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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길라잡이

자주국방을 꿈 꾼 조선의 두 왕의 발자취, 강화도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자주국방을 꿈 꾼 조선의 두 왕의 발자취, 강화도
역사탐방 길라잡이 시즌3. 자주국방을 꿈 꾼 조선의 두 왕의 발자취, 강화도

탐방 길라잡이

코스구성

인조는 조선 왕조 600년 역사 중 가장 무능했던 왕으로 손꼽힙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조선은 청나라와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청나라에 붙잡혀 갔고,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또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조선의 숱한 임금 중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인조와 효종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주 국방을 꿈꿨다는 점입니다. 인조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효종은 진정한 자주국방을 위해선 북벌(北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강화도는 인조와 효종이 모두 중요하게 여겼던 군사요충지입니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편리하게 다다를 수 있는 이 섬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옛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은 두 왕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강화도를 둘러보면서 전쟁이라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강한 나라를 꿈꿨던 우리 조상들의 호국정신을 느껴 봅시다.

청나라와 어쩔 수 없이 맺은 조약 - 연미정

연미정

조선은 오랜 세월 명나라에게 고개를 숙여 왔습니다.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왕이 보위에 오를 때 마다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중원의 지배자인 명나라는 조선 입장에서 허리를 굽힐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1616년, 누르하치가 분열되어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명나라의 기세가 크게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17대 왕 인조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는 서인 세력과 힘을 합쳐 삼촌이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인조와 서인들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던 광해군과 달리, 명나라를 숭상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서인들은 대부분 명나라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을 추종하는 꼬장꼬장한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눈에 후금은 오랑캐들이 모여 만든 깡패 집단처럼 보였을 겁니다.

후금은 자신들을 배척하는 조선을 고깝게 여기며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명나라와 대치중인 후금은 인접한 국가들과의 교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조선은 물자교류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조선이 문을 강제로라도 열고자 했습니다.

1627년 3월 1일. 홍타이지는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입니다. 조선은 전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후금은 파죽지세로 압록강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했습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수도를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했고, 뒤쫓아온 후금군이 섬을 포위했습니다. 맞서 싸우고 싶어도 그들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기에, 인조는 묵묵히 백기를 들었습니다. 조선과 후금은 강화도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연미정(燕尾亭)에서 강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했던 부끄러운 조약이었습니다.

강화도의 동쪽 끝,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해안북로를 따라가다 보면 연미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울창하게 솟은 나무아래 고즈넉하게 서 있는 연미정이 보입니다. 빛 바랜 굵은 나무 기둥과 그 위에 얹어놓은 기와지붕에서 소박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이곳에서 인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은 무릎을 꿇지만, 언젠가는 이 빚을 갚아주리라 다짐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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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누르하치(1559~1626)는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청나라의 태조입니다. 그는 중국 변방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을 규합해 나라를 세웠고,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군대를 여덟 개로 나뉘어 관리하는 팔기제도(八旗制度)를 확립했습니다. 홍타이지(1626~1643)는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나라 2대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는 내몽골을 평정하고 명나라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 청나라 왕조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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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 따라 해 보기

‘연미조범’ 읽어보기

연미정 앞바다는 바닷길을 타고 한강으로 들어가는 조운선(전국 각지에서 걷은 세금을 운반하는 배)들이 이동하는 통로로, 한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군사요충지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연미정 부근에는 조선시대 한 선비가 연미정 앞바다에 조운선이 들어오는 광경을 묘사한 시, ‘연미조범(�尾漕帆)’이 팻말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시를 찾아 읽으며 오래 전, 연미정 앞바다의 풍경을 연상해 봅시다.

두 번의 전쟁과 그 상처를 지켜본 곳 - 강화산성 남문

강화산성 남문 이미지

강화읍 중심가로 들어서면 고려시대에 처음 축조된 후 오랜 세월 이 섬을 지켜 온 강화산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시골 풍경 속에 고풍스런 성문, 웅장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성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병자호란은 강화산성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래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직 정묘호란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1636년, 후금군의 장수 용골대가 부하들을 이끌고 조선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형제 지간이었던 양국의 관계를 임금과 신하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황금 일만 냥과 말 삼천 필, 병사 삼만 명도 요구했습니다. 인조는 용골대를 만나보지도 않고 청나라로 돌려 보냈습니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례하고 터무니 없는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그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두 번째 조선 침략에 나섰습니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조선이 치룬 가장 큰 전쟁으로 손꼽히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시작된 것입니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십이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적이 침공했는지도 모르고 있던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개성을 함락하자 그제야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적군이 길목을 가로 막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인조는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과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조선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적과 맞서 싸웠지만,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남한산성 안에 숨어든 조정 대신들은 두 패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습니다. 후금과 화친하자고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와 오랑캐와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가 대치하기 시작한 겁니다. 공성전이 길어질수록 성 안의 식량과 물자는 떨어져 갔습니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청나라 태종은 인조를 한강유역의 삼전도로 불러 직접 사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태종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청나라 태종은 인조가 머리를 찧는 소리가 계속 들리기를 원했습니다. 인조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 내렸습니다.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아버지가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일러스트

