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추석의 기원을 찾아서, 경주

시즌2 역사탐방 길라잡이 15편 추석의 기원을 찾아서,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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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코스

천마총 > 미추왕릉 > 첨성대 > 계림 > 안압지 > 오릉
예상소요 시간 : 2시간
경주는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의 수도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이야기가 고파지는 가을, 아이와 함께 경주의 유명한 문화 유적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그것들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와 명절의 유래를 함께 알아보자.

탐방길라잡이

추석을 앞둔 9월의 어느 날, 은하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번 행선지는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로,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들러봤을 법한 유명한 관광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수도였기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대표하는 명소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 경주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추석은 신라 유리왕 때 시작된 ‘가배’라는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타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승전기념축제였으나 긴 세월이 흐르면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가족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오늘날의 추석으로 변형되었다. 형제, 자매가 없는 은하는 명절을 그저 친척언니, 오빠들과 만나 즐겁게 노는 휴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경주를 여행하기로 한 것은 은하에게 추석이라는 명절의 기원과, 가족의 의미해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주에 깊이 배어있는 신라의 역사와 신기하고 환상적인 우리 이야기도 함께 전달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경주, 이야기 속으로

추석의 기원, 가배(嘉俳)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가위에 대한 유래와 민속을 살펴보면 당나라 문종 때 입당 수도한 일본 승려 옌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있다. “산동 지방에 머무르고 있는 신라인만이 8월 15일에 독특한 명절놀이를 하였다. 그곳 노승의 말에 의하면, 이날이 신라가 발해와 싸워 크게 이긴 기념일이기 때문에 이날을 명절로 삼아 백성들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고 가무로써 놀았다.
명절놀이 그림
이 절 역시 신라인의 절이므로 자기들의 조국을 그리워하며 8월 보름 한가윗날을 맞아 명절놀이를 한다.”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유리왕 9년(32년)에 국내 6부의 부녀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두 왕녀(王女)로 하여금 인솔·지휘 감독하여 7월 16일부터 길쌈을 해서 8월 보름까지 짜게 하였다. 그 후 그 질과 양의 성적을 심사하여 승부를 결정하고, 진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을 대접하게 하였다. 이날 달 밝은 밤에 위로는 임금과 백관 대신을 비롯하여 아래로 서라벌 수십만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녀와 부녀자들이 밤이 지새도록 ‘강강술래’와 ‘회소곡(會蘇曲)’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흥겹게 놀았다. 이것을 그때 말로 가배(嘉俳)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추석의 별칭인 ‘가위’는 가배가 변하여 된 말이다. 추석이란 말은 ‘예기(禮記)’에서 등장하는 ‘춘조월(春朝月) 추석월(秋夕月)’이란 기록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탐방하기

