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조선 최고의 명필을 따라 제주를 걷다, 추사 유배길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조선 최고의 명필을 따라 제주를 걷다, 추사 김정희 유배길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조선 최고의 명필을 따라 제주를 걷다, 추사 김정희 유배길

탐방 길라잡이

코스구성

추사 (秋史) 김정희 (1786 ~ 1856 )

우리에게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를 풍미했던 명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옛 한나라의 서체를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김정희는 서예가로서의 명성 못지않게 실학자로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청나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자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김정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제주도입니다. 오늘날 제주도는 푸른 바다와 한라산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사랑 받고 있습니다. 김정희가 살던 시대에 제주도는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롭고 척박한 유배지였습니다. 김정희는 이 섬에 머물면서 무수한 글과 그림을 남겼고, 예술가로서 불멸의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가혹한 유배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걸까요?
지금부터 제주도에 남아있는 김정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덕수궁은 한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속에 있던 조선의 마지막 왕궁입니다.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만백성의 아버지였던 고종은 바로 이곳에서 저물어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금수저에 엄친아였던 유년시절 - 제주 추사관

제주 추사관

추사 김정희는 정조 10년(1786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증조할머니는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공주로, 영조가 유난히 아꼈던 자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희는 요샛말로 하면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태어난 셈입니다.

김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해서 집 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서예에 관한 재능도 일찌감치드러냈습니다. 어느 봄 날, 김정희가 봄을 맞아 입춘접(봄을 맞아 집안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지나가던 체제공이 우연히 보고 놀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체제공은 ‘이 아이는 글씨로 대성하겠으나 그 길을 가게 되면 인생이 몹시 고달퍼 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김정희의 부모는 이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훗날, 이 예언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김정희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무렵, 조선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에서 선진문물이 유입되면서 윤리도덕과 예절을 중시하는 성리학 대신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학, 역사학, 지리학 등 실용적인 학문을 통틀어 실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정희의 스승은 실학 열풍의 선두에 서 있던 박제가였습니다. 북학의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박제가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정희는 박제가의 영향을 받아 한 명의 실학자로 성장했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추사관에는 김정희가 어린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 까지 평생 남긴 글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정읍은 김정희가 말년에 유배생활을 한 곳입니다. 흔히 제주도 하면 끝없이 뻗은 바다와 아름다운 해변의 정취를 떠올리는데, 대정읍은 넓은 논과 밭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입니다. 겉보기에는 육지의 여느 시골마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길게 이어진 돌담과 마을 초입에 우뚝 서 있는 돌하르방을 만나고 나면 비로소 제주도에 왔다는 실감이 납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체제공 (1776 ~ 180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조와 정조를 모두 보좌한 명 재상입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 할 때 목숨을 걸고 이를 반대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조 재위기간에는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맡으며 나라의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정조를 도와 탕평책(당파와 상관없이 실력이 뛰어난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수원 화성의 축조에도 관여해서 공을 세웠습니다.

박제가

박제가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실학자입니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 밑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와 화폐제도의 활성화, 상업, 무역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청나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저사 북학의를 집필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추사체 따라 해 보기

추사체 따라 해 보기

추사관에는 추사가 직접 쓴 편지와 현판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패드를 이용해 아이와 함께 추사의 글씨를 따라 써 봅시다. 추사체는 ‘그림 같은 글씨’라 불릴 만큼 개성 있고 친근한 것이 특징입니다. 한자를 어려워하거나 낯설어 하는 아이라도 추사체를 흉내 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김정희를 유배 가게 만든 장본인은 안동 김씨? - 김정희 유배지

김정희 유배지 이미지

순조 9년(1809년), 김정희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최고의 학자인 완원과 옹방강을 만났고, 그들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완원은 오래된 서책과 글씨를 탐구하는 고증학의 대가였고, 옹방강은 옛 사람들이 비석에 새긴 글을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김정희는 그들로부터 고증학과 금석학의 정수를 배워 조선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우리의 옛 비석과 글씨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북한산에 무학대사가 남긴 것이라 일컬어 지던 비석이 있었는데, 김정희가 연구를 통해 그것이 신라시대에 진흥왕이 남긴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김정희는 연구와 공부를 병행하며 어느 한 쪽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서른 네 살 되던 해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규장각 대교를 거처 충청도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하기 까지, 그의 인생은 한동안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정희 유배지 이미지

