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화제작

재난과 재난 사이, 죽음과 애도 사이를 살아간다는 것

재난 3부작에서의 애도작업 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읽는다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사이의 시간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를 극복하고 다시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무력감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항상 재난과 재난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죽음에 대한 책임과 애도에의 요청을 숙제처럼 짊어지며 산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니메이션 시장에서 신카이 마코토에 대한 일본 안팎의 평가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잇는 일본의 대표주자라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스즈메의 문단속』을 포함해 재난 3부작으로 불리는 소설들은 모두 애니메이션으로 개봉되었다. 이들 작품은 일본에서 ‘트리플 천만 관객’으로 엄청난 조명을 받았다. 그래서 요즘은 신카이 마코토가 1인 제작 형태로 개성 강한 독립 애니메이션을 연출해왔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애니메이션 연출가이기 전에 빼어난 소설가, 각본가라는 사실이다.

의 초창기 소설과 애니메이션은 사적이고 내밀한 소년, 소녀의 감정과 기억을 다룬다. 대부분의 작품이 시공간적으로 구별되는 세계를 살아온 남녀가 서로를 향해 접근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정교한 플롯이나 사건 사이의 개연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장악한 감정과 그것이 나고 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힘을 쏟는다. 그런데 최근작들은 인물의 배경으로 밀려나 흐릿하게 처리되었던 사회와 집단의 풍경을 전경으로 불러내고 있다. 특히 재난 3부작에 이르면, 자연재해와 사회적 참사를 경험하고 난 이후의 사람들을 세심하게 묘사해낸다.

해 큰 반향을 일으킨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과 재해에 대한 사회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이 만나는 자리를 포착한다. 이를테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실재했던 재난·재해에 대한 기억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보존되는지, 시간이 사건과 의미를 어떻게 규제하고 맥락화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재난·재해의 현장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당사자들의 애도 작업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지만, 대개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환상문학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이중구속의 애도작업을 초현실적 사건을 통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 글은 스즈메의 특별한 애도작업에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동참하게 된 이유를 찾아볼 것이다.

소설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장치 세 가지 저 『스즈메의 문단속』은 극적인 긴장을 낳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지난 세기말 일본 서브컬처계에 하나의 경향으로 등장했던 ‘세카이계(セカイ系)’ 장르를 낭만적으로 소환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작가를 꿈꾸며 성장하던 시절, 세카이계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세카이계 서사란, 영문도 모른 채 세계의 종말, 사회의 운명을 짊어진 ‘나’를 다룬다. 나의 문제가 곧 세계의 운명과 연결되는 과정의 논리는 중요치 않다. 극적이고 격렬한 ‘나’의 내적·외적 분투가 공동체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설득된다면, 그것 만으로 세카이계 서사의 묘미를 맛보게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비약적인 사건 진행이 여러 군데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섬세한 내면 묘사, 사건과 상황에 대한 공감을 요청하는 서술이 압권이다. 이는 세카이계 서사의 장르적 특징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전략적 선택의 일환이다. 무엇보다 집단적 죽음에 대한 사회적 애도를 진행하는 여정에서 거대한 상처로 남은 자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스즈메를 지켜보는 건 인상적인 체험이다.

째, 『스즈메의 문단속』은 모험서사와 성장서사가 효과적으로 착종된 보편적이고 동화적인 판타지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살아남은 이야기들은 대개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하는 영웅적 모험이나 세계에 대한 주체적 시선을 정립해가는 과정, 곧 내적 성장을 다룬다. 그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모험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거나 성장을 위한 모험의 여정을 감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카이 마코토의 소설 상당수에 집을 떠난 10대 소녀가 주인공으로 설정된 이유는 그와 관련된다. 그의 소설 원작 애니메이션 중 여러 편을 ‘로드 무비’ 장르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험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 장소에 각별한 의미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마치면 소녀는 서사 초반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서 엄마를 잃고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살아온 10대 소녀다. 그녀는 가업처럼 초월적인 문단속 작업을 해온 소토를 만나 일본 전역을 횡단하는 모험에 동참하게 된다. 스즈메가 행하는 문단속은 공적 애도에의 요청이면서, 불가능한 사적 애도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도전일 수 있다.

째, 애니메이션의 서사적 틈새를 보완하는 소설 속 내밀한 문장들의 힘에 주목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카이 마코토는 미야자키 하야오, 또는 지브리 스튜디오로 대표되어 온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돌파해가고 있는 작가다. 잘 알려진 대로 디즈니 스튜디오를 위시한 미국 대형 스튜디오 작품들은 3D 애니메이션 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는 전통적인 2D 애니메이션을 고수하면서 ‘저패니메이션’, ‘아니메’에 대한 일정한 팬덤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지브리스튜디오 작품들에 한정해 보면, 이미지텔링 면에서 기술력의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스토리텔링 면에서도 동어반복이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런 상황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3D 모델링에 2D 텍스처를 결합해 2D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한계를 돌파해왔다. 인물의 감정이 확장된 세계를 서정적이고 판타지한 풍경으로 전환해내는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10대 소녀의 개인사를 다루는 듯하지만, 일본인이 최근 경험한 재난과 재해에 대한 집단 기억의 문제를 소환하면서 키치적인 판타지 작가라는 편견을 넘어서고 있다. 그의 소설은 ‘보여주기’를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애니메이션이 ‘말할 수 없었던 것’, ‘말했으나 불충분했던 것’을 언어로 보완·확장하는 기능을 한다. 그 때문에 그의 소설과 애니메이션은 서로의 틈새를 보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을 먼저 읽은 이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상상한 이미지들을 적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먼저 본 이들은 주요 인물의 내면을 다녀간 감정과 의식을 더 소상히 파악해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초월적 위로

설 말미, 어린 시절 자기 자신을 만난 스즈메는 “있잖아, 스즈메. 너는 앞으로 누군가를 아주 좋아하게 되고, 너를 아주 좋아하는 누군가와 많이 만날 거야. 지금은 캄캄하기만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아침이 와”라고 말한다.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고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며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중략)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스즈메를 방해할 수 없어 1) 라고 조언한다. 갑자기 사라진 엄마의 공백으로부터 리비도를 전환하지 못하고 상처받아온 자신에 대한 초월적 위로가 거기 있다. 이 장면은 병리적인 자기 환상을 강화하며 엄마의 죽음을 상징화 하지 못했던 세월과의 화해가 담겨 있다.

카이 마코토의 소설과 애니메이션이 최근 비슷한 설정, 중복되는 주제, 유사한 플롯에 함몰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큰 폭의 변신을 의도적으로 즐기는 야심이 없다는 게 흠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시대의 요청을 경청하면서, 그가 작가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유연하게 해낼 수 있길 바란다.

1)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 민경욱 옮김, 대원씨아이, 2023, 333쪽.

안숭범
글 / 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시인, 1979년생

이력
저서 시집 『소문과 빌런의 밤』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영화평론집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 『SF, 포스트휴먼, 오토피아』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23-09-2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