1. 천마총
기러기 솟대 찾기 사진
미션
아빠와 자전거 타기경주 대릉원 지구 부근에는 자전거 대여점들이 많이 있다.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통해 이동하는 것도 추억이 될 것이다!
산책로로 들어서자 관광객들의 발길이 길게 이어지는 어느 고분의 모습이 보였다. 그 유명한 천마총(天馬塚)이었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경에 만들어 진 고분이다. 천마총 안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금관과 장식품 등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고분 발굴 당시, 말 안장에 달아놓는 장식물에 천마, 즉 전설 속 동물인 기린을 그려놓은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그 그림을 천마도라 부른다. 현재 천마도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상태다.
2. 미추왕릉
천마총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아담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신라 13대 왕이었던 미추왕(味鄒王)의 왕릉 이었다. 미추왕은 백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킨 호국왕(護國王)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생전의 활약상 때문인지 죽고 난 뒤에도 혼령으로 나타나 나라를 구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추왕릉
은하는 미추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돌연 이 왕은 성이 무엇이냐고 질문해 왔다. 순간 당황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김씨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은하는 흔히 무슨 무슨 왕으로 불리곤 하는 고대의 왕들에게 이름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은하에게 그들 또한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았으며 왕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김유신을 도와 적군을 물리친 미추왕의 영혼
신라 제13대 임금이었던 미추왕(味鄒王)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평소 현명한 성품에 덕이 많기로 유명했던 그는 첨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미추왕은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능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 14대 유례왕(懦禮王)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략했다. 신라군은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으나 적의 기세가 워낙 맹렬하여 오래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때, 정체를 알수없는 병사들이 출현해 신라군을 도와 적군을 물리쳤다. 그 병사들은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적군이 공격을 포기하고 도망치자마자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신라 사람들은 미추왕의 왕릉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있음을 보고. 그제야 선왕이 음으로 도와 나라에 공이 있음을 알고 이로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37대 혜공왕(惠恭王) 때에도 기이한 일이 있었다. 대력(大曆) 14년(779년) 4월에 문득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 바람 속에 준마를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김유신 장군이었다. 김유신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병사들을 거느리고 죽현릉으로 향했다.
“신은 평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제거하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훈(功熱)을 생각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아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겠사오니 임금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소서.”
김유신 장군이 능에 들어가 말하자 미추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이나 청해도 미추왕은 세 번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이에 돌아갔다.
혜공왕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신 김경신(金敬臣)을 보내어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도록 하는 한편, 추선사(熱仙寺) 김유신의 이름으로 땅을 기증하며 명복을 빌게 했다. 추선사는 김유신이 고구려를 정복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해 나라에 큰 화가 찾아 올 뻔 했다. 신라 사람들은 미추왕에게 감사하며 그의 왕릉을 5릉(五陵)의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출처 : 삼국유사
3. 첨성대
대릉원 지구를 나서자 쭉 뻗은 잔디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첨성대는 그 푸른 평원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은하가 어릴 적에 이곳에 들려 기념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났다. 그날의 추억은 사진 속에 남아있을 뿐, 은하는 처음 보는 것처럼 탄성을 지르며 첨성대를 향해 달려갔다.
첨성대 사진
미션
첨성대 인증샷 찰칵!경주의 대표적인 포토존인 첨성대 앞에서 아빠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신라 27대 왕이었던 선덕여왕 재위기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첨성대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측하던 천문관측소였다. 옛날에는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문을 통해 사람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과천과학관에서 천체망원경을 본 적이 있는 은하는 옛날 사람들도 별과 달을 관측했다는 이야기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씨 점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농업을 주요 생업기반으로 삼아왔다. 그리하여 농사의 풍흉과 직결되는 날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천체와 기상의 변화를 관찰하여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예측해 자연재해에 대비해 왔다. 신라는 첨성대를 두어 천문을 관측하였고, 고려는 서운관(書雲觀), 조선은 관상감(觀象監)을 두어 자연현상을 관찰했다.

날씨 점은 이러한 배경에서 파생된 것으로, 해와 달의 움직임, 바람과 비, 번개 등의 자연현상이나 서리, 이슬, 안개, 노을, 무지개의 상태에 따라 날씨를 예측하고 앞날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햇무리가 지면 비가 내리고, 여름밤에 별이 촘촘하면 열기가 몰려온다.’, ‘달빛이 붉거나 봄에 서리가 많이 내리면 가뭄이 든다.’, ‘여름에 북쪽에서 바람이 불면 반드시 비가 온다.’, ‘무지개가 동쪽에 서면 날이 개이고, 서쪽에 서면 비가 온다.’ 이렇게 기상관측을 통해 자연환경의 변화를 예견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곤 했다.

이러한 날씨점은 현대의 일기예보를 연상케 한다. 앞서 언급한 사례가 단기예보라면 장기예보도 있었다. 한 달을 단위로 하는 월차점(月次占), 24절기를 단위로 하는 절기점(節氣占)이 그것이다. 특히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 첫 만월인 정월 대보름,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2월에는 일년을 단위로 하는 장기예보의 날씨점이 많았다.
‘가정백방길흉대길(家庭百方吉凶大吉)’이라는 책에 보면, ‘정월 초하루에 날씨가 맑고 따뜻하면 오곡이 잘 여물고, 사람에게 질병이 적다. 가축도 잘 번식하고 도적이 줄어들어 나라가 태평하다. 흐리고 비가 오면 사람과 가축에 재앙이 있고, 과실이 결실을 맺지 못하며, 논밭에 큰 물결이 인다. 눈이 많이 내리면 쌀과 보리가 풍년이 들며 살기가 편안하다. 그러나 소·양·개에게 재해가 있고, 과일의 소출이 적으며 물고기가 귀해진다. 만약 노을이 지면 메뚜기가 창궐하고 누에치기가 부실하며 부녀자에게 재해가 있다. 그러나 과일과 채소는 풍성해진다.’라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러한 날씨 점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과학적 지식이었다. 그러나 ‘일식과 혜성의 출현은 나라에 대란(大亂)이 있을 전조(前兆)요, 월식은 전염병이 유행할 징조이며, 혼인식 때 비가 오면 불길하고, 사위가 들어오는 날 일기가 불순하면 사위의 기(氣)가 거칠다.’ 등등, 현대에 받아들이기 힘든 근거 없는 점괘도 있어 때때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술로 악용되기도 했다.