전쟁의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물론이고 척화파 신하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조선 팔도의 수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 그 중에는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동생, 김상용도 있었습니다.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강화산성(江華山城) 남문에서 스스로 화약에 불을 질러 자폭함으로써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날 강화산성 남문에 자폭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강화산성의 풍경 이면에는 우리 민족이 받은 상처와 아픔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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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1570 ~ 165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와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우두머리입니다. 강직한 성품으로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직접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인조와 불화를 겪으며 초야에 은거했으나, 효종의 부름을 받고 좌의정 자리에 올랐습니다. 죽기 전까지 효종에게 북벌의 정신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굴욕을 기억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다 - 덕진진

덕진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에 억류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굴욕을 지켜본 두 형제는 청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억류생활 동안 청나라의 문물을 접하면서 두 사람의 생각은 점차 달라져 갔습니다. 봉림대군의 반감이 더욱 깊어진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1644년, 소현세자는 먼저 자유의 몸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능한 인조 대신 소현세자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본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그를 환영했습니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청나라와 친한 소현세자를 껄끄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서인들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머물면서 오랑캐들과 어울려 다녔다며 그를 규탄했습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이듬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넷. 한창때였습니다.
청나라에 있던 봉림대군은 죽은 형을 대신해 왕위를 잇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인조는 내심 기뻤을 겁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달리,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1649년5월, 어느 이른 새벽 인조가 숨을 거두자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17대 왕 효종입니다. 복수설치(復�雪恥, 복수해 치욕을 갚음)를 위해 절치부심해왔던 효종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효종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를 이끌었던 김상헌의 제자들을 대거 중용하고, 어릴 적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이조참판으로 등용하며 북벌을 위한 준비에 나섰습니다. 효종은 우선 방어의 요충지인 강화도를 집중적으로 강화했습니다. 당시 강화도에는 4개의 진이 있었는데 효종은 이를 12개로 늘렸습니다. 이 외에도 보와 돈대를 증설하여 해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1656년 만들어진 덕진진(德津鎭)은 효종의 명으로 증설된 12개의 진 중 하나입니다. 진으로 들어서는 입구인 공조루를 지나면, 신미양요가 일어났을 때 미국 함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였던 남장포대가 등장합니다. 대포와 참호 등, 당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재연되어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높은 언덕을 오르면, 조선시대의 전쟁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덕진돈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덕진진은 역사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어 아이와 함께 둘러보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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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鎭), 보(堡), 돈대(墩臺)

진과 보, 돈대는 조선시대 해안가에 설치한 방어시설입니다. 강화도에는 진과 보 12개, 돈대 54개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진과 보’는 해안 경계부대를 의미하고, 돈대는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진이 제일 큰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다음이 보, 제일 작은 것이 돈대입니다.

신미양요 1871

1866년,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을 찾아 조선과 미국간의 통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셔먼호 승무원들은 바닷가에 머물면서 인근 주민을들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에 분노한 조선군과 백성들은 배를 습격해 승무원들을 몰살시켰습니다. 1871년,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덕진진, 초지진, 광성진 등 강화도 곳곳에서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교전이 벌어진지 사십일이 지나서야 우리 해역에서 군사를 물렸습니다.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남장포대에서 병정놀이!

남장포대에서 병정놀이!

함께 조선시대 청나라 해군과 교전을 벌인다고 가정하고, 조선시대 병사들이 된 것처럼 역할극을 해 봅시다. 아빠가 “열 두 시 방향 적함 발견! 대포 발사!” 하고 구령을 넣으면 아이가 대포 앞에서 포 쏘는 시늉을 하는 겁니다. 아이가 다소 무겁고 딱딱한 역사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못 다 이룬 북벌의 꿈 - 광성보

광성보

광성보(廣城堡)는 1658년, 효종이 설치한 방어시설입니다.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난 숲길을 지나면 바닷길을 따라 몰려드는 적의 움직임을 염탐하기 위해 세운 손돌목돈대가 나타납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물길을 가르며 이어진 성벽길을 만나게 됩니다. 깃발이 펄럭이는 성벽 길의 끄트머리에 용두돈대가 있습니다.