순조 30년(1830년),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휘말려 관직을 잃고 고금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면서 김정희의 삶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옵니다. 당시 조선은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조정의 문신이었던 윤상도는 안동 김씨의 횡포에 분노하여 그들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안동 김씨는 윤상도를 옥에 가두고 관련된 자들을 모두 잡아 들였습니다. 그 중에는 윤상도 집안과 절친한 사이였던 김노경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김노경이 윤상도를 도왔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떠나게 되자 아들인 김정희도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김정희를 평생 동안 괴롭힌 안동 김씨와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들은 언제든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습니다. 안동 김씨는 실학자들과 대립하는 보수적인 성리학자 세력의 중심이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안동 김씨의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하고, 사회를 합리적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실학자들은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순조는 김노경을 안타깝게 여겨 그를 풀어주도록 지시했습니다. 김정희도 다시 조정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조참의와 형조참판을 역임하는 등 중요한 관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김정희가 높은 관직에 올라 갈수록, 안동 김씨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또 다시 ‘윤상도의 옥사’ 사건을 끄집어내어 김정희를 공격했습니다. 윤상도가 쓴 상소문의 초안을 김정희가 썼다는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결국 김정희는 머나 먼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추사관을 둘러 보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낡은 초가집 몇 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옛날 김정희가 머물던 거처를 그대로 재연해 놓은 것입니다.
거처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바리게이트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대문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대문인 ‘정낭’입니다. 구멍 뚫린 돌을 양 옆에 세워놓고 가로로 기다란 나무를 끼워 놓은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단촐한 모습 속에서 제주도 특유의 소박한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아왔던 김정희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제주도에 홀로 남겨진 김정희에게는 소박하고 초라한 유배지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제주도의 변덕스러운 날씨도, 넓은 들판과 불쑥 솟아오른 오름(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용암과 재가 쌓여 만들어진 산)이 어우러진 풍경도 모두 낯설게만 느껴졌을 겁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

고증학은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까지 유행했던 학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직면했을 때 실험과 연구를 거쳐 얻어 낸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답을 찾는 태도를 중시합니다. 금석학은 고증학의 한 갈래로, 옛 사람들이 남긴 쇠로 만들어진 그릇, 기구와 비석에 적힌 글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아내를 잃고 쓰다 - 남문지못

남문지못

조선시대 유배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과 유배지 간의 거리였습니다. 죄가 가벼우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유배를 보냈고 무거우면 가장 먼 곳으로 보냈습니다. 제주도는 가장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만 보내지는 유배지였습니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는 것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유배생활. 김정희는 오직 아내를 생각하며 그 고된 나날을 견뎠습니다. 그들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김정희는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집사람이 평안하고, 더욱 몸을 돌보면서 이전보다 더 보전해야 이천 리 바다 밖에 있는 내 마음이 위로가 될 겁니다’라는 구절 속에는 자신보다 아내를 더 걱정했던 김정희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정희는 아내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유배생활 중에 아내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김정희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바치는 글을 보내 그녀의 영전에서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장난으로 말하기를, 부인은 죽어도 나보다 늦게 죽어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부인은 크게 놀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며 즉시 귀를 막고 멀리 달아나 듣지 않으려 하였소. 이는 참으로 세속 부녀자들이 크게 꺼린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경우가 많았으니 내 말이 다 장난만은 아니었소. 이제 끝내 부인이 먼저 죽어 나로 하여금 홀아비로 살게 했으니, 푸른 바다 넓은 하늘에 한이 끝없이 사무치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죄인의 신분이었던 김정희는 아내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하고 홀로 슬픔을 삼켜야 했습니다. 부유하고 평탄한 삶도, 관리로서의 명예도 잃어버렸는데 사랑하는 사람마저 떠나 보냈으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행인 것은, 김정희를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김정희에게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글씨, 그림을 가르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나 먼 제주도까지 기꺼이 찾아와 말동무를 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조선시대 남종화(당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풍경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도 있었습니다.

허련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후손으로, 김정희로부터 그림을 배워 기초를 닦았습니다. 혀련은 스승이 죄인이 된 후에도 제주도를 드나들며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김정희는 혀련의 그림이 뛰어나다며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김정희의 모습 일러스트

추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남문지못에는 허련이 그린 김정희의 초상화,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이 남아있습니다. 그림 속 김정희는 속세를 떠나 초야에 파묻혀 사는 도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한 연못과 고즈넉한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이 그림의 정취를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김정희는 이곳에서 허련을 비롯한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고된 유배생활 속 작은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김정희는 그런 만남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추슬렀습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을사조약(乙巳條約) ( 1905년 11월 17일 )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전, 사전 조치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체결된 것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일본이 파견한 통감이 외교 및 내정 전반을 담당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의 강요로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남종화 (南宗畵)

중국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산수화의 한 양식입니다. 남종화가로 분류되는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산수화(채색 없이 먹만을 사용해서 자연경관을 그린 풍경화)의 양식을 통틀어서 남종화로 부르고 있습니다. 흔히 남종화가라 분류되는 사람들은 직업 화가가 아니라 선비나 관리 등 문인이었습니다. 남종화는 18세기에 조선으로 유입되어 김홍도, 이인문, 김응환 등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김정희와 허련, 정수영 등의 문인화가가 남종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조선 후기의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도 남종화를 즐겨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정자에서 그림 그리기

정자에서 그림 그리기

정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며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려 봅시다. 그 옛날 허련이 김정희를 그려 주었을 때처럼 종이와 붓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면 더 뜻 깊은 경험이 될 겁니다. 아이에게 김정희의 초상화를 흉내 내어 아빠의 초상화를 그려보게 하는 건 어떨까요? 아빠가 그림 속 김정희처럼 도인 흉내를 내거나 코믹한 포즈를 취해주면 아이가 더 재미있어 할 겁니다.

