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역사를 만든 선택, 공산성

시즌2 역사탐방 길라잡이 17편 역사를 만든 선택,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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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코스

금서루 → 백제왕궁터 → 진남루 → 광복루 → 공북루
예상소요 시간 : 2시간 30분
공주 공산성은 백제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며, 역사적 인물들이 머물며 중요한 '선택'을 가졌던 공간이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단풍과 금강의 정취가 어우러진 공산성에서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탐방길라잡이

11월은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달이다. 대부분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이 시험을 위해 몇 년간 마음을 졸인다. 수능시험의 결과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수능시험과 우리네 인생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순간의 ‘선택’들이 누적되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서 어떤 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바뀌듯 우리 인생도 중요한 순간에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뀌곤 한다.
은하와 함께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공산성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것은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처럼, 우리의 역사 또한 수많은 선택에 의해 만들어져왔다. 공산성은 백제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 온 장소이며,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 백범 김구 선생 등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인물들이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공산성에서 그들은 역사에 기록 된 중요한 선택을 내렸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
공주를 처음 찾아온 은하는 공산성의 역사적 배경 보다는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듯 했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긴 철교를 지나자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져 있는 낮은 성벽과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의 물결이 우리를 맞이했다.

공산성, 이야기 속으로

문주왕의 탄생 원문출저 : 문화콘텐츠닷컴 백제 제 22대 문주왕 1년(475),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함략한다. 문주왕은 어쩔수 없이 수도를 옮겨야했는데 이때 도읍지로 선택한 것이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였다.
고구려의 한성 함락은 21대 왕이었던 개로왕대에서부터 예고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개로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침략, 영토 확장을 꿈꿨다. 그러나 고구려의 첩자에게 속아 국력을 낭비하고 전쟁에서도 패했으며 무리한 전쟁준비로 민심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문주왕의 탄생 그림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해진 상황에서 즉위한 문주왕은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구려 군이 수도 한성을 침공하면서 피난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문주왕은 결국 즉위한지 1개월 만에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웅진에 자리 잡은 백제의 새 왕궁은 지금의 공주 공산성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공산성에서 왕궁 터와 각종 시설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문주왕이 천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고구려의 침략이지만, 하필 웅천을 도읍지로 선택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학설은 지리적인 이점이다. 공주는 북으로 금강이 자리하고 더 위로 차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적군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고구려에 비해 열세였던 백제로서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웅천을 수도로 삼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공산성 탐방하기

1. 금서루
매표소에서 표를 산 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공산성의 서문이자 현재 정문 역활을 하고 있는 금서루가 보였다. 가을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굽이진 오르막길을 따라 금서루(錦西樓)로 향하고 있었다.
금서루 사진
미션
아빠와 함께 인증샷 찰칵!공산성을 방문한 기념으로 금서루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높이 솟은 성문을 통과하니 성벽에 둘러싸인 산등성이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공산성은 '웅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토성으로,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성(지금의 경기도 하남 일대)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게 되었다. 문주왕 1년(475년)부터 시작된 웅진백제 시대는 백제 26대 성왕이 부여로 천도하기 까지 63년간 이어졌고,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석성으로 증축된 것은 조선시대 발발한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2. 백제왕궁터
계단을 통해 쌍수정 아래로 내려오자 낮은 울타리로 둘러 쳐진 넓은 부지와, 물이 말라버린 깊고 넓은 우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제의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추정왕궁지와 그 시절 백제 사람들이 사용했던 우물이었다.
백제왕궁터
공주에 남아있는 미스터리 중 하나는 사라진 백제의 왕궁의 행방이다.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분명히 어딘가에 왕궁이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 위치가 어디인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1980년 바로 이 곳에서 대형 건물 터와 우물, 창고 등의 흔적, 기와를 비롯한 백제시대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미스터리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백제의 왕궁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의자왕 20년(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복신, 흑치상지, 도침 등 백제를 이끌었던 충신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대로 나당연합군에 고개를 숙일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맞서 싸울 것인가? 그들은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옹립하고 백제부흥군을 조직했다. 나당연합군에 맞서 나라를 되찾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백제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공주의 공산성, 지금의 예산군에 자리 잡고 있는 임존성 등을 거점으로 삼고 10일 만에 3만의 병력을 규합했다. 이들은 당나라 소정방이 보낸 군사들을 격퇴하면서 2백여 성을 회복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를 시작으로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던 사비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위기감을 느낀 신라 29대 왕 태종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부흥군을 섬멸하기 위해 나섰다. 신라군의 강력한 위세에 밀린 백제부흥군은 본거지로 삼고 있었던 임존성에 틀어박혀 농성을 시작했다. 한동안 수세에 몰려던 백제부흥군은 태종무열왕의 죽음, 고구려와의 전쟁 등으로 생긴 신라의 전력공백을 틈타 반격에 나섰다. 고구려로 향하던 신라군은 즉시 방향을 돌려 백제부흥군과 맞섰다.

