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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길라잡이

역사의 끝과 시작, 연천 숭의전지(崇義殿址)

시즌2. 역사탐방 길라잡이 연천 - 숭의전지
시즌2. 역사탐방 길라잡이 연천 - 숭의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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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길라잡이

예상 소요 시간 : 2시간

연천 숭의전지는 고려를 위해 조선이 만든 공간이다. 조선의 시작에 숭의전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며, 고즈넉한 풍경과 함께 겨울의 정취를 느껴보자.

아빠 같이가요!

해마다 12월이 되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흔한 푸념이 있다. 금주, 금연, 다이어트 등 연초에 계획했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후회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뒤돌아보면 이뤄놓은 것은 별로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12월이 후회와 한숨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12월은 다가올 일 년 치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이 있듯이, 묵은해를 잘 정리해야 상쾌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

숭의전지는 고려의 역대 왕들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태조 왕건을 비롯해서 고려왕들의 위패가 보관된 숭의전을 중심으로 제사에 필요한 건물 여러 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이들을 통틀어 숭의전지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숭의전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조선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라는 것이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성계는 어째서 전 왕조를 위한 사당을 만든 것일까? 은하는 그 이유가 궁금했는지 연신 질문을 던져댔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열혈시청자인 은하는 요즘 들어 여말선초의 역사에 대해 관심임 많아졌다. 숭의전지를 여행지로 고른 데에는 은하의 왕성한 호기심 을 충족시켜주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은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를 태운 차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임진강을 건너 숭의전지에 도착했다.

숭의전지, 이야기 속으로

숭의전지 이미지

썩은 소(朽沼) 전설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무렵 있었던 일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고려의 왕족인 왕씨(王氏)들을 모조리 멸족시키려 하였다.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전씨(田氏, 全氏), 김씨(金氏), 옥씨(玉氏), 금씨(琴氏), 박씨(朴氏) 등으로 성을 바꾸고 피신했다.

이들 중 뜻 있는 사람은 비록 성을 바꾸더라도 자신들의 뿌리인 고려태조, 왕건의 신주만큼은 안전한 곳에 모셔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돌로 배를 만들어 송도에 있던 왕건의 신위를 모신 후, “이곳 송도 땅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돌배를 타시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하소서.” 하고 절하며 예성강에 띄워 보냈다.

돌배는 임진강 어느 벼랑 밑에 멈추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신위를 모신 돌배를 차마 홀로 떠나보낼 수 없어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은 “태조께서 이 곳을 피신 장소로 정하신 듯하니, 여기에 신주를 모시도록 합시다.” 하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쇠로 만든 밧줄로 배를 단단히 묶어둔 뒤 뭍에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사당을 지을 장소를 물색하여 정한 후 강가로 돌아와 보니, 하룻밤 사이에 쇠밧줄은 끊어지고 돌배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배의 행방을 찾아 강줄기를 따라 수색하을 시작했다. 배는 ‘누에머리(蠶頭)’라 불리는 절벽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왕씨들은 절벽 위에다 사당을 지어 태조 왕건의 신위를 모시고 ‘숭의전(崇義殿)’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야기는 연천 주민들 사이에서 ‘썩은소 전설’이라 불린다. 하룻밤 사이에 쇠밧줄이 썩었다 하여 ‘썩은쇠’라 불리던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며 ‘썩은소’로 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지금도 청명한 날 누에머리 절벽 밑을 보면 수면 아래로 돌배가 보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원문 출처 : 지명이 품은 한국사 네 번째 이야기 2권 / 이은식 / 타오름
연천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1. 어수정 - 왕건의 목을 축여주던 우물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초입에는 널따란 우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물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은 고려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는 유서 깊은 장소다. 전설에 의하면 왕건이 젊었을 때 이 우물에 자주 들러 목을 축이고 갔다고 한다.

어수정 이미지1

미션

어수정에서 약수 한 잔!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함께 어수정의 약숫물을 마셔보자!

어수정 이미지2

은하는 왕건을 고려를 건국한 시조로만 알고 있을 뿐,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라를 세웠는지는 알지 못했다. 통일신라 말기, 한반도는 후백제와 태봉(후고구려), 신라 세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다. 흔히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왕건은 원래 태봉을 세운 궁예의 신하였다. 궁예가 폭정과 전횡을 일삼자 왕건은 그를 물리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후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새로운 나라 고려를 만들었다.

