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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길라잡이

왕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창경궁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이뤄질 수 없는 왕의 사랑 이야기, 창경궁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이뤄질 수 없는 왕의 사랑 이야기, 창경궁

탐방 길라잡이

창경궁 코스구성

창경궁(昌慶宮)은 경복궁, 창덕궁과 더불어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입니다. 이 궁궐을 세운 사람은 조선9대 왕이었던 성종으로, 폐허로 남아있던 수강궁을 새롭게 단장하여 창경궁이라 이름 짓고 왕실의 세 대비를 모셨습니다. 그 후 창경궁은 왕비와 후궁들의 거처로 활용되었습니다.

창경궁에 머물렀던 왕의 여인들은 왕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서로를 향한 시기와 질투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창경궁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희대의 악녀로 알려져 있는 장희빈입니다.

장희빈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이로 인해 왕비였던 인현왕후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녀는 어쩌다가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일까요? 장희빈의 흔적을 쫓아 그녀가 머물렀던 창경궁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창경궁 약도

장희빈과 숙종, 사랑에 빠지다 - 문정전(文政殿)

문정전 이미지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으로, 부유한 역관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어 창경궁에 들어온 옥정은 우연히 숙종을 만나게 됩니다. 숙종은 아름다운 옥정에게 첫 눈에 반해서 만사를 제쳐두고 그녀에게 몰두했다고 합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옥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아들이 여자에 푹 빠져 나랏일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명성왕후는 아들을 위해 옥정을 강제로 궁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옥정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옥정을 창경궁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때부터 장옥정은 희빈 장씨, 일명 장희빈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장희빈은 지금은 유실된 취선당(就善堂)이라는 건물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취선당은 문정전(文政殿) 앞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정전은 대비들의 위패를 모셔두는 곳인데, 안뜰에서 보면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고즈넉한 숲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아마도 숙종과 장희빈은 이 고요한 숲길을 나란히 거닐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을 겁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숙종 ( 1661 ~ 1720 )

조선의 19대 왕으로,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나라 안의 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동법, 균역법 등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장희빈 ( 1659 ~ 1701 )

숙종의 후궁이자 조선 20대 왕 경종의 어머니입니다.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한때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친오빠인 장희재를 비롯한 남인 세력과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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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목마 태워주기 이미지

아이에게 목마 태워주기

문정전 안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보기에는 담벼락이 좀 높습니다. 아이에게 목마를 태워주고, 함께 경치감상을 해 봅시다.

비운의 왕비 인현왕후 - 통명전(通明殿)

통명전 이미지

숙종과 장희빈이 본격적으로 사랑을 키워 갈 무렵, 그의 곁에는 이미 부인이 있었습니다. 숙종 7년(1681년)에 왕비로 간택되어 창경궁에 들어온 인현왕후*입니다. 원래 숙종에게는 인경왕후라는 왕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천연두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왕비가 되었을 때, 인현왕후의 나이는 불과 열 네 살이었습니다. 한창 꿈 많은 나이였던 인현왕후는 또래 소녀들처럼 멋진 왕자님과의 달콤한 로맨스를 꿈꿨을 겁니다. 달리 숙종은 인현왕후를 외면하고 오직 장희빈만을 총애했습니다.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장희빈은 원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숙종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연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극과 극이었습니다. 인현왕후의 집안은 서인, 장희빈의 집안은 남인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정 관료들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치열한 당파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은 서인과 남인간의 당파싸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숙종이 누굴 더 총애하느냐에 따라 두 세력의 희비가 엇갈렸던 것입니다.

장희빈이 숙종의 아들을 출산하면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고 인현왕후와 서인세력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나를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켜라!”하고 소리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행실을 문제 삼아 그녀를 궁궐에서 쫓아냈습니다. 비어있는 왕비의 자리는 장희빈의 차지였습니다. 인현왕후를 지지해 왔던 서인세력 또한 조정에서 물러났고 남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 부릅니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 명정전 동쪽에 위치한 통명전(通明殿)은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나기 전 까지 머물렀던 건물입니다. 대대로 왕실의 대비, 왕비들의 침실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왕비가 된 장희빈은 텅 빈 통명전을 둘러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을 겁니다. 장희빈과 남인 세력은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을 장악하고 마음껏 권세를 누렸습니다.

슉종과 장희빈, 인현왕후 일러스트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인현왕후 ( 1667 ~ 1701 )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왕의 두 번째 왕비)입니다.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서인 세력의 거두 민유중의 딸로 본명은 민여흥입니다..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왕비로 복귀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기사환국 ( 1689년 )

장희빈의 아들 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서인 세력을 쫓아내고, 남인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부릅니다. 기사년(己巳年)에 정치의 국면이 전환되었다(환국, 換局) 하여 기사환국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숙종은 재위기간 중 총 세 차례의 환국을 단행하며 남인과 서인 세력에게 번갈아가며 정권을 쥐어 주었습니다. 이를 두고 역사가들은 숙종이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세력에게 정권을 주는 환국정치를 통해 왕의 지위를 유지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가위 바위 보, 계단 오르기 게임.

