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길라잡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지칭하는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로 세종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청와대 부근이라 개발의 광풍을 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촌은 옛 골목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어서 아이들과 가족이 함께 하는 역사 탐방 코스로도 최적입니다.
보통 경복궁 역에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서울 시청 뒤에 있는 프레스센터 앞에서 09번 마을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면 종점인 수성동 계곡(水聲洞 溪谷)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수성동 계곡에서부터 서촌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선비들과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 수성동 계곡
서촌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이름난 휴양지인 수성동 계곡을 품고 있습니다. 인왕산 기슭에 있는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선비들과 화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곳입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예술가로서도 명성을 떨친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가 이곳에 있었다고도 전해집니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해서 한양 최고의 명승지라는 찬사를 듣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 속의 돌다리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마을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올라가면 잘 보존된 수성동 계곡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작은 폭포 위로는 사람이 놓은 것인지 자연이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돌다리가 놓여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이 다리는 우리 조상들이 자연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호 난간에 기대서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곳에 서울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이곳이 양반들만의 놀이터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접어들면서 중인과 평민층이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여항문학(閭巷文學)이 형성됩니다. 천수경과 왕태, 조수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송석원시사는 여항문학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들은 수성동 계곡이 있는 옥류동에 모여서 시를 짓고 문학을 즐겼습니다.
사실 이 계곡이 다시 우리 품에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71년 이곳에 옥인동 시범아파트가 들어서게 된 것이 시작입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인왕산을 가린 것은 물론이고, 콘크리트로 복개되어 버립니다. 다행히 201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되면서 수성동 계곡은 다시 우리 품에 돌아옵니다.
겸재 정선 (1676 ~ 1759)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약한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경산수화란 조선의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이전까지 무작정 중국의 화풍을 따라 하던 것에서 진일보한 것입니다.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수성동 다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조선의 선비와 화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수성동 계곡. 물소리가 아름다워서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곳 보호 난간 앞에서 수성동의 다리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겨보면 어떨까요?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다 - 윤동주 하숙집 터
수성동 계곡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오른편에 벽돌로 만든 3층 건물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와있지만 이 건물은 애초에 일제가 세운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공장 기숙사 건물입니다. 기숙사 건물답게 별다른 장식이 없지만 처마의 벽돌을 반 칸씩 바깥으로 빼서 쌓은 것이 눈에 들어오네요.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가 머물던 하숙집 터가 나옵니다.
1917년 중국 길림성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고향에 있는 명동소학교를 다니다가 용정에 있는 외국인 학교를 다녔습니다. 1938년,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합니다. 그 시절 윤동주가 거처하던 하숙집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빨간 벽돌 담장에 아기자기한 글씨로 적혀있거든요. 담장에는 예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어서 잠깐 동안이나마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펜을 들었습니다. 1942년 일본 유학을 떠났던 윤동주는 이듬 해 조선의 독립을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절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해방을 반 년 앞둔 1945년 2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함께 갇혀 있던 송몽규의 증언을 토대로 생체실험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그렇게 날개를 펴기도 전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붉은 벽돌담장에 아기자기하게 붙어있는 장식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미술관이 된 친일파의 저택 - 박노수 가옥
자! 울적해진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 서촌을 걷다 보면 맛있어 보이는 카페, 음식점,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저도 그 중 한 가게에서 원고지 패턴의 메모지를 샀는데 아날로그 시대의 감성을 느껴보면서 잘 쓰고 있습니다.
좁은 길을 씩씩하게 올라오는 마을 버스를 피해 걷다 보면 오른 편에 독특한 2층 저택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곳이 바로 종로 구립 미술관이자 박노수 가옥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대문 입구에서 바라본 저택의 모습은 고풍스럽고 화려합니다. 현관의 포치(porch)를 비롯해서 전체적으로는 서양식 저택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옥의 건축 양식도 보입니다. 집 안에도 벽난로와 온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집은 이완용 뺨치는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것으로, 설계자는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일하던 박길룡입니다.
현대 동양화를 대표하는 박노수 화백이 1973년 이 집을 구매하면서 새로운 주인이 됩니다. 박노수 화백은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2011년 집과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국가에 기증하면서 종로 구립미술관으로 재 탄생하게 됩니다. 친일파가 지은 저택이 화가의 집이 되고, 또 미술관으로 바뀌는 과정은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면 내부는 물론 잘 꾸며진 정원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서촌 중에서도 정말 조용한 곳이라 걷다가 지치면 잠시 들려도 좋은 곳입니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고 미술에 관심이 없다면 바로 옆에 있는 옥인 오락실을 추천합니다. 갤러그부터 버블버블까지 추억에 잠길만한 80년대 오락을 즐겨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기름떡볶이로 유명한 통인시장 사거리가 나옵니다. 활기찬 통인시장에서 떡복이, 부침개, 국수 등으로 요기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들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왼쪽 오르막길을 올라가서 왼쪽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세요. 그냥 빌라와 다세대 주택이 보이실 겁니다.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 오른쪽 골목을 보면 뜬금없는 돌기둥이 하나 나옵니다.