우물물을 홀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은하는 왕건과 이성계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며 신기해했다. 반란을 일으켜 기존의 부패한 국가를 뒤 엎고 새 나라를 만들었으니 나름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한 나라의 태조로서, 이성계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왕건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2. 홍살문 - 숭의전의 입구 역할

어수정 옆에는 붉은 기둥이 인상적인 높은 문 하나가 서 있었다. 이 문은 숭의전의 입구 역활을 하는 홍살문(紅?門)이다. 홍살문은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래, 고려, 조선에 이르기 까지 건축물의 출입문 역할을 해 왔다. 붉게 칠한 나무로 기둥과 지붕을 세우고, 화살촉처럼 뾰족한 나무를 얹었다 하여 홍살(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살문 이미지

홍살문은 단순한 출입문이 아니라 이곳이 신성한 장소임을 드러내는 주술적 상징물이기도 했다. 이성계는 고려왕들의 사당을 성역으로 지정하고 보호했던 것이다. 전 왕조에 대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겠다는 이성계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자신이 멸망시킨 나라를 이렇게까지 존중하려 한 것일까?

조선이 개국했지만 백성들은 나라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전히 고려의 체제와 관습에 젖어 있던 백성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계는 조국을 멸망시킨 반역자였다. 이러한 민심을 읽었는지, 이성계는 나라를 세운지 6년 째 되던 해(1397년), 이곳에 숭의전을 짓고 직접 고려의 옛 왕들에게 예의를 표했다. 고려의 멸망으로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조선이 고려의 명맥을 잇는 국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성계의 꿈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원래 고려에서 이름난 용감무쌍한 장수였다. 평소 꿈 이야기 하는 것을 즐기던 이성계는 평안도 안변 땅에 머물던 어느 날 밤, 묘한 꿈을 몇 가지나 꾸었다. 꿈 내용이 수상하여 무슨 뜻인지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알 길이 없었다.

이성계는 마을에서 해몽을 잘하기로 소문난 노파를 찾아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털어 놓았다. 노파는 서쪽 방면에 있는 설봉산에 토굴을 파고 도를 닦는 승려가 한 사람 있는데, 그라면 제대로 해몽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 승려는 십 년 전, 토굴에 들어간 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해 왔다고 했다.

이성계는 그 길로 설봉산의 승려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온 고을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더니 집집마다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꽃이 마치 비 오듯 떨어져 내렸습니다. 다시 또 꿈은 이어져 저는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꿈을 깨게 됐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승려는 이성계에서 앞으로 그 꿈의 내용을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며, 해몽을 시작했다. 마을의 닭들이 '꼬끼오' 하고 울어댄 것은 반드시 고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며(高貴位), 방아를 찧을 때 들리는 '덜꾸덩' 하는 소리를 글로 쓰면 덕가동(德加東), 즉 동방에 덕을 입힌다는 뜻이니 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징조라는 것이다.

승려는 서까래 세 개를 짊어 진 형상은 임금 왕(王)자와 같으니, 훗날 이성계는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라 했다. 승려의 말에 흥분한 이성계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승려는 절을 크게 짓고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그 승려는 훗날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무학대사(無學大師)였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말을 새겨들었다가 훗날 왕이 된 뒤, 안변군에 큰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절을 임금 왕(王)를 해몽하여 지었다고 해서 ‘석왕사(釋王寺)’라고 지었다.

- 원문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3. 앙암재 - 제사에 사용되는 물품 보관소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는 오솔길을 따라 잠시 걸어 올라가니, 사대부의 저택을 연상케 하는 한옥 건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로소 숭의전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본격적인 숭의전 탐방은 오솔길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앙암재(仰巖齋)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앙암재는 향과 축문, 제복 등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물품들을 보관하던 장소다. 일종의 창고인 셈인데 건물의 모양새가 창고라기보다 선비들이 여기를 즐기던 별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앙암재 이미지1

미션

태조 왕건 따라하기 찰칵!

앙암재에 있는 왕건의 조각상 사진을 따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보자!

앙암재 이미지2

인상적인 것은 건물 안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태조 왕건의 모습을 조각한 동상 하나가 찍혀 있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동상으로 원래 고려의 도읍이었던 송악에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한 후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 이 유물은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직접 가서 볼 수가 없으니 아쉬운 마음에 사진이라도 걸어 둔 모양이다.

4. 숭의전 - 숭의전지의 핵심

숭의전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숭의전(崇義殿)은 여러 채의 건물들 한 가운데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건물들에 비해 두어 단 높은 기단, 붉게 칠한 기둥과 초록빛깔 단청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일반 가옥같은 느낌을 주는 다른 건물에 비해 아름답고 화려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숭의전 이미지

은하와 함께 낮은 계단을 올라 숭의전 앞에 섰다. 가운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왕건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위패, 두개의 커다란 촛대와 향로가 놓여 있었다. 방의 양 옆에는 별도의 탁자 위에 고려의 제8대 왕 현종과 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외적에 맞서 고려를 지켜낸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이성계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왕건의 위패를 마주했을 것이다.
자신이 멸망시킨 나라의 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성계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은하는 아마도 조선의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을 거라 추측했다. 나라는 바뀌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으니, 고려의 왕에게도 조선의 왕에게도 모두 똑같은 백성이라는 것이다. 가끔 어린아이들의 통찰력이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위화도 회군

고려 우왕 14년(1388년), 명나라는 고려 조정에 쌍썽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자신들이 점유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명나라의 요구는 땅을 내놓으라는 협박과 다를 바 없었다. 고려 대신들은 명과 화친을 맺을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군부의 실력자였던 최영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오히려 요동을 정벌해 명나라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왕은 최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이성계는 출항 직전까지 요동 정벌을 극구 반대하며 4대 불가론을 제시했다. 첫째로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둘째로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이고, 셋째로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영은 우왕을 설득해 강행토록 했다. 결국 그 해 5월,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출발했다.

