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문제 제기
혹시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남용하거나 오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존재 사이의 얽힘과 감응, 달라지는 선택들과 그로 인한 실존적 변화를 고작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일축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구의 증명』은 우리가 빈번히 호명하는 ‘사랑’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사랑이라는 말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가? ‘나’의 욕망, ‘너’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우리’의 함께 있음… 물론, 구와 담의 관계에 가장 근접하는 지상의 단어는 분명 사랑이지만 결코 사랑만은 아니기에 이러한 명명은 불충분하다. 둘의 관계는 그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아득함을 초과한다. 그들의 사랑은 인간의 존재 증명을 마련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힘이다. 사랑이면서도 사랑만은 아닌 이것은 사랑이라는 흔한 이름이 완성되기 바로 그 이전의 토대와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의 자격 요건을 심문한다. 『구의 증명』은 사랑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너머의 영역을 탐문한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의 인간됨을 ‘네’가 확인하고 증명해주는 절차가 필요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말이다.
페이지를 넘기며 탄식을 거듭한다. “이것이 과연 삶이란 말인가?” 삶은 불공평하다. 이는 너무나 익숙한 문장이지만 구의 삶을 목도한 이는 이것이야 말로 삶이라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구(●)와 담(○)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삶이 불공평하다는 문장을 발설할 수 있다는 것조차 특권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수신한다. 그러나 그들의 불행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삶 그 자체이며 생을 점철한 그러한 극단의 부조리는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안온한 탈출구조차 마련해주지 않는다.
인간됨의 증명
담이 구의 몸을 괴롭게 뜯어 먹으며 그의 장례를 치러야만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테다. 담의 입 속으로 사라진 구의 몸은 그를 사망자가 아닌 실종자로 만들 테고, 담을 제외한 그 누구도 구의 죽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구의 살과 내장을 먹는 담은 그의 죽음을 배타적으로 소유한다. 인간의 몸이 다른 인간의 몸을 제 내부로 섭취함으로써 그가 인간이었노라고 악착같이 증명해내는 과정이다. 구가 살아낸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담과 함께일 때와 진주 누나의 방에서 살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쫓기는 자의 것이었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존엄한 인간임을 다름 아닌 제 자신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던 생존의 시간이었다. 그의 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결국 실패했고 담이 그의 뼈와 살을 발라 입 안으로 넣을 때에야 겨우 한 인간이 되었다. 담이 먹은 것이 인간의 몸이 아니라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막다른 순간에 다다라서야 그의 인간됨은 비로소 증명된다. 문명화된 인간 사회가 최악의 야만으로 간주하는 식인을 통해 한 인간의 인간성이 가까스로 입증된다.
어른들과 사채업자, 빚, 공장, 그리고 학교마저도 그들에게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며 이 세계는 폭력적이라는 서술 이전에 이미 폭력 그 자체다. 어린 연인들에게 그러한 무뢰한들이 침입하도록 허하는 것은 바로 돈과 가난이다. 돈에 관한 문제는 늘 자본주의라는 거대 구조의 힘으로 소급되며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 주체의 모습은 투명해진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인간적’인 것은 돈이다. 인간의 거의 모든 활동은 이해관계를 기준 삼아 선택적으로 실행된다. 세계는 개인의 ‘좋음’을 최대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기를 권하고 윤리와 공동체의 덕목은 그것의 실천을 합리화하는 마지노선으로 재정의된다. 구와 담의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두 사람의 비극을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하는 잔인한 진실이라고 납득해 버릴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현실이 자행하는 그러한 폭력에 대하여 반기를 들 것인지 말이다.
사랑, 그 이상의 이름
구에게 담은 연인 또는 사랑 그 이상의 이름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각자의 인간됨을 증명해주는 유일무이한 배타적 존재자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두고 사랑이라 명명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의 인간됨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여 되는 자질이 맞지만, 그리고 실제로 사랑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켜내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를 끝내 사랑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아는 사랑에 대입할 수 없는 초과분의 값이다. 사랑이 이런 방식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어선 안 된다. 그러니 슬프다거나 처절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은 버리도록 하자. 대신, 두 개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을 남겨두자. 지금 이 세상에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이냐는 소설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사랑에 관한 말은 그 후에라야 겨우 가능할 테다.
1) 최진영, 『구의 증명』 (리커버판), 은행나무, 2023, 160쪽.
평론가, 1990년생
이력
평론 「통증과 회복의 인간학─양자역학으로 읽는 한강」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보아라─레즈비언 퀴어를 세속화하는 ‘장치’에 관하여」
「포르셰를 모는 레즈비언과 윤석열을 지지하는 게이에 관하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