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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길라잡이

왕가(王家)의 공간, 창덕궁

시즌2 역사탐방 길라잡이 16편 왕가(王家)의 공간,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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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코스

돈화문 → 규장각 → 선원전 → 인정전 → 낙선재 → 후원
예상소요 시간 : 2시간
창덕궁은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하라’는 뜻을 가진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정치적 공간으로서 해석되는 궁궐이 아니라 왕가의 삶이 담겨있는 공간으로서 궁을 바라보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가을, 아이와 함께 창덕궁을 둘러보며 창덕궁 곳곳에 담긴 왕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탐방길라잡이

창덕궁을 방문하게 된 은하는 평소보다 더욱 설레어 보였다. 창덕궁을 창건한 태종의 젊은 시절을 다룬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열심히 시청중인 탓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드라마의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TV에 화려한 궁궐의 모습이 나오거나 예쁘게 차려입은 왕비나 공주가 출연하면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은하는 어린아이답게 왕은 궁궐 안에서 무슨 놀이를 하면서 여가시간을 보냈는지, 잠은 어디서 잤는지, 화장실은 어떻게 다니는지 궁금해 했다.
창덕궁으로 가는 길, 은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궁궐은 정치의 공간만이 아니라,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그들의 '집'이기도 했다. 특히 왕에게는 개인적인 사색과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찾은 창덕궁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예전엔 그냥 오래된 유적지로 여겨졌던 화려한 기와지붕과 수많은 전각들, 담벼락 하나하나에 그 시절 왕들이 느꼈을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배어 있는 듯 했다.

창덕궁, 이야기 속으로

창덕궁의 탄생 참고 : 문화콘텐츠닷컴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창덕궁 편 / 이항우 글, 그림 / 인문산책
창덕궁은 조선의 3대 왕이었던 태종의 명에 따라 지어진 궁궐이다. 당시 한양에는 이미 본궁(本宮)의 역할을 하는 경복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은 왕이 잠시 머물다 가는 거처인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태종 이래,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왕들이 창덕궁에서 나라를 경영했고, 이곳을 왕가(王家)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태종은 왜 지은 지 얼마 안 된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이라는 또 다른 궁을 만든 것일까?
또 다른 궁을 만든 것일까?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아들 태종 간의 불화가 원인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궐 앞에 서 있는 왕 그림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정실부인인 한씨와의 사이에서 방우, 방과, 방원(훗날 태종) 등 6형제를 두었고, 첩실인 강씨와의 사이에서 방번과 방석 형제를 얻었다. 6형제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강씨의 자식들을 더 총애했다. 급기야 강씨 소생인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자, 방원을 비롯한 6형제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결국 6형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방번과 방석 형제를 살해했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나라의 실권을 거머쥔 이방원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형이자 태조의 둘째 아들인 방과를 세자로 책봉토록 했는데, 이 사람이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다.
정종의 뒤를 이을 세자의 자리를 놓고 친형제들과 또 한 번 권력다툼을 벌인 끝에 조정을 장악한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왕에 등극했다. 이에 분노한 태조는 함흥에 은둔하며 아들을 보려 하지 않았다. 태종은 차사들을 보내 아버지의 마음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태조는 오랫동안 함흥에 머물렀다.

태종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조선의 수도는 한양에서 개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는 한편, 창덕궁을 지어 그곳에서 정사를 돌봤다. 후세의 사람들은 경복궁이 태조와 정도전이 합심해 만든 궁궐인 만큼, 태종 입장에서는 머물기 불편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창덕궁 탐방하기

1. 돈화문 - 왕이 백성을 향하는 공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서부터 오늘의 탐방을 시작했다. 창덕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기도 한 돈화문은 도심 한복판,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은하는 차들이 바쁘게 오고가는 도로변에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돈화문 사진
미션
아빠와 함께 인증샷 찰칵!왕의 공간을 방문한 기념으로 돈화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태종12년(1412)에 창건된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답게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중국에서 온 사신이 궁에 방문할 때도 이 문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돈화문을 통과하자 넓은 길 주변으로 우거진 나무들과 고풍스런 전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덕궁은 이른 시간임에도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은하는 돈화문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했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것으로, 큰 덕으로 백성들을 가르쳐 감화시킨다는 뜻을 갖고 있다.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닦은 태종의 통치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작명이다.
백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돈화문
<백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돈화문>