이성계과 고려군이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렀을 무렵, 큰 장마를 만나서 더 이상 진군하기 힘들어졌다. 장마가 계속되면서 야반도주하는 장졸이 늘어났고 병사들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저하되었다. 이성계는 조정에 요동정벌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으나, 우왕와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신속히 진군할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왕의 승인 없이 군사들을 이끌고 회군할 것을 결심했다. 무리한 전쟁을 종요하는 우왕과 최영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성계는 장수들에게 "상국의 지역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묘사직과 백성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내 순리와 역리로써 상소를 올려 회군을 간청해보았으나 왕과 최영 장군이 허락하지 않으니 인군 곁에서 참소하는 악당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케 하려 한다."고 말하며 반란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5월 20일, 이성계를 비롯한 장졸들이 배를 타고 위화도를 떠나자 수십일 간 내린 비 때문에 위화도가 송두리째 물에 잠겨 버렸다. 출발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모두 산 채로 수장될 수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졸들은 이성계를 칭송하며 기꺼이 반란에 동참했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거침없이 수도인 개경으로 밀고 들어왔다. 우왕과 최영은 갑작스러운 사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패하고 말았다. 결국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실권은 장악하고, 조선 건국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원문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5. 배신청 -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숭의전지의 끄트머리에는 아담한 크기의 건물 두 채가 ㄱ 자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려에 충성을 다했던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과, 위패를 임시로 보관할 때 쓰는 이안청(移安廳)이었다.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배신청이었다. 살짝 열려진 문 너머로 나란히 늘어선 16개의 위패가 보였다. 전쟁이 아니라 외교를 통해 거란족으로부터 강동6주 땅을 얻어 낸 서희,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 등 낯익은 이름들이 반가웠다.

배신청 이미지1

미션

정몽주 위패 찾기!

배신청에 있는 16개의 위패 중 정몽주의 위패를 찾아보자! (한자 힌트 : 鄭夢周)

배신청 이미지2

은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군가의 이름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름이 모두 한자로 쓰여 있어 읽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하는 정몽주의 위패를 찾고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수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 자리까지 올랐던 명망 있는 관료였다. 그는 한때 이성계 일파와 힘을 합쳐 부패하고 무능한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섰다. 정몽주에게 있어 충성을 바쳐야 할 나라는 고려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일파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 충신들의 위패는 조선의 5대 왕 문종 원년(1451년)에 이곳에 모셔졌다. 이성계의 관점에서 보면 정몽주는 건국이라는 대업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적으로 돌아선 배신자일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후손들은 그런 정몽주에게 늦게나마 예의를 갖췄다. 숭의전지를 통해 고려라는 지난 왕조를 잘 마무리하고자 했던 이성계의 유지를 받든 결과일 것이다.

은하야 또오자!

답사를 마치며...

은하의 손을 잡고 숭의전을 나섰다.
숭의전지 뒤편으로 '숭의전 둘레길'이라는 산책길이 펼쳐져 있었다. 조밀하게 이어져 있는 돌계단을 올라 야트막한 봉우리 위에 섰다.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의 풍경과 헐벗은 겨울 산들이 한 눈에 시야를 사로잡았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6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조선이 장수할 수 있던건 태조 이성계가 고려라는 지난 왕조를 잘 정리함으로서 새 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하와 함께 눈을 감고 올 한해를 잘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그리고 다가올 2016년도 무탈하고 평온하기를 빌었다. 그 옛날, 우리처럼 이곳에 서서 임진강의 풍광을 감상했을 이성계도 같은 소원을 품었을 것이다. 천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하는 초겨울. 은하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임진강 줄기를 내려다보며 짧은 여행을 마무리했다.

<숨겨진 숭의전지 이야기> 숭의전을 지키는 느티나무

숭의전 바로 앞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크기만 20미터 달하는 이 나무들은 조선 문종 2년(1452년), 고려의 왕족이어던 왕씨 가문의 후예들이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560여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자리를 지켜온 터라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이 느티나무들은 숭의전을 지키는 신령스런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의 경사와 흉사를 미리 알려준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나무가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곧 비나 눈이 많이 오고,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생기고, 까마귀가 모여들면 반드시 초상이 난다고 한다.

- 원문출처 : 명품 둘레길 63선 / 월간산 / 조선 매거진

찾아가는 길

위치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지도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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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강민석
그림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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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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