용두돈대

용두돈대에 서면 서해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황토빛 바닷물결이 보입니다. 광성보를 찾은 효종은 이 바닷물을 보며 지난날 아버지 인조가 당한 치욕을 떠올렸을 겁니다. 효종은 그 원한을 대신 갚아주리라 다짐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효종은 어영청(御營廳)을 북벌을 위한 준비기구로 바꾸고 군량미 확보에 나서는 등 의욕적으로 북벌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암초에 부딪치고 맙니다. 조정 신하들이 효종의 북벌 계획에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조선은 아직 두 차례 호란으로 피폐한 상태였고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효종의 측근으로서 함께 북벌을 준비하던 송시열도 반대진영에 합류했습니다. 두 사람은 북벌이라는 큰 뜻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 대한 생각은 달랐습니다. 효종은 전쟁을 원했고 송시열은 청나라에 대한 원한은 잊지 말되 우선 내정을 추슬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설상가상, 조선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눈치 챈 청나라가 군사력의 감축을 요구하면서 효종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나라 안팎으로 북벌계획을 그만 두라는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효종은 자신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1659년, 효종은 왕이 된지 십 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명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북벌에 반대하는 세력이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효종이 죽은 이유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북벌계획은 전면 중단되었고 다시는 재개되지 못했습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세요

어영청

어영청은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다섯 군영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정 대신들은 조선의 군사 조직이 부실하여 정비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 조직은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금위영(禁衛營), 다섯 개로 개편되었습니다. 어영청은 원래 왕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는 군대로, 효종은 이들을 북벌의 핵심전력으로 육성하려고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포인트 체크

깃발 인증샷 찍기

깃발 인증샷 찍기

광성보에는 곳곳에 조선시대 병사들이 썼던 깃발이 꽂혀 있습니다. 군령을 뜻하는 령(令)기와, 주변을 잘 살피라는 뜻의 순시(巡視)기 두 종류입니다. 아이와 함께 두 종류의 깃발을 찾아 인증샷을 찍어 봅시다. 깃발은 강화도에 남아있는 진, 보, 돈대의 상징물입니다. 사진을 찍어 강화도에 다녀 온 추억으로 남겨 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강화도를 떠나며

인조와 효종은 실패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조는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슬기로운 외교를 펼치지 못하고 전쟁을 자초했으니 잘못이 큽니다. 효종은 전후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할 상황에서 북벌이라는 너무 거대한 목표를 세웠고 결국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북벌을 향한 두 왕의 노력이 무의미했다고 볼 순 없을 겁니다. 인조는 자신의 잘못으로 전쟁이라는 화를 불러들였지만, 아들에게 북벌의 정신을 전해 주었습니다.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방어를 튼튼히 다지고 군사를 양성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웠습니다.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보와 진, 돈대 속에는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인조의 의지, 강대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려 했던 효종의 노력이 배어 있습니다. 성큼 다가온 여름, 아이와 함께 바다가 드넓은 강화도를 찾아 보는 건 어떨까요? 이곳에서 만나게 될 인조와 효종의 이야기가 여행을 보다 뜻 깊게 만들어 줄 겁니다.

아이와 함께 마무리 OX 퀴즈

정묘호란은 명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 O / X )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다. ( O / X )

인조는 광해군이 죽은 후 정당하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 O / X )

소현세자는 조선이 귀국하지 못하고 청나라에서 죽었다. ( O / X )

효종은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추진했다. ( O / X )

송시열은 끝까지 북벌을 지지했다. ( O / X )

퀴즈 정답은 주변 둘러만한 곳 코너 아랫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 둘러볼만한 곳

(1) 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입니다.
선사시대에서부터 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다양한 시대의 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옥토끼 우주센터
2007년에 문을 연 우주 테마파크입니다.
우주과학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과 3D영상관, 공룡 모형이 전시된 공룡의 숲, 썰매장과 수영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관광명소입니다.

(3) 전등사
고구려 소수림왕 때 처음 창건된 유서 깊은 절입니다.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반출해 온 대장경을 이곳에서 보관토록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X , O , X , X, O ,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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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글,사진
강민석
일러스트
유유(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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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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