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길라잡이
운현궁은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과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저택입니다.생각보다 작은 운현궁을 보며 아이들은 궁금해합니다. 궁이라고 한다면 왕이 거주할 목적으로 지어진 으리으리한 공간이 아니었나 하구요. 여느 사대부들의 기와집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집이었음에도 운현궁은 어떻게 ‘궁’이라는 명칭을 얻은 것일까요?
조선 최고의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거처답게 과거에는 여느 궁궐 못지않은 규모와 화려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규모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운현궁 곳곳에는 아직 대원군과 고종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고종이 살았던 곳. 바로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뒤늦게 왕위에 오른 후 그가 살던 사택 또한‘궁(宮)’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부자(父子)의 인연은 하늘이 정해 준다는 말이 있듯이, 대원군과 고종은 그 누구보다 각별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두 사람은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자지간에 원수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운현궁을 둘러보며 그들의 기구한 사연 속 교훈들을 아이들과 함께 되새겨 봅시다.
굳게 잠긴 대문에 가로 막힌 부자관계 - 솟을대문
안국역 4번 출구를 지나 걷다보면 길게 이어지는 돌담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돌을 반듯하게 쌓아올린 담벼락과 단정하게 얹어놓은 기와지붕을 구경하다 보면, 큼지막한 대문 하나가 등장합니다. 운현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조선 말기, 이 솟을대문*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물쇠가 집 안이 아니라 밖에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집의 주인인 대원군을 가둬두기 위한 자물쇠였습니다. 왕과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던 대원군을 감히 누가 가두려 했던 것일까요. 역사가들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이자 조선의 26대 왕이었던 고종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그 무엇보다 부모에 대한 효(孝)를 중시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집 안에 감금합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악화되어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계속해서 운현궁을 탐방해봅시다.
솟을대문
가마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주변 담벼락, 건물보다 높게 설치한 대문을 뜻합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집 대문은 대부분 솟을대문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운현궁의 솟을대문은 자물쇠 없이 활짝 열려 있어, 누구나 편안하게 운현궁을 둘러 볼 수 있습니다.
운현궁 약도 확인하기
아이와 함께 운현궁 정문에 설치된 ‘운현궁 배치도’를 확인하고 앞으로 만나게 될 건물의 위치와 이름을 미리 확인해 봅시다.
불량배와 어울리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던 대원군의 속내 - 노안당 (老安堂)
솟을대문을 통과해 오른쪽을 보면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건물 한 채가 보입니다.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입니다. 이곳은 대원군의 서재이자 침실로, 그가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습니다. 노안당 옆에는 기다란 행랑채(하인들이 기거하거나 창고, 마굿간으로 쓰던 방)가 있는데 이곳에는 대원군의 시중을 드는 부하들이 항상 대기 중이었다고 합니다.
힘없는 왕족이었던 대원군은 젊은 시절 저잣거리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는 왕족의 목숨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일부러 정신이 나간 불량배인 척 연기를 하며 그들의 눈을 피했다고 합니다. 속으로는 언젠가 힘을 갖게 되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겠노라 이를 갈고 있었을 겁니다.
조선의 25대 왕 철종이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면서 대원군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바로 고종입니다. 대원군은 수렴청정*을 선언하며 어린 아들을 대신해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쇄국정책*을 펼쳐 다른 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대원군은 조선이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과 대등한 힘을 갖추기 위해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노안당에는 난을 그리는 대원군의 모습이 모형으로 재연되어 있습니다. 대원군은 실제로 서예와 그림을 즐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래 전, 대원군은 이곳에서 난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조선을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하고, 또 고심하지 않았을까요?
세도정치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입니다.
수렴청정
나이 어린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친인척 어른이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는 일을 뜻합니다. 주로 어린 자녀에게 왕위를 물려준 선대 왕, 혹은 선대 왕의 왕비 등 권위를 갖춘 나라의 큰 어른이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쇄국정책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서로 교류하지 않는 정책을 말합니다. 흥선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이 대표적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단절했으며,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자신의 뜻을 널리 알렸습니다.
척화비에는‘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난 그려보기
대원군은 서예와 난초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조선 최고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는 대원군의 난 그림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노안당 마루에 앉아 대원군의 난 그림을 따라 그려 봅시다.
준비물 : 도화지, 크레파스 혹은 붓과 물감
천하장안 찾기
노안당 옆, 행랑채 안에는 ‘천하장안’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이 숨어 있습니다. 천하장안은 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이들로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 네 사람을 뜻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이들의 성씨를 따 천하장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행랑채를 둘러보며 천하장안을 찾아봅시다.
한 평생 아버지에게 억눌린 삶을 살았던 아들의 한 - 노락당 (老樂堂)
노안당을 지나면 운현궁의 중심이자 가장 큰 건물인 노락당을 만나게 됩니다. 집안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를 때 사용했던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때 고종의 나이는 15세. 아직 한 가정을 꾸리기에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작은 새싹이 큰 나무로 자라나듯,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도 어느덧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수렴청정을 거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아직 왕 노릇을 하기에는 배움이 모자라다고 생각한 걸까요? 아니면 제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놓기 싫어하는 욕심 때문일까요? 이유는 대원군만 알고 있을 겁니다.
