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나라와 가정의 안녕을 꿈 꾼 아버지 고종의 눈물, 덕수궁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막강한 황제와 든든한 아버지를 꿈꾸었던 고종의 눈물, 덕수궁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막강한 황제와 든든한 아버지를 꿈꾸었던 고종의 눈물, 덕수궁

탐방 길라잡이

덕수궁 코스구성

덕수궁(德壽宮))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예전에 이 자리에는 조선 9대 왕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4대 왕 선조가 이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궐로 승격되었습니다.
덕수궁은 조선 26대 왕 고종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외세의 압박에 시달린 비운의 왕입니다. 그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열강들에 못지않은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의 재위기간 동안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았습니다. 결국 일본과의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은 한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속에 있던 조선의 마지막 왕궁입니다.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만백성의 아버지였던 고종은 바로 이곳에서 저물어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아내를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경운궁으로 돌아오다 - 대한문(大漢門)

대한문(大漢門) 이미지

9세기 말.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은 호시탐탐 조선의 주권을 노리고 있었으나 쇠약해진 국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안동김씨의 오랜 세도정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전 세계적인 근대화의 흐름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고종은 조선의 왕으로서 열강들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은 아내인 명성왕후였습니다. 한때 고종과 명성왕후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명성왕후와 그녀의 친정인 민씨 일가가 정권을 잡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통에 나라 안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을 향한 열강들의 야욕이 심해지자 두 사람은 힘을 모아 외세에 대항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음으로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오랫동안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청나라 세력은 물러가고, 일본에 호의적인 신하들이 조정을 가득 채웠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등 유럽 3국은 예전부터 일본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해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위기에 몰린 일본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저질러선 안 될, 끔찍한 일을 벌이고 맙니다. 자객들을 보내 조선의 대표적인 반일인사였던 명성왕후를 살해한 것입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즉시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병사들의 보호 하에 훗날 27대 왕 순종이 되는 아들 이척을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고종은 하루아침에 아내인 명성왕후를 잃었고 제대로 장례조차 치러주지 못했습니다. 그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일본에 맞섰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김홍집, 유길준 등 친일파 신료들을 조정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서 일본의 영향력은 잠시나마 약해졌지만, 그들은 조선에 대한 욕심을 거두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1897년, 고종은 아들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고종과 그의 아들 이척은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仁化文)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문이 오늘날 덕수궁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대한문(大漢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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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조약 ( 1895년 4월 17일 )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맺어진 조약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며, 랴오둥(요동) 반도, 타이완을 일본에게 양도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 조약은 아시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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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수문장 교대식 관람하기

왕궁수문장 교대식 관람하기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3회에(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 / 월요일 및 혹서기, 혹한기, 눈, 비 오는 날 휴무) 걸쳐 왕궁수문장 교대식 행사가 열립니다. 고종이 덕수궁에 머무르던 그 시절, 거행되었던 수문장 교대식이 고스란히 재연됩니다.
아이와 함께 수문장 교대식을 관람하며 조선 말,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껴 봅시다.

암살 위협에 빠진 고종과 그의 아들 - 석조전(石造殿)

석조전(石造殿) 이미지

경운궁에 돌아온 고종은 나라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습니다. 고종은 스스로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했습니다.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죽은 명성왕후도 황후로 추존(죽은 이에게 살아있을 때 보다 높은 칭호를 부여함)되었습니다. 고종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넋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고종은 옛 법을 근본으로 삼고 새로운 것을 더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기본 정신으로 삼고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무개혁(光武改革)입니다.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개혁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황제를 비롯한 신하들의 복장도 서구식으로 바뀌었고, 전화와 철도가 도입되는 등 조선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나갔습니다.

고종의 거침없는 행보에 가장 심기가 불편해 진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조선의 주권을 노리는 그들에게 자립의지를 온 세상에 알린 고종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을 추종하는 대한제국 내의 친일파들도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898년, 고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는 친일파에 의한 암살기도가 있었습니다. 고종의 목숨을 노리고 독이 든 커피를 내놓았는데, 그 아들인 이척이 희생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척은 이빨이 모두 빠지고 심한 몸살을 앓는 등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고종은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00년 착공되어 1910년에 완성된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의 개혁의지를 잘 보여주는 건물입니다. 영국인들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건물로, 당시 조선에 세워진 서양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전해집니다. 고종은 석조전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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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기둥에서 르네상스의 흔적 찾기

석조전은 그리스 풍의 신 고전주의 양식에 르네상스를 가미하여 만들어진 건축물입니다. 고종은 이러한 서양건축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성장시키고자 했습니다. 석조전 기둥을 보다 보면, 아름다운 이오니아식 주두(기둥 위에 얹혀져 건축물을 위 아래로 지탱하는 부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이오니아식 주두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덕수궁에서 르네상스의 흔적을 찾는 독특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굴욕적인 양위식, 이름 뿐인 왕이 된 고종의 아들 순종 - 중화전(中和殿)

중화전(中和殿) 이미지

1904년,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에 의지해 주권을 회복한 고종의 입장에서 이 전쟁은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전이었습니다.
1년간 지속된 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한반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그 해, 경운궁에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함녕전을 비롯한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탔고 고종의 명에 의해 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잣거리에는 이 화재가 일본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진실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05년,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고종과 신하들을 압박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맡긴다는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주요 대신 8명 중 5명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며, 이 날 맺어진 조약이 바로 *을사조약(乙巳條約)입니다.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결국 나라의 주권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절박해진 고종은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해 맺어진 부당한 조약임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세 특사는 회의에 참석해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이완용, 송병준 등 대한제국의 친일 대신들을 내세워 고종의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고종은 그들에 맞서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1907년, 세자 이척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덕수궁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중화전(中和門)은 왕의 즉위식이나 가례식,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가 열렸던 중요한 건물입니다. 한때 이곳에서 신하들을 호령했던 고종은 이곳에서 일본의 강요 하에 굴욕적인 양위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이 된 아들을 보며, 고종은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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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乙巳條約) ( 1905년 11월 17일 )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전, 사전 조치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체결된 것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일본이 파견한 통감이 외교 및 내정 전반을 담당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의 강요로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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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쌍룡 인증샷 찍기