통명전 옆에는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이어진 좁고 기다란 돌계단이 있습니다. 아이와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해서 이긴 사람이 한 칸씩 올라가는 게임을 해봅시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펼쳐지는 오솔길을 따라 가벼운 산책을 해 보는 것도 좋을겁니다.

숙종의 뒤늦은 후회 - 경춘전(景春殿)

경춘전 이미지

숙종은 마침내 사랑하는 장희빈을 왕비로 맞이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장희빈과 남인세력이 권력을 쥐고 온갖 전횡을 일삼는 통에 나라 안이 시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대세력은 거침없이 제거하는 한편, 백성을 수탈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이득을 챙겼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요?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듯이, 장희빈을 향해 품었던 숙종의 뜨거운 사랑도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쫓아낸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현왕후와 남인 세력이 남아있었더라면 장희빈과 서인들을 견제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1694년(숙종 20년), 숙종은 그토록 아꼈던 장희빈을 내치고 인현왕후를 왕비의 자리로 복귀시켰습니다. 장희빈의 짧았던 봄날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인현왕후는 숙종과 백년해로 하는 듯 했으나, 칠 년 남짓 왕비로서의 생을 누리다가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세상을 등지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습니다.

창경궁의 여러 전각들 틈에 외롭게 서 있는 경춘전(景春殿)은 인현왕후가 숨을 거둔 곳입니다. 숙종은 이곳에서 인현왕후를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의 후회가 너무 늦었음을 자책하지는 않았을까요?

숙종은 인현왕후를 묻으면서 묘지의 옆자리를 비워두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인현왕후의 곁에 묻히길 소망했다고 합니다.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가졌던 미안함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가 절절히 느껴지는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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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석탑 앞에서 사진찍기

오층석탑 앞에서 사진찍기

경춘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축조된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의 궁궐에서 만나는 고려의 석탑은 낯설고 이색적입니다. 원래 다른 지역에 있던 석탑인데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석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봅시다.

비극으로 끝난 사랑 - 선인문(宣仁門)

선인문 이미지

인현왕후가 사망한 후,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는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만한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장희빈이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인현왕후가 머물던 통명전 부근에서 저주에 쓰이는 인형과 죽은 동물들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장희빈이 궁궐 안에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저주의 굿판을 벌였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장희빈은 누군가의 모함이라며 억울해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숙종은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명했습니다. 결국 장희빈은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장희빈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던 남인 관료들도 관직을 잃거나 귀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무고(巫蠱)의 옥(獄)* 이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장희빈의 시신은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궐 밖으로 옮겨졌습니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 남쪽에 위치한 선인문은 원래 궁 안에서 근무하는 관리들과 내시, 궁녀들이 이용하는 문입니다. 장희빈은 생전에 자신이 이 문을 통해 궁을 떠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는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왕의 여자였으니까요.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무고(巫蠱)의 옥(獄) ( 1701년 )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사사(사약을 받아 자결함)합니다. 남인 세력도 이 사건에 휘말려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장희빈의 아들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0대 왕 경종이 되었으나 건강악화로 즉위한지 4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경종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고, 우울증을 비롯한 마음의 병으로 건강이 악화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이 사망한 후 경종을 부쩍 경계하고 미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숙종의 태도와 장희빈의 죽음에 대한 상처가 경종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경궁을 떠나며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숙종의 삼각관계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역사가들은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이러한 비극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서로를 향해 지나칠 정도의 질투심을 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숙종 또한 장희빈에 대한 감정에 사로잡혀 인현왕후를 등한시하고 나라를 올바르게 경영하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부부 간의 신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기 전에,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감정을 추슬렀다면 어땠을까요? 결국 뜻하지 않은 하나의 감정이 서로의 마음에 불신을 불러일으키고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를 만들어 냅니다. 사랑은 단연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불타는 감정이지만, 부부관계는 한쪽의 유별난 감정으로 파괴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서로가 관계에 대해 보다 신중했다면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끊임없이 회자되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런지도 모릅니다.

아이와 함께 마무리 OX 퀴즈

장희빈이 머물던 장소는 통명전이다. ( O / X )

인현왕후는 남인, 장희빈은 서인 세력에 속해 있었다. ( O / X )

숙종은 인현왕후를 궁궐에서 쫓아낸 것을 후회했다. ( O / X )

퀴즈 정답은 주변 둘러만한 곳 코너 아랫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 둘러볼만한 곳

(1) 북촌한옥마을 과거 조선시대 고위관리나 왕족들이 살았던 한양의 고급주거지였습니다. 일제 시대때 집들이 축소되어 지금은 조밀조밀하게 조인 아담한 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옛 동네의 분위기를 느끼며 구경을 하기에도 좋은 장소입니다.

(2)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내부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온실입니다. 주로 남부지방의 자생식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3) 대학로 과거 서울대의 부지가 있던 장소라 하여 유래된 명칭. 서울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극, 뮤지컬 공연이 성행하는 대표적인 문화 예술의 거리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X , X , O

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이미지숫자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

자료협조
국립 고궁 박물관, 명성황후 기념관, 국립문화연구소, 서울역사박물관, 창경궁 홈페이지
글,사진
강민석
일러스트
조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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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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