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길라잡이
강원도 남부, 내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영월은 패러글라이딩과 동강에서 즐기는 래프팅 등 다양한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가기 좋은 강원도의 대표적 휴양지입니다.
한편 영월은 풍부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조선의 여섯 번째 왕이었던 단종의 유배지가 있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조선 초기,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 다 간 왕으로 손꼽히는 단종. 강원도 영월에 남아있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삼촌, 어린 조카를 죄인으로 만들다 - 단종어소
엔진소리가 요란한 낡은 보트를 타고 수심이 얕은 서강(西江)을 건너면, 섬처럼 외롭게 떠 있는 청령포(淸�浦)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갈밭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낡은 기와집 한 채가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이 집은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거처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단종은 어쩌다가 죄인의 신분이 되어 섬과 같은 청령포에 갇히게 된 걸까요?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이었던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업적을 이어 받아 나라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국방을 강화하는데 힘썼습니다. 그는 세종대왕 못지 않은 성군이 될 자질을 보였지만,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문종은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과 친동생들을 불러 이제 열 한살이 된 아들(훗날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문종을 만난 사람 중에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도 있었습니다. 평소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을 억눌러 왔던 수양대군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습니다.
단종이 즉위하자 오랫동안 조선의 국방을 도맡아 온 김종서는 어린 왕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왕의 삼촌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각자의 세력을 거느린 채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탐냈습니다.
계유년(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은밀히 자신의 사병들을 움직여 김종서를 살해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신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는 안평대군의 세력마저 꺾으면서 권력을 독차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조선 최초의 반정인 계유정난(癸酉靖難)입니다.
그때 단종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고 착잡했을 겁니다. 예전 모습 그대로 재연된 단종의 거처 안에는 왕의 상징인 곤룡포가 걸려 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기와집과 휘황찬란한 곤룡포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 단종이 느꼈을 비참한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600세 관음송과 인증샷 촬영
단종의 거처 근처에는 6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관음송이 있습니다. 단종의 비참한 유배생활을 지켜보고, 그의 슬픈 넋두리를 들었다고 해서 볼 관(觀), 소리 음(音),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관음송을 찾아 추억을 남겨 봅시다.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을 처형하라 - 노산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끈 한명회, 권람 등은 수양대군이 왕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힘이 없는 단종은 대신들의 등쌀에 못 이겨 왕위를 내려놓고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양대군은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가 되었습니다.
세조가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던 날 밤. 한양 어느 사대부 집 사랑방에서는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성삼문과 박팽년을 비롯하여 단종을 따르는 조정 대신들이 세조를 제거하려는 거사를 계획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들의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세조의 심복인 한명회가 미리 손을 써서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세조는 단종의 복위를 추진한 자들을 몽땅 처형했습니다. 이때 희생당한 여섯 명의 의로운 신하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릅니다. 세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키고, 지금의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소재한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단종의 거처를 나와서 소나무 숲 사이를 거닐다 보면,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나무 계단을 만나게 됩니다. 계단의 끝에는 거대한 바위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는데, 해 질 무렵 단종이 이 바위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유배생활의 시름을 달랬다고 전해집니다. 노산군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노산대(魯山臺)’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에서 바라보는 영월의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그 너머로 펼쳐진 논과 밭, 멀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첩첩이 이어진 산들의 물결을 보고 있으면 바쁜 일상 속에 떠나 보낸 여유가 자연스레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단종의 마음은 결코 여유를 찾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도 모두 자신을 옥죄는 감옥처럼 느껴졌을 테니까요.
한명회 1415 ~ 1487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 역할을 하며,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계유정난을 계획하고 실행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반정공신으로 좌의정과 우의정, 영의정을 두루 거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죽은 후에는 세조의 묘정(임금의 사당)에 위패가 안치되었습니다.
왕비를 그리던 단종의 마음으로 돌탑 쌓기
노산대와 가까운 곳에 '망향탑'이라는 돌탑이 있습니다. 이 돌탑은 단종이 한양에 있는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쌓은 것이라고 합니다. 망향탑 때문인지 청령포 곳곳에서 방문객이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청령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를 정해보라고 한 뒤, 그곳에 가서 함께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어 봅시다.
단종은 순순히 사약을 받고 죽었을까 - 관풍헌
청령포에서 십분 남짓 차를 달려 영월 읍내로 접어들었습니다. 소박한 관공서 건물과 지붕이 낮은 주택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대로변을 지나다 보면 기와가 얹어진 낮은 담벼락 너머, 나란히 늘어서 있는 세 채의 한옥건물이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관청으로 쓰였던 관풍헌(觀風軒)입니다.