중화전의 쌍룡 인증샷 찍기

중화전 내부를 보다 보면,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두 마리 용(龍)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용은 덕수궁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에는 봉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용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만든 것입니다. 황제가 머무는 곳이니, 그 위상에 걸맞는 쌍룡으로 치장한 것입니다. 중화전 천정에서 쌍룡을 찾아 인증샷을 찍으며,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 돋음 한 대한제국의 위엄을 느껴 봅시다.

늦둥이 딸 덕혜옹주의 탄생, 그리고 고종의 죽음 - 함녕전(咸寧殿)

함녕전(咸寧殿) 이미지

이척은 고종의 양위로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순종이 되었습니다. 순종은 어릴 때부터 유약한 성품과 병약한 몸으로 왕실의 걱정을 샀습니다. 그는 일찌감치 어머니 명성황후를 잃고, 아버지와 함께 아관파천을 겪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종은 여러 모로 부족한 순종이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해왔다고 전해집니다. 때로는 엄하게 질책하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순종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지는 못했지만 효심만큼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습니다. 순종은 비록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고종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오히려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꼈을 런지도 모릅니다.

꼭두각시 순종 일러스트

순종은 재위기간 내내 일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실권이 없는 꼭두각시 황제였습니다. 1910년, 일본은 그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순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고, 결국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대신 서명했습니다. 이로서 일본은 대한제국을 통째로 손에 넣었습니다. 600여 년간 지속된 조선의 명맥은 이렇듯 허무하게 끊어졌습니다.

이제 한반도는 일본에서 파견된 초대 총독 데라우치 미사타케가 통치하는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순종을 이왕(李王)이라 부르며 창덕궁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덕수궁에서, 순종은 창덕궁에서 유배나 다름없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1912년, 덕수궁이 오랜만에 활기를 띄었습니다. 고종과 궁녀 양귀인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널리 알려진 덕혜옹주입니다. 고종은 몹시 기뻐하며 출산 당일 산모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출산 후 7일이 지난 다음에 산모를 만나는 것이 전통이었으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순종과 왕비도 덕혜옹주를 보러 덕수궁으로 행차하면서 부자간의 만남이 이루어 졌습니다. 고종은 순종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함께 덕혜옹주를 보았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두 사람에게는 오랜만에 갖는 편안하고 따스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종은 1919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에 그의 죽음은 숱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본에 의한 독살설도 신빙성을 얻고 있습니다.

순종은 1925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과 이웃한 유릉에 묻혔습니다. 조선 말, 험난한 역사를 함께 헤쳐 온 가족은 그렇게 죽은 후에야 함께 안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양위 후 머물렀던 건물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지켜보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때나마 나라의 부흥을 꿈꿨던 고종에게 함녕전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나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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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1874〜1926)과 덕혜옹주(1912〜1989)

순종(1874∼1926)과 덕혜옹주(1912∼1989)

순종 :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의 27대 왕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나 한 살이 되던 해에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황제에 오른 뒤 일본의 압력으로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나라를 통째로 넘겨 준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덕혜옹주 : 고종이 궁녀였던 복녕당(福寧堂) 양씨를 통해 얻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입니다. 소학교 5학년 무렵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뒤 정신질환을 앓고, 딸이 투신자살을 하는 등 슬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1960년대에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창경궁 수강재에 칩거했습니다.

덕수궁을 떠나며

고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도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나라를 망하게 만든 무능한 왕이라며 손가락질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근대화를 앞당겨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개혁군주라고 칭송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고종이 외세의 압박에 맞서 끝까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설립하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해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려 하는 등 주권을 되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고종이 끝까지 저항한 이유는 아마도 가족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한 가족의 아버지였고, 동시에 만백성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대한제국은 멸망했지만 가족과 백성을 생각하는 고종의 애절한 마음만큼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마무리 OX 퀴즈

고종은 일본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 O / X )

순종은 어린 시절부터 건강했고 머리가 총명해서 왕실의 기대를 모았다. ( O / X )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 O / X )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다. ( O / X )

순종은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 O / X )

명성황후는 독이 든 커피를 먹고 목숨을 잃었다. ( O / X )

퀴즈 정답은 주변 둘러만한 곳 코너 아랫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 둘러볼만한 곳

(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세계와 한국의 근, 현대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입니다. 이 건물은 1938년 개관한 최초의 근대식 박물관이었으며, 그 당시에는 주로 조선시대 미술품이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개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으며, 2004년 국가 등록문화재 8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에서 설립한 미술관으로 다양한 기획전과 국내, 해외미술의 동향을 알려주는 전시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습니다. 학생, 직장인, 공무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음악공연과 같은 대중적인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3) 구 러시아 공사관 터 1890년 준공되었으며,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잠시 몸을 위탁했던 아관파천의 주 무대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탑과 지하2층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4) 중명전 덕수궁의 별채로 궁 외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경운궁 대화재 이후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X , X , O , O , O ,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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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협조
국립 고궁 박물관, 명성황후 기념관, 국립문화연구소, 서울역사박물관, 덕수궁 홈페이지
글,사진
강민석
일러스트
조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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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5-0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