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아버지와 아들의 비정한 가족사, 경복궁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육룡이 나르샤, 조선을 삼키다. 경복궁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육룡이 나르샤, 조선을 삼키다. 경복궁

탐방 길라잡이

경복궁 코스구성

경복궁은 서울에 남아있는 다섯 개의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의 법궁(法宮)입니다. 법궁은 ‘으뜸가는 궁’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머무는 궁궐을 뜻합니다.

경복궁을 건설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세운 삼봉 정도전입니다. 그는 조선이 큰 복을 누리며 영원히 번영하라는 의미로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고 맙니다.

최근 종영한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 건국기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극중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스승이었던 정도전, 아버지 이성계와 대립하게 됩니다. 드라마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이방원의 권력욕은 조선 건국 초기,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이방원은 결국 아버지와 원수지간이 되어버렸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새 나라, 조선을 세우기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았던 아버지와 아들은 어쩌다가 원수지간이 되어버린 걸까요? 조선의 법궁, 경복궁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벼랑 끝에 선 왕자, 이방원 - 광화문(光化門)

광화문 이미지

1392년, 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 나라 조선을 세웠습니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에 머물던 태조는 부패하고 무능했던 고려의 흔적을 떨쳐내기 위해, 새로운 도읍지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했습니다.

태조는 자신을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에게 새로운 왕궁의 건설을 맡겼습니다. 정도전은 경복궁을 설계하였으며 중요한 건물의 이름을 직접 붙였습니다. 태조는 그만큼 정도전을 신뢰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계를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왕이 아니라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들이 경영하는 나라를 꿈꿨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토론과 설득을 통해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나라. 그것이 정도전이 설계한 새 나라 조선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자들을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여섯 명의 아들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한씨 소생인 여섯 아들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특히 태조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시해하는 등 조선 건국의 선봉장 역할을 했습니다. 이방원과 왕자들은 자신들이 공을 세운 만큼 상응하는 대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개국한 후에도 거느리던 사병들을 해산하지 않았고, 왕족으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정치에 참여하려 했습니다.

정도전은 유학자들이 경영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선, 왕자들의 강력한 권력을 빼앗아 그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도전은 이방원과 왕자들의 사병을 강제로 해산하는 ‘사병혁파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태조는 정도전의 뜻에 적극 동의하며 왕자들을 압박했습니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고, 반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 이후 아버지로부터 줄곧 외면당해왔습니다. 그는 다른 왕자들 보다 유난히 권력욕이 강해서 개국 초기부터 세자의 자리를 탐내 왔습니다. 자신이 건국 과정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태조는 그런 이방원을 후계자 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되려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내려 했습니다.

경복궁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임금이 드나드는 문으로,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한양 천도 후, 이성계와 왕자들은 이 문을 통해 처음으로 경복궁에 발을 들였습니다. 아마 그 때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가 되리라 확신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방원이 아닌 다른 왕자를 점찍어 두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태조 이성계 이미지

태조 이성계 ( 1335 ~ 1408 )

고려 말, 북쪽 변방의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당시 고려는 부패한 귀족과 관료들의 횡포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요동 땅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으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진격했습니다. 고려의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 이방원 ( 1367 ~ 1422 )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왕위에 올라 조선의3대 왕 태종이 되었습니다. 수하인 조영규를 시켜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등 조선 건국 과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밀려난 뒤 앙심을 품고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고 불합리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정도전 이미지

정도전 ( 1342 ~ 1398 )

태조 이성계를 보좌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성리학을 갈고 닦은 유학자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법과 제도, 정치체계를 설계했습니다. 왕이 독단적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과 신하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통치방법을 구상했습니다.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조선경국전을 집필하는 등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공을 세웠으나 태종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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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수문장 체험하기 이미지

광화문 수문장 체험하기

광화문 안으로 들어서면 과거 경복궁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입던 전통 복식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수문장들이 썼던 모자와 옷, 혁띠, 신발 등을 직접 착용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전통복장을 입고 조선 건국 초기, 경복궁에 머물던 수문장이 된 것처럼 역할극을 해 봅시다.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왔다는 설정을 주고, 사극 말투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겁니다. 아이는 보다 생생하고 재밌는 역사탐방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를 해치고 손에 넣은 권력 - 영추문(迎秋門)