원문출처 : 한국세시풍속사전
4. 계림
첨성대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가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로 들어서자 작은 청설모 한 마리가 폴짝 폴짝 뛰며 숲 저편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은하는 귀여운 청설모를 쫓아 숲 속으로 들어섰다.
계림
계림(鷄林)은 신라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전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숲이다. 계림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세 성씨 중 하나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서 유래되었다. 설화 속에서 흰 닭 한 마리가 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계림 이라는 이름을 따 온 것이다.
계림은 오래 전부터 신성한 숲으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오솔길을 걷다 보니 절로 수긍이 갔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어 오는 풍경은 전설 속에 나오는 신비한 비경(秘經)을 연상케 했다.
알에서 태어난 김알지
영평(永平) 3년(서기 58∼75년 경) 8월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신라의 귀족이었던 호공(弧公)이라는 사람이 밤에 월성(月城) 근처를 거닐던 중, 천란한 빛이 숲속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 몰려들었는데 구름 속에 황금 궤가 내려와 나뭇가지에 걸렸다. 호공이 본 빛은 그 금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돌연 닭 우는 소리가 들리기에, 호공이 고개를 돌려 보니 나무 밑에 흰 닭 한 마리가 목청이 찢어져라 울고 있었다.

호공은 이 일이 심상치 않다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숲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사내아이 하나가 누워있었다. 왕은 아이가 금궤에서 나왔다는 데에 착안, 김(金)씨 성을 붙여 주었고 어린아이라는 뜻을 가진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왕이 김알지를 안고 돌아보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뛰놀고 춤추었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파사왕(婆裟王)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된 알지는 훗날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訶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는 훗날 왕위에 올라 신라의 13대 임금, 미추왕이 되었다.

출처 : 삼국유사
5. 안압지
다음 행선지는 신라 30대 왕이었던 문무왕 시절에 축조된 인공 저수지, 안압지였다. 은하에게 전에 함께 여행했던 의림지와 비슷한 시설이라고 설명하자 금방 이해했다. 이곳에서 선조들은 작은 산을 만들고 아름다운 화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하는데, 저수지의 기능을 유지함과 동시에 왕과 귀족들을 위한 정원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모양이다.
첨성대 사진
미션
도깨비 찾기안압지의 전각 안에 잇는 신라인 옛 유물 중 도깨비 무늬 기와를 찾아보자!
수면 위를 뒤덮은 푸른 연잎과 물가에 오롯이 선 화려한 전각들의 자태를 보고 있자니, 마치 옛 신라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그간의 여정에 지쳐 잠시 기운이 죽어있던 은하도 안압지를 천천히 둘러보며 다시 기운을 얻은 듯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6. 오릉
안압지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푸른 하늘 아래 노란 코스모스가 풍성하게 피어난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팔려 한참 동안 걷다 보니, 오늘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오릉에 도착했다. 매표소를 지나 아담한 공원으로 꾸며진 오릉 입구를 통과하자 한데 모여 있는 다섯 구의 봉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에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였던 알영부인, 신라 제2대 남해왕과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이 묻혀있다고 알려져 있다.
오릉
그야말로 신라의 시작을 알린 전설 속의 왕들이 한데 묻혀있다고 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오릉의 주인이 박혁거세를 비롯한 신라 초기의 왕들이라는 것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근거로 추정한 것이다. 오릉은 밝혀진 것 보다, 앞으로 밝혀내야 할 사실이 더 많은 신비한 왕릉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진한이라는 땅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각 마을의 촌장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다스림 하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 사이 좋게 지냈는데 점점 마을 사람 수가 늘어가면서 사람들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서로 싸우는 일이 거듭되자.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알천의 언덕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회의 끝에 여섯 마을을 합쳐 한나라로 만들고 이를 대표하는 임금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나라의 도읍을 정하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살피던 중 남쪽 방향의 양산아래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하늘게어 온 백마(白馬)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촌장들이 달려가서 흰 말이 있던 자리를 살펴보니 반짝반짝 보랏빛을 띄는 알 한 개를 발견하였다. "이 알은 새로 나라를 세우는 여섯 마을에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이 분명합니다."라고 촌장들이 말하였다. 그 알을 깨어보니 잘생긱 사내아이가 나왔고 촌장들은 아이가 나라를 밝게 다스려 주길 바라며 아아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그리고 박에서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은 "박"이라 하였다. 이 아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이다. 같은 날 사량리 라는 마을에 있던 알영 이라는 우물가에서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닭의 머리를 한 용이 나타나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용의 왼쪽 갈비뼈 밑에서 나온 아이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 부리처럼 생겨서 보기 흉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 아이를 월성 냇가의 냇물에 목욕을 시키자 입술에 붙어있던 부리가 감쪽같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태어난 우물의 이름을 따라 "알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르고 사람들은 이 두 아이를 하날에서 내려주신 왕과 왕비라 여기고 그들이 태어난 남쪽 산기슭에 궁궐을 짓고 정성껏 보살폈다. 두 아이가 열세 살 되던해, 촌장들은 두 아이를 결혼시키고 왕과 왕비로 모셨다. 여섯 마을을 합친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 로 정하였는데 이 이름은 훗날 "신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박혁거세왕과 알영왕비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혁거세왕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왕이 돌아가시던 날 흰 말이 하늘에서 내려와 왕의 몸을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일주일 동안은 날은 흐리고 계속 비가 왔다. 왕이 말을 타고 올라가시던 7일째 되던 날, 천둥 번개 속에 왕의 몸이 다섯 조각으로 흩어져 땅에 떨어졌다. 왕의 죽음에 슬퍼하며 시름시름 앓던 알영왕비는 박혁거세왕의 몸이 하늘에서 떨어지자 동시에 눈을 감았다. 백성들은 슬퍼하며 다섯 조각으로 흩어진 왕의 몸을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그때마다 큰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방해하였다. 남산 기슭에 떨어진 왕의 몸을 찾으러 가면, 큰 뱀이 나타나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몸을 내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왕의 몸을 한곳에 모으는 것을 포기하고 따로따로 무덤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혁거세왕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무덤의 이름도 "오릉"이라고 지었다. 또 뱀이 나타나 방해했다고 해서 뱀 "사"자를 써서 "사릉"이라고도 불렀다.