돈화문은 백성들을 가르쳐 감화시킨다는 뜻에 걸맞게, 백성들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과거시험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돈화문에 과거 합격자를 알리는 방이 내걸렸다고 전해진다. 방을 게시하고 과거 합격자에게 꽃을 하사하는 장면은 한양 사람들의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조선 초기에 방을 거는 행사는 주로 경복궁 광화문에서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하면서 돈화문에서 행사가 거행되었다.

돈화문 상층 누각에는 종이 매달려 있어, 한양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역할도 했다. 여기서 종소리가 울리면, 운종가(과거 한양에 있었던 대표적인 상점가)에서 다시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곤 했던 것이다.

돈화문 안쪽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사정을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도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 신문고는 유명무실해졌으나 북을 치는 사람들은 계속 이어졌다. 군사들로 하여금 신문고 앞을 지키도록 했지만, 이들을 뚫고 북을 치는 사람도 있어 처벌을 받곤 했다고 한다. 정조 7년(1783년) 6월에는 한 사람이 북을 치러 돈화문 앞까지 들어왔다가 파수꾼에게 붙잡혔는데, 정조가 처벌하지 말도록 명했다고 한다.

우리 궁을 아는 사전, 창덕궁 후원 창경궁 / 역사건축기술연구소 / 돌배개
2. 규장각 - 정조의 개혁을 지탱한 공간
돈화문을 지나 오른편을 보니 좁은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보였다. 창덕궁 내부를 흐르는 금천(禁川)을 건너도록 만들어진 금천교로, 현존하는 서울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관람객들은 금천교를 통해 인정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우리는 그대로 직진해 내문(內問)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작은 문을 통과했다. 은하의 손을 잡고 전각 사이로 이어진 골목을 누비다 보니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 한 채와 마주쳤다. 조선의 22대 왕이었던 정조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 규장각(奎章閣)이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창설한 왕실도서관이자,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 해 줄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규장각
정조는 국왕은 국왕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백성은 백성다운 조화로운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조정은 신하들의 당파싸움으로 조용할 날이 없고,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수탈에 고통 받는 탓에 왕과 신하, 백성이 서로 불화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정조는 당파와 무관하게 자신의 개혁정치를 이해하고 뒷받침 해 줄 뛰어난 인재들이 필요했고, 규장각을 통해 자신이 직접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노력했다. 정조에게 창덕궁은 단순히 왕가가 머무는 집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교두보였던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
정조는 즉위한 해인 1776년 3월에 궐내에 규장각을 창설할 것을 명했다. 명목상 규장각은 선왕들이 즐겨 읽던 책과 어필(왕이 직접 쓴 글씨), 어제(왕이 직접 창작한 문서) 등을 봉안하기 위한 전각이었다. 일종의 왕실도서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조는 규장각을 점차 학술과 정책의 연구기관이자, 자신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 줄 인재를 양성하는 공간으로 변화시켜나갔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또한 규장각이 키워낸 인재 중 하나였다. 정조는 치열한 당파싸움이 벌어지는 조정에서, 소속과 관계없이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규장각을 활용했다. 규장각에서 자신이 직접 신입 관료들을 가르쳐 자신의 정치에 적합한 인재로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10회에 걸쳐 138명의 초계문신을 직접 선발하였고 이들 중 반 이상이 정3품 당상관인 승지 이상의 고위관직에 진출하였다. 바로 이 시기, 정약용은 28세 때인 정조12년(1789) 3월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정조는 일찍이 정약용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과거에 합격한 해에 초계문신에 임명했다. 정약용은 규장각에서 내준 과제에서 여러 차례 장원을 차지하며 기대에 부흥했다. 그는 ‘문체책(文體策)"에서 패관잡설(稗官雜說)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혁을 요구하고 "인재책(人才策)"에서는 신분과 지방색에 따른 인재등용의 제한을 비판하며 인재 사용에서 전문성과 자질의 중시를 요구하는 등 혁신적 정책을 제시했다.