영추문 이미지

태조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얻은 방번과 방석 형제를 유난히 총애했습니다. 그는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여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정도전은 한씨 소생의 왕자들 보다는 나이 어린 방석이 세자에 적합하다고 여겼기에 태조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여섯 왕자들은 사병혁파 정책으로 잔뜩 화가 나 있던 차에 세자 책봉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장 분노한 이는 이방원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터트리며 형제들을 설득해 정변을 모의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세자가 되리라 결심한 것입니다.

태조 7년(1398년),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경복궁을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방번, 방석 형제와 그들을 지지하던 정도전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이 사건을 ‘1차 왕자의 난’이라 부릅니다.

어머니가 다르다고 해도 방석, 방번 형제는 이방원가 같은 아버지를 둔 혈육입니다. 그러나 이방원은 자신의 권력욕과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비뚤어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골육상잔의 비극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1차 완자의 난' 일러스트

경복궁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영추문은 원래 신하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그러나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후에는 세자였던 방석이 이 문을 통해 경복궁을 나섰습니다. 방석은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채 영추문을 지나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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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교에서 기념사진 찍기

영제교에서 기념사진 찍기

광화문을 지나 홍례문을 거처 궁궐 안으로 들어오면 좁은 개천 위로 이어진 다리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이 다리의 이름은 영제교(永濟橋)로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처야 하는 곳입니다. 다리는 총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길은 오직 왕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경복궁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태조 이성계도 가운데 길을 통해 다리를 건넜습니다. 아이와 함께 영제교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봅시다. 마치 왕이 된 것처럼 가운데 길에서 근엄한 포즈를 취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원수가 된 아버지와 아들 - 근정전(勤政殿)

근정전 이미지

태조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아끼던 방번, 방석까지 살해한 왕자들의 행태에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방원과 왕자들이 조정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였습니다. 태조는 왕이었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방원은 태조의 둘째 아들 이방과를 세자로 추대했습니다. 형제를 죽이고 바로 왕위를 넘겨받게 되면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태조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고향인 함경도 함흥으로 떠났습니다.

이방과는 태조의 뒤를 이어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종입니다. 정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격구와 사냥을 즐기며 소일했습니다. 나라 안의 대소사는 왕자들의 우두머리인 이방원이 결정했습니다.

조선은 한동안 평화를 되찾는 듯 했으나, 정종과 왕비인 정안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서 다시 분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자의 자리를 두고 이방원과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이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사병을 이끌고 개경에서 싸움을 벌였고, 이방원이 승리를 거두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입니다. 이방원은 이방간을 죽이는 대신 귀양을 보내 목숨은 부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한 번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기는 싫었던 모양입니다. 이방원은 정종에게서 양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받아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이 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중심에 자리잡은 근정전은 궐 안의 수많은 건물 중 으뜸가는 곳으로,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고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하던 장소입니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왕이 된 태종은 이 근정전에 앉아 문무백관들을 거느렸을 겁니다.

원하던 바를 이룬 태종은 행복했을까요? 그는 근정전에 오르기 위해 아버지와 등을 돌리고 형제들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꿈을 이룬 즐거움 보다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슬픔이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정종 이미지

정종 ( 1398 ~ 1400 )

조선의 2대 왕으로, 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 건국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비며 무인으로서 공을 세웠습니다. 재위기간 동안 실질적인 통치는 동생인 이방원에게 일임하고 정치와 거리를 둔 생활을 했습니다.

[사진 - 정종안릉 : 고려 정종의 무덤_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닭 조각상 찾기

닭 조각상 찾기

근정전 주변에는 전설 속에 나오는 청룡, 주작, 현무, 백호를 비롯한 사신(四神)과 십이지신(十二支神)이라 일컬어 지는 열 두 동물의 석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석상들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잡스러운 귀신들을 쫓아내고, 나라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십이지신중 닭은 예로부터 울음소리로 새벽이 왔음을 알려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고, 밝은 기운을 불러들이는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중국에서는 희망찬 출발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경복궁에 닭 조각상을 설치한 데에는 새롭게 출발하는 조선의 앞날을 축복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근정전 주변을 둘러보며 닭 조각상 찾기 놀이를 해 봅시다.