대원군의 수렴청정 때문에 가장 속이 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종이었습니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살아왔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고종은 스물 두 살 되던 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조선을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고종이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었던 명성황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례를 올릴 때만 해도 명성황후는 참하고 조신한 소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 가면서 명성황후와 그녀의 가족들은 점차 권력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명성황후는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유학자,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수렴청정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대원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대원군은 달라진 아들의 태도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는 고종을 만나기 위해 궁궐을 찾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고종의 마음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원군은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강제로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쇄국정책
고종의 왕비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며 권력다툼을 벌였습니다. 한때 조선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기도 했으나, 일본과 갈등을 겪으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졌습니다. 명성황후는 결국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 사건은 을미년(1895년)에 일어났다 하여 ‘을미사변’이라 불립니다.
명성황후와 기념촬영하기
노락당 안에는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부인은 부대부인 민씨, 어린 세자들의 모습이 재연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배경으로 아이의 기념사진을 찍어줍시다.
파국으로 치닫는 부자관계, 그리고 또 하나의 욕망 - 이로당 (二老堂)
노안당, 노락당에 이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이로당은 운현궁의 아녀자들이 머물렀던 건물입니다.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이른바 금남(禁男)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로당의 주인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였습니다. 민씨는 친척관계였던 명성황후를 고종의 며느릿감으로 점찍은 장본인입니다. 대원군은 처음에 명성황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전해집니다. 대원군 부부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판 셈입니다.
명성황후와 그녀의 가족들은 조선의 권력을 틀어쥐고 대원군 못지않게 위세를 떨쳤습니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이제 막 자신만의 정치를 하려했던 고종은 명성황후의 기세에 눌려 제 뜻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대원군은 기가 막혔을 겁니다. 그가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내는 일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며느리에 의해 세도정치가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 며느리가 고종을 능가하는 권력자가 되었으니, 대원군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손에서 다시 권력을 빼앗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틈만 나면 서로를 음해했습니다. 고종은 두 사람의 사이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참다못한 고종은 1895년(고종 32년), 홍범 14조라는 법령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법령에는 왕의 친인척과 외척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종은 아버지와 아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에 의해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 당하고 운현궁에서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운현궁을 떠나며
대원군은 1898년(고종 35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 대원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 고종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아들을 억눌렀던 자신의 고집에 회한을 느꼈던 것일까요? 고종은 대원군의 청을 거부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 운현궁의 솟을대문은 방문객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자물쇠도, 관람료도 없이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 볼 수 있습니다. 운현궁을 나서면서 그 옛날, 고종과 대원군의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대원군이 권력에 대한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진심으로 아들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더라면, 성인이 된 고종 또한 권력 다툼의 견제를 차치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잠시 헤아려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 돈독한 부자(父子)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한복입고 운현궁 구경하기
현재 운현궁 내 기획전시실에서는 ‘전통의상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우리의 전통의상을 입고 운현궁을 둘러본다면 더 재밌고 뜻깊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 의상 체험
조선시대 전통 의상을 직접 입어보고 운현궁 곳곳을 거닐며 기념촬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옷을 입는 법도 함께 배워봅시다.
- 장소 : 기획전시실
- 일자 : 상시 운영(휴관일 또는 운현궁 상황에 따라 제외)
- 시간 : 하계 10:00 ~ 18:00, 동계 10:00 ~ 17:00, 점심시간 12:00 ~ 13:00
[출처 : 운현궁 http://www.unhyeongung.or.kr]
유물전시관 탐방하기
이로당을 나서면 운현궁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전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이곳을 둘러보며 운현궁에 남아있는 고종과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의 자취를 느껴봅시다.
유물 전시관
운현궁 상설전시관 운영을 통해 시민 및 관람객에게 운현궁의 우수한 역사를 알리고자 합니다.
- 장소 : 유물전시관
- 일자 : 연중(휴관일 또는 운현궁 상황에 따라 제외)
- 시간 : 하계 09:00 ~ 18:00, 동계 09:00 ~ 17:00
[출처 : 운현궁 http://www.unhyeongung.or.kr]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 O / X )
고종은 아버지의 수렴청정에 평생 저항하지 않았다. ( O / X )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운현궁에 가두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임종 때 나타나 화해를 이루었다. ( O / X )
명성황후는 상소문을 올려 흥선대원군의 수렴청정을 견제했다. ( O / X )
퀴즈 정답은 주변 둘러만한 곳 코너 아랫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창덕궁 태종 5년(1405년)에 지어진 왕궁입니다. 왕과 왕실 종친들이 머물렀던 궁궐로, 경복궁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궁궐로 손꼽히는 장소입니다.
(2) 종묘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입니다. 조선의 왕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기원했습니다.
(3) 낙원상가 국내 최대의 악기 전문 상가입니다. 건물은 1960년대에 지어졌으며, 1970년대 말부터 악기 상점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4) 인사동 크고 작은 미술관과 골동품 가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맛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볼거리들이 즐비한 동네입니다.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며 먹거리와 즐길거리 또한 풍부한 곳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O , X , X ,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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