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위의 패스포트

예술과 자연의 완벽한 화음, 오스트리아

매일 지루하거나, 매일 신기하거나

쇤부른 궁전

외에 가면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편이다. 도시 간의 이동을 최대한 줄이고, 어떤 경우에는 숙소가 있는 지역도 벗어나지 않는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세 달까지. 여행객이 아닌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움직이는 게 귀찮은 것 같기도 하고……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빈(Wien)이 아닌 다른 도시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행 기간 중 모차르트 음악제가 열리는 잘츠부르크나 동유럽 여행의 거점이라는 프라하, 부다페스트…… 인스타그램으로 사진을 검색할 때마다 일정에 추가할까 생각하다가도 역시 귀찮아서…… 빈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대중교통 수단 무제한 이용가능한 일주일짜리 ‘빈카르테’(비엔나 카드)를 구입할 때, 몇 년 전 빈에 다녀간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둘 중 하나야. 매일 지루하거나 매일 신기하거나. 당시에는 의미심장한 말처럼 들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당연한 얘기였다. 해가 지면 달이 뜬다와 같이 당연한…… 다음 문장 역시 너무 당연한 얘기라 쓰고 싶지 않았지만, 빈이라는 도시를 표현하기에 이만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 반대로 모르는 만큼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앞 공원

알아야 돼?
행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름 휴가지로 빈을 정한 분명한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삿포로행 항공권이 터무니없이 비쌌고, 마침 유럽 직항 중에 가장 저렴했고, 마침 아무 곳이나 빨리 정하고 싶었고…… 여행지를 정하면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견딜 수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간을 견디는 일에는 여행이 제격이니까. 하지만 몰라도 너무 모를 정도로 여행 중에 놀란 일이 많았다. 공원을 걷다가 만난 브람스와 모차르트 동상 앞에선 이게 왜 여기 있지 놀랐고, 별다른 조사 없이 찾아간 알베르티나 미술관에는 이름만 들었던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어 눈이 바빴다. 쇤부른과 벨베데레 궁전의 왕실을 구경할 때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함에 입이 벌어졌다. 가는 곳마다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떤 긍지 같은 것이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랑만 하는 친구를 보는 느낌…… 빈은 주요 역사문화공간들이 링-슈트라세(Ring-Strasse) 주변에 포진되어 있었고, 상점과 식당도 모여 있었으며, 저녁 일곱 시면 문을 닫는 마트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 근처에 있어야만 일정이 가능했다. 숙소를 가깝게 잡을 걸 그랬나, 마트에서 미리 장을 볼 걸 그랬나, 다른 곳으로 갈 걸 그랬나…… 그렇게 조금씩 지쳐갈 즈음에 빈을 벗어나 고사우(Gosau)라는 마을로 향했다.

고사우 마을

고사우 호수 사우. 사실 예정에 없던 곳이다. 오스트리아의 관광지는 빈 다음으로 할슈타트(Hallstatt)가 유명한데, 고사우는 할슈타트에서 산골짜기로 더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이다. 출발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봤고 홀린 듯이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봤다. 예상보다 추가 비용이 많이 들었다. 무리한 일정이었다. 열차에서 배로, 배에서 버스로 반나절 넘게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만년설로 뒤덮인 산 아래 눈부신 초록 평원, 그림책에서나 볼 법한 집들과 유리처럼 반짝이는 호수가 담긴 사진은 낯선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여행을 좋아하면 알게 된다. 그런 순간은 많이 없고 귀중하다는 걸.

고사우 호수

침 일찍 빈 중앙역에서 열차를 탔다. 위의 선배는 이런 말도 했다. 유럽은 기차 여행이지. 나는 기대감을 안고 창밖을 바라봤다. 빈이 자랑하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풍경과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는 일종의 음악적 황홀경을 기대했다. 하지만 열차가 도시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전날 이만 보를 걸어서 일까…… 기절하듯 잠을 자다가 눈을 뜨니 창밖으로 장엄한 산맥이 펼쳐졌다. 열차는 점점 자연 속으로 미끄러졌다. 할슈타트역에 도착해 페리에 몸을 싣고 호수를 건넜다. 백조와 오리가 부표처럼 떠다녔다. 그곳은 잘 지어진 세트장 같았고, 모두 쇼핑백을 들고 가게와 식당을 오가고 있었다. 구경할 새도 없이, 한 시간에 한 대만 운영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반대편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서 하마터면 높은 산봉우리까지 갈 뻔했다. 기사는 친절하게 정류장이 아닌 곳에 내려주며 곧 다른 버스가 올 거라고 말했다. 비가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다시 환승하는 장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가까운 호숫가에서 수영하는 가족들을 구경했다. 그들을 내일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 갑자기 긴장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별로면 어쩌지, 빈에 있을 걸 그랬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는 동안 침을 몇 번 삼켰다. 하지만 평지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건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사우는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곳이었다. 나는 3초에 한 번씩 감탄했다. 미쳤다, 미쳤어.