한일강제합병의 대가로 지은 집 - 벽수산장 돌기둥
어라? 하는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맞은 편에 좀 더 길쭉한 돌기둥이 하나 더 보이실 겁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사실 이곳은 윤덕영이 10년에 걸쳐서 지었다는 벽수 산장이 있던 곳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순종을 협박해서 한일강제병합을 성사시킨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일본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윤덕영은 막대한 은사금을 받게 됩니다. 그 은사금으로 엄청난 규모의 서양식 저택을 짓게 됩니다. 무려 3년에 걸쳐 지어진 이 벽수산장의 규모는 무려 2만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앞서 봤던 박노수 가옥은 이 벽수산장 앞에 지어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뾰족한 지붕과 첨탑 때문에 뾰족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광복 이후 벽수산장은 잠시 병원으로 사용되었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영문약자로 줄여서 언커크(UNCOK)가 사용합니다. 덕분에 이 앞길은 한 동안 언커크 길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언커크 본부로 사용되던 벽수산장의 운명은 1966년 화재로 인해 끝나게 됩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입구를 장식했던 돌 기둥 두 개와 벽돌 담장 일부뿐입니다. 이 돌기둥 앞에 서면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역사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통인 시장
엽전으로 도시락을 살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통인시장은 194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인근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설시장으로 시작되었지만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한 시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현재에도 수십 개의 가게들이 시장 안에 있는데 기름떡볶이와 함께 맛있는 반찬들을 파는 곳이 많습니다.
박노수 가옥 전경과 벽수산장 돌기둥 찾아가기
박노수 가옥은 입장료를 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대문에서 안쪽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대했던 벽수산장의 마지막 남은 흔적인 돌기둥도 찾아봅시다. 한때 수 만평의 거대한 대지 위에 우뚝 솟았던 저택이 사라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도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의 꿈이 머물던 곳 - 이상의 집
통인시장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서 더 내려가면 전파상부터 피아노 학원, 분식집까지 80년대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거리와 만날 수 있습니다. 중간에 실핏줄처럼 이어진 좁은 골목 안쪽에는 옛날 한옥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정신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서촌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빨라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이 거리를 걷다 보면 한옥과 통 유리라는 다소 어색한 조합을 한 건물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처마 아래에는 수줍은 듯 한 글씨로 이상의 집이라고 작고 아담한 글씨가 적혀 있답니다. 시인 이상이 머물던 집을 작은 문화공간으로 꾸며놓은 것입니다. 통유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카페처럼 꾸며진 공간이 나옵니다. 무료로 커피나 음료수를 마실 수 있으니까 다리가 아프면 쉬었다 갈 수 있습니다. 정면에 커다란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면 이상의 집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테라스가 나옵니다. 이곳에 서서 이상의 시를 한 구절 읊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이상 (1910 ~ 1937)
비운의 천재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입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총독부 건축과에서 잠시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건축과를 나온 그는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가 발표한 시는 난해하다는 이유로 외면 받기 일쑤였습니다. 1937년 일본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 해 4월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서촌을 떠나며
서촌에 올 때 마다 이곳에는 마치 우리 역사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수성동 계곡부터 일제의 침략과 상처와 부끄러움을 말해주는 벽수산장이나 윤동주와 이상의 발자취 등… 역사는 수 많은 어제의 결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모든 것입니다. 서촌에서는 이제는 역사가 된 어제의 하루와 삶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 O / X )
수성동 계곡은 양반들만 오던 곳이다. ( O / X )
박노수는 윤덕영의 사위였다. ( O / X )
벽수산장을 짓는데 10년이 걸렸다. ( O / X )
시인 ‘이상’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 O / X )
아이와 함께하는 퀴즈 정답
1. X → 윤동주는 1917년 중국 길림성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2. X → 중인과 평민층이 주인공으로 하는 여항문학(閭巷文學)이 형성된 곳이었습니다.
3. X → 박노수 가옥은 원래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곳으로 박노수 화백이 이 집을 구입하였습니다.
4. O →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건물로, 10년이나 걸려서 건축했다고 합니다.
5. O → - 비운의 천재 시인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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