이 무렵 백제부흥군 내부에서는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 핵심인물이었던 복신과 도침이 서로를 적대시 하면서 내부 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결국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백제 멸망 후 3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원문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 진남루
백제왕궁터를 지나 십 분 쯤 걷다가 숲 속으로 이어진 샛길로 접어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소박한 규모의 성문을 만날 수 있었다.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였다.
전남루
이 문은 한 가지 재미있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오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험생들이 모두 이 문을 지나 한양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이 길이 한양까지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진남루를 빠져나와 보니 길가 한편에 쌓여있는 돌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큰 돌에서 아주 작은 조약돌까지 여기를 지나는 행인들이 하나씩 올려 쌓은 돌탑이었다. 그 옛날, 과거를 보러 이곳을 지나가던 수험생들도 자신의 합격을 기원하며 돌탑을 쌓지 않았을까?
소원 돌탑 사진
미션
소원 돌탑 쌓기!조선시대 선비들이 합격을 기원하던 마음처럼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빌어보자!
은하도 더 나이를 먹으면 교복을 입고, 언젠가 수능시험을 보게 될 것이다. 은하에게 시험이란 것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무수한 고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일러주었다. 물론 은하는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시험지에 적혀있는 한 문제, 한 문제마다 올바른 답을 선택해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듯이, 우리네 인생도 살면서 마주치는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말년에 행복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은하가 삶의 기로에서 슬기롭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탑 위에 돌을 하나 더 얹었다. 물론 수능시험 잘 치러서 좋은 대학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4. 광복루
은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숲 속으로 뻗은 오솔길을 걷다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성곽길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인 광복루(光復樓)는 성곽길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울창한 아름드리나무 아래 자리 잡은 2층의 누각은 여느 정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광복루라는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광복루
원래 이 누각은 성 안에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으로 향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 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김구는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며 이 누각에 ‘광복루’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민족의 해방을 이끈 영웅이 직접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누각 입장에선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백범의 선택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창수라는 청년이 있었다. 동학 신도였던 그는 대한제국 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끓어오르는 애국심에 거사를 단행하고 감옥에 들어온 김창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는 왜놈들뿐인데,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하며 탈옥을 시도했다. 그는 함께 옥살이를 하던 조선 사람들과 함께 탈옥에 성공했고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라는 절에서 승려로 위장한 채 숨어 살았다.
이 김창수라는 청년이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백범 김구 선생이다. 마곡사에서 하은스님의 상좌(고승의 제자)가 된 김구는 머리를 깎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이다. 김구가 마곡사에 심은 향나무 옆에는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 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김구가 직접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김구는 마곡사에서 승려로 생활하며 실제로 불교에 깊게 심취했으며, 개인적인 수행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대로 승려로 남았으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구는 승려로 남지 않고 독립운동가로서 최전선에서 일본제국과 맞섰다. 백범 김구는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창설하고 초대 주석에 선출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남북의 통일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등 한국 근현대사에 굵은 자취를 남겼다.