1457년(세조 3년)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서 청령포에 홍수가 났습니다. 단종은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경상북도 순흥에서는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또 한번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거사를 주도 한 사람은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었습니다. 그는 순흥부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세조를 치려 했지만, 관청의 노예가 거사 계획을 폭로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진노한 세조는 친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세조는 단종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부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약을 내렸습니다. 단종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순순히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설도 있고, 살해당했다는 설, 사약이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단종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 만은 변치 않은 사실입니다.
단종과 세조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어둡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럴 땐 잠시 시선을 돌려 기분 전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관풍헌에서 영월대교를 건너 동쪽으로 달려가다 보면 래프팅으로 유명한 동강이 펼쳐집니다. 영월대교 남쪽방향에는 천연기념물 21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씨동굴도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여름에 즐기는 서늘한 동굴체험. 이것 만한 피서가 또 있을까요?
고씨동굴
지금으로부터 4억년 전에 처음으로 만들어 진 석회동굴로, 총 길이는 6KM에 달합니다. 1969년, 대중에게 처음 존재가 알려졌고, 1969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종유관, 정유석, 석주 등이 보존되어 있고 다양한 종류의 박쥐와 흰 새우, 흰 지네 등 68종에 달하는 희귀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한여름에도 16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여름에 들러보기 좋은 장소입니다.
금성대군 1426 ~ 1457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로, 소헌왕후 심씨의 소생입니다. 세종대왕이 유난히 좋아하여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머무는 일이 잦았다고 전해집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종과는 각별한 사이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단종을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세종대왕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하게 세조와 맞서 단종을 지지한 인물입니다.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뒤, 마을 주민들이 금성대군이 숨을 거둔 장소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금성단 (錦城壇)입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세조의 뒤늦은 후회 - 창절사
세조는 호패법(지금의 주민등록법)을 통해 나라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경국대전 (經國大典)을 편찬하여 국법을 바로 세우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치세를 펼쳐도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단종의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김시습과 남효온을 비롯한 여섯 명의 신하들은 세조를 비판하며,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여섯 명을 생육신(生六臣) 이라 부릅니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일 겁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말년에 승려가 되어 여생을 보냈습니다. 뜻밖에도 김시습은 이 시기에 철천지 원수인 세조와 함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 이유는 세조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조는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차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단종과 충신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전국의 사찰을 돌면서 천도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김시습의 눈에 세조는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불쌍한 노인으로 보였을 겁니다.
영월 읍내에는 김시습과 남효온을 비롯한 생육신과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준 의로운 사람들의 위패를 모신 절이 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집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창절사(彰節祠)입니다. 절 안뜰에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간 굵은 가지는 끝까지 단종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은 생육신의 절개를 연상케 합니다.
경국대전
경국대전이라는 이름은 ‘국가를 경영하는 큰 법전’을 뜻합니다. 세 조 때 편찬된 이래 조선을 통치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법전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궁궐을 포함하여 수도 한양과 지방에 부임하는 관리들에 관한 법률인 이전(吏典), 나라의 재정과 관계된 법률을 담은 호전(戶典), 각종 의례와 외교에 관한 법률 예전(禮典), 군사의 편제에 관한 법률 병전(兵典), 죄인에 대한 형벌과 재판, 노비와 상속에 대한 법률 형전(刑典), 도로와 다리, 도량형 등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는 공전(工典). 이렇게 총 여섯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월을 떠나며
‘죄는 죄지은 자에게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조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조카를 쫓아내고 형제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고, 그 대가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세조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선을 지켰다면,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겁니다.
이제 장마가 지나가면 본격적인 피서철로 접어듭니다. 영월의 산과 들판, 굽이진 강물을 따라 모험을 즐기면서, 곳곳에 남아있는 단종과 세조의 이야기를 찾아 보는 건 어떨까요? 가족과 즐거운 추억도 쌓고, 우리 역사의 한 단면도 살펴보는 의미 있는 휴가가 될 겁니다.
문종은 단종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 O / X )
수양대군에게 쫓겨난 단종은 관풍헌으로 유배되었다. ( O / X )
단종은 노산대에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 O / X )
창절사에는 한명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O / X )
세조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 O / X )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 O , X , O, X ,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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