름을 우리말 이름 ‘김향화’로 통일하여 부르기로 한다. 그녀는 경성 출신으로 현재 수원기생조합 소속이다. 춤으로는 검무·승무·정재무를 장기로 삼고, 노래로는 가사와 시조, 잡가·서도소리, 그리고 양금 연주를 잘한다고 되어 있다. 김향화를 소개하는 페이지의 아랫단에서는 오른편에는 한문 가곡(歌曲) 스타일로, 왼쪽은 언문 창가(唱歌) 스타일로 그녀를 찬양하고 있다. 언문 노래를 보면, 향화가 본디 경성에서 성장했고, 열다섯에 기생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성질이 순한 김향화를 수원기생조합에 와서 만나보자고 권유하고 있다.

“가자가자 구경가자 수원산천 구경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기생조합 이름 좋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곳 꽃이 되았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우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 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둥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아주 구체적으로 김향화를 그려내고 있다. 가무악에 능하며, 갸름한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다고 말한다. 목소리는 탁성이지만 애원성으로 슬픈 소리를 잘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김향화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소중한 인물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자료를 조금 더 찾아서, 다른 얼굴의 김향화를 만나보자.

기녀들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주동자

원권번 소속 김향화는 본명이 김순이다. 그녀는 1897년 경성에서 아버지 김인영, 어머니 홍금봉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수원군 북수리 48번지에 사는 정도성에게 재취로 들어가 시집살이를 심하게 했다. 남편과 갈등을 겪다가 18살에 이혼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원 권번 기생이 되었다. 기예가 특출 나고 맵시가 좋은 김향화는 그래서 『조선미인보감』에 수원조합의 대표기생으로 소개되었다.

러나 기녀로서의 삶을 살던 김향화에게 운명은 다른 길을 알려주게 된다. 김향화가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임금의 승하 소식이 전해져왔다. 전국적으로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김향화도 수원조합 기생들을 이끌고, 대한문 앞으로 와서 소복 차림으로 망곡례(望哭禮)를 했다. 이를 계기로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운동비사를 살펴보면 수원조합 기생들이 자혜의원과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관련 사실이 기록돼 있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 기생 33명은 1919년 3월 29일,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 종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기습적으로 벌였다.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김향화는 2개월 간 고문을 받다가,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5월 2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을 그 날짜 매일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원 기생 김향화는 태극기를 들고 여러 기생을 데리고 경찰서 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후 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졌다.
북촌검사의 심리를 받고 지난달 이십칠일 공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팔 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김향화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언도하였는데 방청석에 사람이 가득하였더라.”

* 사진: 필자 제공

유영대
글 / 유영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56년생

저서
『동편제 명창 송만갑의 예술세계』 『심청전연구』, 편저서 『판소리 동편제 연구』(공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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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9-2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