고사우 호수

사우호수는 알프스산맥에서 흘러내린 물로 만들어진 곳이다.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오는데 그래서인지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이 많았다. 나는 동행과 함께 벤치에 앉아 호수를 구경하다가 해가 저물 시간이라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를 한 뒤 잠깐 잠에 들었고, 자정 무렵 숙소를 나와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들은 입체적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다. 어릴 때 시골에 살아서 별을 많이 봤지만 그렇게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은 처음이었다. 다음날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몸을 말린 뒤 할슈타트역으로 돌아갔다. 고사우를 떠나며,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온다면 그때는 더 오래 머물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먼 미래에 이곳에 다시 올 거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고사우 호수 앞 숙소 전경

빈의 야경과 빈티지마켓 국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는 어땠는지 지인들이 물으면 나의 대답은 매번 같았다. 해외여행 중에 한식당을 간 건 처음이야…… 그만큼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시민들이 사랑하는 인물 시씨(Sissi)는 왕실 요리사를 헝가리 사람으로 교체했다. 왠지 그 마음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대표 음식인 슈니첼(Schnitzel)과 굴라쉬(Goulash)는 식당마다 맛이 달랐다. 다행히 커피와 맥주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빈의 야경

스토랑에서 동행과 저녁 겸 맥주를 마시다 문득 야경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떻게 야경을 안 봤지? 7월의 빈은 밤 10시 즈음에야 해가 저물었다. 곧장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는 시청 광장으로 향했다. 군청색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건축물과 골목길이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고, 나는 내가 중세시대를 걷고 있는 줄 알았다. 살이 탈 정도로 뜨거웠던 햇빛도 거짓말처럼 사라져서 걷기 좋았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시청 건물 앞에 설치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가 아닌 오페라 공연이 상영되고 있었다. 빈 좌석에 앉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의를 꺼내 일행과 반씩 나눠서 입는 사람들을 봤다.

빈티지마켓

요일 아침부터 나슈마르크(Naschmarkt) 시장에서 열리는 빈티지마켓은 혼돈과 질서가 묘하게 섞여 있다. 전쟁 중에 쓸법한 총기부터 최근 시즌의 축구 유니폼까지. 흥정과 호객이 오가고 침묵과 고성이 흐른다. 가격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일단 비싸다고 말했다. 사실 물가를 모르니 뭐가 비싸고 뭐가 싼 지도 알 수 없었다. 빈손으로 나오려다 주황색 스탠드 조명을 샀다. 물건을 팔던 상인은 단 한 번의 흥정도 통하지 않았는데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대신 그는 조명에 대한 설명을 길게 했다. 이거 좋다, 이거 오래 쓴다, 그런 설명들…… 집에 두려다가 최근 와인숍을 개업한 동생에게 선물했다.

빈 필하모닉 공연

빈 필하모닉 공연

의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부터 도시 외곽의 관광지까지 여러 곳을 다녔지만, 그중 가장 강렬했던 경험은 빈 필하모닉 공연이었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클래식은 관심이 없었고, 가끔 피아노 연주곡만 몇 차례 들었을 뿐, 뒤늦게 빠지기에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너무 방대하면서 어렵다고 생각했다. 클래식은 다른 장르보다 어떤 공부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연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빈 사람들에게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은 생활 그 자체였다.
연이 열리는 뮤지크페라인(Muzikverein)에 도착해 미리 예매한 표를 받았다. 관광객들을 위한 오케스트라 공연은 피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여행 마지막 날 필하모닉의 공연 일정이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두 달에 한 번 정도만 있는 공연이었고 가격도 비쌌다. 예매를 할 때에는 공연 내용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건물 밖에서 담배를 태우다 그제야 공연 포스터를 봤다. 라이징 스타. 네 명의 피아니스트. 공연장으로 들어서자 온통 황금빛으로 디자인한 실내가 눈에 띄었다. 직사각형 구조에 2층으로 설계된 공연장은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규모였다. 몇 년 전 베를린에서 방문한 필하모닉 공연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베를린은 현대적으로, 빈은 고풍적으로 느껴졌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연주자들이 하나둘 무대를 채웠다. 검은색으로 통일한 그들 각각의 의상이 멋져 보였다. 가장 늦게 입장한 지휘자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본 공연 전 환영을 의미하는 밴드의 연주가 시작됐다. 나는 내심 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세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연주에 심취했다. 인터미션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라이징 스타로 소개된 피아니스트들은 아마도 그 공연장에서 첫 무대를 가진 것 같았다. 마지막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모두 제 일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공연장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트램에서 그들이 연주한 곡명을 검색했다.
행을 마무리하기에 그보다 더한 경험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민병훈
글 / 민병훈

소설가, 1986년생

저서
장편소설 『달력 뒤에 쓴 유서』, 소설집 『재구성』 『겨울에 대한 감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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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11-3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