아버지의 인정을 바랐던 아들, 아버지의 뜻을 새기다. - 경회루(慶會樓)

경회루 이미지

함흥에 머물던 태조는 태종에게 품었던 분노를 쉽게 풀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함흥으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습니다. 태조는 그들이 나타나는 족족 직접 활을 쏘아 죽였는데, 여기에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흐른 뒤, 태조는 돌연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태종은 마침내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생각하고 기쁜 마음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태조는 멀리 서 있는 태종을 보고 문득 화가 치밀어 올라 활을 꺼내 쏘았습니다. 태조는 고려의 장수였던 시절부터 신궁(神弓)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태종은 기둥 뒤로 몸을 피해 간발의 차로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태조는 같은 날 열린 연회 자리에서도 태종을 죽이려 했습니다. 불시에 철퇴를 꺼내 태종을 내리 친 것입니다. 태종은 곤룡포 안에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암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태조는 태종이 왕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들을 인정하게 된 태조는 한양에 머물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름다운 연못 위에 섬처럼 고고히 세워져 있는 경회루는 태종에 의해 세워진 건물입니다. 태종은 정도전이 세운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 사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회루라는 이름 속에는 기울어진 것을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을 편안케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태종은 경회루의 뜻처럼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등 나라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습니다.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도록, 재위기간 내내 전력을 쏟은 것입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경회루의 현판

경회루의 현판을 쓴 양녕대군

경회루의 현판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 썼습니다. 양녕은 어린 시절부터 사냥을 즐기고 기생과 어울려 노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태종은 이런 양녕의 태도가 왕위를 물려받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여겨 수시로 꾸지람을 하곤 했습니다. 부자간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고 결국 태종은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던 태종이 이제는 반대의 입장이 된 것입니다. 다행이 왕좌에 뜻이 없었던 양녕은 태종처럼 골육상쟁의 비극을 일으키지 않았고, 충녕대군은 왕위에 올라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경복궁을 떠나며

태종은 조선의 긴 역사 속에 손꼽히는 뛰어난 왕 중 한 명입니다. 세종대왕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였던 태종이 나라의 기반을 잘 닦아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종은 정당한 방법이 아닌 폭력과 패륜으로 왕의 자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태종에게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욕을 억제하지 못해서 벌어진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태조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애초에 그가 아들의 공을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조선의 시작은 한결 평화롭고 아름다웠을 겁니다.

아이와 함께 마무리 OX 퀴즈

이성계는 원래 고려의 왕족이었다. ( O / X )

경복궁을 건설하고 건물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다. ( O / X )

이방원에 의해 세자의 지위를 빼앗긴 이방석은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 밖으로 쫓겨났다. ( O / X )

정도전은 조선을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고 싶었다. ( O / X )

이성계는 피를 나눈 형제를 제 손으로 죽인 이방원이 싫어서 함경도 함흥에 칩거했다. ( O / X )

이성계는 끝까지 이방원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O / X )

퀴즈 정답은 주변 둘러만한 곳 코너 아랫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 둘러볼만한 곳

(1) 국립 고궁박물관 경복궁 내에 자리 잡고 있는 박물관으로 서울에 남아있던 조선의 궁궐에 분산되어 있던 문화재를 집대성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2) 국립 민속박물관 한국의 민속문화와 한민족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청동기 시대와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물, 역사적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3)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으로 과천, 덕수궁에 이어 2013년 세 번째로 개관했습니다. 다양한 미술 전시회와 야외 설치미술 작품을 즐길 수 있으며 영화 상영관과 푸드코트, 카페테리아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X , O , X , X , O ,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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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협조
국립 고궁 박물관, 국립문화연구소, 서울역사박물관, 경복궁 홈페이지
강민석
일러스트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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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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