만약에 정조와 정약용이 서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정조 재위기간의 눈부신 업적은 존재하지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 실학의 부흥과 문화적 성과의 싹을 틔운 요람이었던 것이다.

원문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3. 선원전 - 지나간 왕들을 기억하는 공간
규장각을 지나 다시 복잡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옛 건물들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영화 속에 나오는 미로를 연상케 했다. 한참 골목을 헤매다 울창하게 솟아 난 뽕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건물 2, 3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크기라 절로 입이 벌어졌다. 나무 뒤에는 소박한 규모의 전각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임금들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던 공간인 선원전(璿源殿)이었다.
선원전 사진
미션
어진 그려주기종이와 펜을 준비하여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자. 왕의 어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포인트!
어진은 단순한 임금의 초상화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고, 어진의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는 전 과정에 신하들이 개입하여 함께 논의하며 공을 들였다.
4. 인정전 - 중요한 왕실 행사의 공간
궐내각사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금천교를 건넜다. 돈화문만큼이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진선문(進善門)을 지나자, 행랑이라 불리는 1층짜리 건물들로 에워싸인 외행랑 마당이 펼쳐졌다. 마당을 가로질러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될 때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인정문(仁政門)을 통과하니 넓은 규모의 안마당이 펼쳐졌다. 그 한복판에는 작은 성을 연상케 하는 2층짜리 전각이 서 있었다. 창덕궁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이라 일컬어지는 인정전(仁政殿)이었다.
인정전 사진
미션
손오공 찾기!인정전 지붕 위 각색의 조각상들 중 손오공, 저팔계 등 서유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찾아보자!
인정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전각으로 왕실의 대소사가 치러지던 공간이다. 임금의 즉위식은 물론이고 정월 초하루와 동시, 임금의 생일날에는 이곳에 문무백관들이 모여 하례를 올렸다. 왕비와 왕세자, 왕세자빈의 책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중국의 사신들이 전하는 황제의 칙서나 조서 또한 인정전에서 전달되었다. 인정전 내부에는 임금이 앉았던 용상과 천정에 매달린 화려한 등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인정전 내부는 조선의 전통양식과 커튼을 비롯한 서양식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정전은 조선의 27대 왕이었던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5. 낙선재 - 헌종의 낭만이 담긴 공간
인정전을 빠져나와 창덕궁의 서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전각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을 벗어나니, 양 옆으로 나무들이 우거진 넓은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길 아래에는 사대부들이 살았을 법한 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담한 돌담과 빛바랜 기왓장이 집이 견뎌온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했다. 이 집의 이름은 낙선재(樂善齋)로 원래는 세자를 위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낙선재
이 고택에 낙선재라는 이름을 지어 준 이는 조선의 24대 임금이었던 헌종이다. 헌종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순(舜)임금이 선(善)한 것을 보고 기뻐했다는 고사에서 착안하여 건물에 낙선재, 즉 선을 즐거워 한다는 이름을 지었다. 헌종은 자신이 사랑했던 경빈 김씨를 위해 낙선재 안의 석복헌(錫福軒)이라는 건물 한 채를 내주었다.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경빈 김씨와 왕세자를 얻어 사랑의 결실을 이루고자 했던 헌종의 마음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
헌종은 선왕이었던 순조가 사망한 후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헌종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순원왕후는 순조 집권기에 풍양 조씨와 함께 나라의 권력을 양분했던 안동 김씨 세력의 자제였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즉위한지 10년 째 되던 해, 남양 홍씨 가문의 자제인 명헌왕후를 왕비에 책봉했다. 그러나 혼인한 지 2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어 근심만 깊어졌다. 순원왕후 는 자신의 친정 안동김씨 일문에서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보게 하였는데, 이 사람이 순화궁(順和宮) 경빈 김씨다. 그러나 결국 경빈 김씨도 후사를 보지 못했다.
경빈 김씨는 헌종 13년(1847) 10월에 입궁하여 2년 후 헌종15년(1849) 6월 헌종이 승하할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창덕궁에 머물렀다. 그러나 헌종은 김씨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헌종은 김씨가 궁궐 안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낙선재 안의 석복헌이라는 건물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헌종이 왕비의 침소가 있는 대조전에는 들지 않고 아예 낙선재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경빈 김씨가 지니고 다녔다는 ‘순화궁접초’라는 책은 조선시대 비빈들의 복식규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그 내용을 보면 경빈 김씨가 사실상 비빈과 차등이 없는 호화롭고 고귀한 옷차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헌종이 경빈 김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빈 김씨는 헌종이 승하한 후 궁에서 나와 현재의 안국동 근처에서 살다가, 광무11년 (1907) 6월에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고종은 김씨가 서거하자 그녀를 향했던 헌종의 지극한 사랑을 생각하여 순화궁의 장례에 극진한 예우를 했다.