원문출처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두산백과, 문화콘텐츠닷컴
5. 공북루
길게 이어진 성곽길을 따라 금강이 가깝게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내려왔을 무렵, 우리의 눈앞에 또 하나의 성문이 나타났다. 공산성의 북문, 공북루(拱北樓)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선조 36년(1603년)에 새롭게 재건하면서 공북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산정 사진
미션
공산정(公山亭)을 향하여!공북루에 이어지는오르막길 위에 정자가 하나있다.공산정에서 가장 높은 지점까지아빠와 시합을 해보자!
공북루 안으로 들어서자 기와지붕 아래 걸려있는 현판들이 보였다. 한문으로 쓰여 있는 수많은 글귀들 중에 공북루중수기(北樓重修記)라는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힘 있는 필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가 범상치 않은 이 현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비로 유명한 우암 송시열이 직접 쓴 것이다. 꼿꼿한 글씨가 대쪽 같았던 송시열의 생애를 닮아 있었다.
답사를 마치며...
은하와 함께 공북루 난간에 몸을 기대고 눈앞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의 풍광을 지켜보았다. 유홍준 선생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이곳에서 보는 경치가 아름다워 느긋이 마음을 갈무리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산성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공북루를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유홍준 선생의 말 대로 공북루의 경관은 아름다웠다. 은하와 함께 유유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주시의 풍경을 감상하며 오늘의 짧은 여행을 마무리 했다.
숨겨진 공산 이야기: 인절미의 유래, 인조 임금과 쌍수정
콩고물을 묻혀 맛있게 먹는 떡 인절미에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한 조선의 왕 인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년), 광해를 폐위시키고 인조가 임금이 된 후 이괄은 평안도 영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중책을 맡았다. 그런데 이괄의 아들 이전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인조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반정공신들의 음모였다. 이전이 반정공신들의 지나친 횡포로 조정이 문란해 졌다고 한탄하자 이에 분노한 공신들이 이전을 모함한 것이다. 평소 반정공신들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괄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훈련시키던 12,000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게 된다. 이에 혼비백산한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백성들로부터 음식을 진상 받게 되는데 콩고물에 묻힌 떡이 참으로 맛있었다.
“이 맛이 절미(絶味)로다. 도대체 무슨 떡인고?” 하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 하였다.
“그럼 누가 이 떡을 만들었단 말인고?” 하니,
“임씨 댁에서 만들어 진상하였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에 인조는 임씨의 성을 앞에 붙여, 임씨가 만든 맛있는 떡이라 하여 ‘임절미(任絶味)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 ’임절미‘가 ’인절미‘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인조는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자리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크게 기뻐했다. 얼마나 좋았던지, 인조는 자신을 숨겨준 두 그루의 나무에 정3품인 통훈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두 그루의 나무를 볼 수 없지만, 한 쌍의 나무, 즉 쌍수(雙樹)라는 이름의 정자가 대신 남아 인조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원문출처 : 문화콘텐츠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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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위치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로 280
자가용 이용 시(서울 기준)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당진영덕고속도로
대중교통 이용 시
공주 시외버스터미널 하차 시, 도보로 이용 가능
공주 종합버스터미널 하차 시, 시내 버스 이용 가능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로 280 출처: 네이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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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무령왕릉'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송산리 고분군'은, '공산성'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시대의 놀라운 건축 기술을 증명함과 동시에, 화려한 부장품들을 통해 당대의 놀라운 수준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그리고 국립공주박물관까지 가까이에 모여 있어, 하루 동안 백제의 모든 것을 체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공주시 문화관광
http://tour.gongju.go.kr/tour/sub01_08.do
ㆍ글/사진 강민석
ㆍ그림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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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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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