제주 소나무에서 탄생한 걸작, ‘세한도’ - 대정향교

대정향교

김정희라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한도(歲寒圖)와 그만의 고유한 서체인 추사체입니다. 두 가지 업적은 모두 유배지에서 탄생했습니다.

세한도

오늘날 조선시대 수묵화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는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보낸 그림입니다. 이상적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역관으로, 청나라를 넘나들며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했던 인물입니다. 김정희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로운 이상적의 성품이 소나무를 닮았다며 추운 겨울 우뚝 선 소나무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허허 벌판에 소나무와 집 한 채만이 우뚝 서 있는 풍경이 인상적입니다. 김정희가 자신이 머무는 유배지의 풍경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제주도에는 소나무가 많은 고장입니다. 김정희의 유배지 주변에서도 무성히 자란 소나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소나무 중 특히 유명한 것이 곰솔입니다. 해안지방에 서식하는 나무로, 나뭇가지가 검은색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며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김정희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자신의 꿋꿋함을 곰솔에 빗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사체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서체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에 김정희만 이러한 글씨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예전의 부드러운 서체와 달리, 추사체는 글씨가 각지고 그 곡선의 각도가 급격히 변화합니다. 김정희는 젊었을 때부터 고증학과 금석학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해 옛 한(漢)나라의 글씨를 연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연구 끝에 맺은 결실이 바로 추사체입니다.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탁 트인 들판을 거닐다 보면, 우뚝 솟은 오름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김정희가 즐겨 찾았던 단산(簞山)입니다. 높이는 낮지만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너른 들판에 혼자 솟아오른 모습이 이마에 난 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산은 대부분 이와 같아서 육지의 산과는 다른 낯설고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김정희도 그런 독특한 풍경이 재미 있어서 단산을 자주 찾았던 게 아닐까요?

단산 아래에는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정희가 잠시 들러 학생들을 가르치곤 했던 대정향교(大靜鄕校)입니다. 이곳의 의문당(疑問堂)이라는 건물에는 김정희가 직접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명륜당(明倫堂) 뒤에 모여있는 소나무가 세한도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하니, 대정향교는 여러모로 김정희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정희는 말년에 제주도를 떠나 함경도 북청으로 또 한 차례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이번에도 안동 김씨 세력의 소행이었습니다. 김정희는 자신이 그린 세한도 속의 소나무처럼 꿋꿋이 버텼고, 예순 여덟의 나이에 유배생활을 끝마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머물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방사탑에 소원 빌기

방사탑에 소원 빌기

대정향교를 향해 걷다 보면 들판에 서 있는 낮은 돌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그란 물 컵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가 독특하고, 탑 위에 올려놓은 사람 형상의 돌이 인상적입니다. 이 탑의 이름은 방사탑(防邪塔)으로,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향토유산이기도 합니다. 방사탑이 있는 시골길은 김정희가 물을 길어오기 위해 매일같이 다니던 길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듯 김정희도 방사탑에 육지에 있는 가족들이 평온하기를 기원했을 겁니다. 아이와 함께 방사탑을 바라보며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해 봅시다.

제주도를 떠나며

제주도

오늘날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손쉽게 제주도로 갈 수 있습니다. 김정희가 살던 조선시대에는 배가 제주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크고 빠른 배도 없던 시절이라 육지에서 제주도까지 간다는 것은 거센 풍랑을 헤치고 목숨을 건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제주도로 가던 도중에 배가 뒤집혀서 사람이 죽고 실종되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주도로 가기 전, 김정희는 절망했을 겁니다. 살아서 유배지에 도착한다고 해도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김정희는 절망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그 동안 발휘하지 못한 예술을 향한 열정을 마음껏 쏟아냈고, 우리가 역사책에서 마주하게 되는 눈부신 업적을 쌓았습니다. 험난한 유배지에서 인생의 가장 눈부신 한 때를 보낸 것입니다.

김정희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위기와 시련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김정희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시련을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눈부신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인생이라는 거친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이와 함께 마무리 OX 퀴즈

안동 김씨 세력은 김정희의 가문과 절친한 관계였다. ( O / X )

실학은 과학, 지리학, 역사학 등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학문을 뜻한다. ( O / X )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숨을 거두었다. ( O / X )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선물로 그려 준 작품이다. ( O / X )

퀴즈 정답은 주변 둘러만한 곳 코너 아랫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 둘러볼만한 곳

(1) 모슬포항 제주도 남서부의 대표적인 항구입니다. 방파제와 정박한 선박들, 넓은 규모의 수산물 위판장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모슬포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용의 머리를 연상케 하는 용머리 해안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슬포항 주변으로 신선한 횟감을 맛 볼 수 있는 식당, 각종 위락시설도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2) 제주 조각공원 1987년에 개관한 공원으로, 13만 평에 달하는 제주의 원시림 한복판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예술,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국내 유명 작가들이 출품한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주의 상징인 한라산과 한반도 최 남단의 마라도 등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X , O , X ,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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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협조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지, 위키피디아
글,사진
강민석
일러스트
우유(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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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5-3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