원문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6. 후원 - 왕의 휴식과 사색의 공간
후원은 창덕궁에서 가장 인기 있으면서도 신비로운 장소로 유명하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정해진 관람시간에 문화해설사의 인솔 하에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의 안내와 함께 후원으로 들어섰다. 전각이 많은 창덕궁 궐내 풍경과 달리, 후원은 나무들이 짙게 우거진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게 뻗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자 연꽃이 무성하게 피어난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 산등성이를 따라 지어진 전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으로 손꼽히는 부용지(芙蓉池)였다.
6. 후원 - 왕의 휴식과 사색의 공간 사진-1
조선의 19대 임금 인조가 만든 부용지는 지금처럼 전각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연못이 아닌, 소박한 규모의 쉼터였다. 부용지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정조 때에 이르러서이다. 정조는 부용지에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연못을 비롯한 주변 경관을 새롭게 구성했다. 당시 정조의 지시로 단원 김홍도의 손에 의해 그려진 규장각도(奎章閣圖)라는 그림에는 새롭게 정비된 부용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정조에게 후원은 단순히 아끼고 즐겨 찾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정조는 부용지에 또 하나의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을 따르는 젊은 인재들을 육성했고, 신하들에게 후원의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을 보여주며 왕가의 권위를 세웠다.
6. 후원 - 왕의 휴식과 사색의 공간 사진-2
부용지를 지나 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인조가 만들었다는 옥류천(玉流川)에 도착했다. 정조가 후원을 정치적인 공간으로 활용했다면, 인조는 철저히 개인적인 사색과 유흥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한 왕이었던 인조는 시시 때때로 후원에 들러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임금의 공간, 후원
창덕궁의 후원은 역대 조선의 임금들에게 널리 사랑받아 왔다. 여러 임금이 즐겨 찾는 공간인 만큼, 임금의 개인적인 기질과 특성에 따라 후원을 활용하는 방법 또한 제각각이었다.

조선의 9대 임금이었던 성종은 후원에 작은 논을 만들어 직접 농사를 지어보였는데,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왕이 직접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시도를 했다고 한다.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은 후원에 담장을 쌓는 공사를 무리하게 추진하여 인근 민가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고, 서총대(瑞蔥臺)라는 높은 대를 쌓아 사냥을 즐기고 연회를 즐기며 흥청망청했다.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창덕궁 후원을 순수하게 휴식과 유흥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인조는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채의 정자를 만들었고, 후원 가장 깊은 곳에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개천을 만들어 후원의 공간을 확장했다. 평소 인조는 후원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일이 잦았는데, 가끔 기생들을 불러 음주가무를 즐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22대 임금 정조는 후원의 주합루(宙合樓)에 역대 왕들이 직접 집필했거나 즐겨 읽었던 책들을 보관하도록 했고, 봉모당(奉謨堂)을 지어 역대 왕들의 초상화와 글씨, 그림 등을 보관하게 하는 등 후원을 왕권의 권위를 세우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또한 부용지(芙蓉池)에 세워져 있던 정자, 부용정(芙蓉亭)을 개축하여 신하들과 함께 둘러보기도 했다.