원본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답사를 마치며...
은하에게 가배와 추석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던 가배. 그 풍습은 어떻게 추석이라는 명절로 변화해 간 것일까? 은하는 당시 신라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세 성씨에 속하는 한 가족이었을 테니, 승전기념 축제는 곧 가족들이 모여 벌이는 큰 잔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석을 그저 빨간 날 정도로 생각했던 은하가 그 기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 했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가족 간의 교류가 줄어들고 명절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은하가 어른이 될 때 쯤 명절은 어떤 의미로 변해있을까?
훗날 어른이 된 은하가 아빠의 손을 잡고 경주를 여행했던 일을 떠올리며, 추석이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돌이켜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오릉을 떠났다.
숨겨진 경주 이야기: 선덕여왕과 지귀의 사랑
신라 선덕여왕 때에 지귀(志鬼)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하루는 지귀가 서라벌 저자거리에 나왔다가 멀리서 여러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게 되었다. 멀리선 본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상사병에 걸린 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여왕의 이름을 부르다가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영묘사로 가기 위해 서라벌 거리를 통과할 무렵이었다. 지귀가 선덕여왕을 보고 쫓아오다 여왕을 호위하는 시위군에게 붙들렸다. 여왕은 시위군을 통해 지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을 따라오도록 허락했다. 지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여왕의 행렬을 뒤따랐다.
여왕은 절에 이르러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열심히 절을 올렸고, 그러는 동안 지귀는 절 앞의 탑 아래에 앉아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왕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나오지 않았다. 지귀는 혼자 여왕을 기다리다 그만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절을 나서던 선덕여왕은 탑 아래 잠든 지귀를 발견했다. 얼마나 곤히 잠을 자는지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선덕 여왕은 잠든 지귀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올려 놓은 뒤 발길을 옮겼다.

홀로 잠에서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했고.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기쁨은 곧 불씨가 되어 지귀의 몸에 옮겨 붙었다. 지귀의 선덕여왕을 향한 짝사랑은 그의 몸을 모두 태워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불귀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불귀신은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화재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불귀신이 된 지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다.
‘지귀는 마음에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백성들은 여왕의 주문 대문에 붙였고, 불귀신으로 인한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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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14 (황남동)

자가용 이용시 (서울 출발)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서라벌 대로 → 천마총
올림픽대로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 제2중부고속도로 →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서라벌대로 → 천마총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14 (황남동) 출처: 네이버 지도 (경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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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경주 2015
눈부신 문명의 발전과 교류를 이루었던 옛 신라의 가치를 담은 "실크로드 경주 2015" 행사가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에서 열린다.

가족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놀거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와 풍습들을 체험해 보는 것도 경주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출처: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홈페이지 (http://www.cultureexpo.or.kr)
· 글/사진 강민석
· 그림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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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9-2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