참고문헌 : <우리 궁을 아는 사전, 창덕궁 후원 창경궁> / 역사건축기술연구소 / 돌배개
답사를 마치며...
옥류천을 지나 창덕궁의 동쪽 방면으로 빠져나오는 내내 은하는 마치 별세계에 온 것처럼 즐거워했다. 복잡한 서울 속에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창덕궁의 수많은 전각들 또한 후원 못지않게 많은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었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일상에서 맛 볼 수 없는 색다른 감흥과 즐거움,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점. 그것이 창덕궁만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을 마무리했다.
숨겨진 창덕궁 이야기: 궁궐의 수호신, 잡상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전각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기와지붕 위에 다양한 형상을 한 토우(土偶)들이 도열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잡상(雜像)’이라 부른다. 이 잡상들은 주로 승려나 괴수, 기이한 인물들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의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한국의 도교(道敎)에 관해 다루고 있는 ‘조선도교사’, 조선 중기의 설화집 ‘어우야담’을 보면 잡상에 관해 상세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전설 속에 등장하는 비범한 인물과 신들을 형상화하여 살(煞), 즉 사람이나 생물, 물건 등을 해치는 모진 기운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과거에는 새롭게 임명된 관리들이 선임 관리들에게 첫인사 할 때 반드시 대권문루위에 놓여있는 10개의 잡상 이름을 10번 외워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10개의 잡상은 대당사부(大唐師傅), 즉 삼장법사를 필두로 손오공, 저팔게, 사오정 등 친숙한 서유기 등장인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기록에 의하면 경희궁, 창경궁, 창덕궁에 각각 112개, 168개, 148개에 달하는 잡상을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창덕궁 인정전에 있는 9개와 돈화문의 7개, 숭례문의 9개, 경복궁 경회루의 11개 등 들여온 것에 비에 그 수가 현저히 적다. 지붕에 올려져 있는 개수도 제각각이라 어떤 곳은 4개만 있는 반면에, 어떤 곳은 11개에 달한다. 수많은 잡상들이 다 어디로 유실되었는지, 어떠한 법칙에 의해 배열되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원문출처 : <한국의 박물관: 기와> / 한국박물관연구회 / 문예마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사탐방 게임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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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1. 돈화문 2 규장각 3 선원전 4 인정전 5 낙선재 6 후원 함께하는 미션 1 아빠와 함께 인증샷 찰칵! 왕의 공간을 방문한 기념으로 돈화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3 어진 그려주기 종이와 펜을 준비하여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자 왕의 어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포인트! 4 손오공 찾기! 인정전 지붕 위 조각상들 중 손오공, 저팔계 등 서유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찾아보자! 손오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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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대중교통 이용 (추천)
(1,3,5호선) 종로3가역 : 6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3호선) 안국역 : 3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버스 : 109, 151, 162, 171, 172, 272, 7025 등 창덕궁 버스정류소 하차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출처: 창덕궁 홈페이지 http://www.cdg.go.kr/info/info_map.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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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우리 나라의 궁궐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한 그림체와 함께 들려준다 창덕궁 뿐 아니라 서울의 궁궐 이야기를 모두 함께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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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옥마을과 북촌 8경 사진
북촌 한옥마을과 북촌 8경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인 "북촌"은 조선 시대 왕족이나 권세 있는 사대부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현재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한옥마을을 북촌이라 부른다.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곳에는 북촌8경이라 하는 지점들이 있다. 각각의 지점에 있는 포토 스팟들은 북촌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줄 것이다.
왕가의 공간 창덕궁 여행에 이어, 마치 그 시대 사람이 된 것처럼 북촌을 여행해보자.
관련 정보 : http://bukchon.jongno.go.kr

출처 : 종로 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jongno.go.kr/tourMain.do
ㆍ글/사진 강민석
ㆍ그림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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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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