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위의 패스포트

인간이 살아갈 방도 - 남극을 떠나오며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온다는 것 늘에 색이 들기 시작했다. 노을의 시간이 길어지더니 어둠이, 밤이 나타났다. 해가 지지 않던 밤이 가고, 별과 달이 빛나는 밤이 왔다. 밤과 낮, 낮과 밤. 밤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백야가 끝나고 극야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온다는 것.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극이 인간에게 길을 열어주는 때는 여름 한철뿐이다. 여름이 끝나면 뱃길도 하늘길도 끝난다. 마지막 항차를 남겨둔 쇄빙선은 이미 기지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헬기 두 대가 배와 기지를 번갈아 오가며 짐을 싣고 내린다. 하계기간 동안 채집한 시료와 연구 장비들이 가고 동계기간을 위한 보급품이 온다. 마지막 보급품이다. 하역과 선적을 마치고 하계연구원들까지 태워 출항을 하고 나면, 기지는 이제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밤이 점점 길어지다가 어느 순간 해가 뜨지 않고 밤만 지속되는 겨울을, 홀로 지나야 할 것이다.

극야에도 매일 같은 시간 해수를 채집하러 나가는 해양생물대원

들 어디론가 가버렸다. 번식을 마친 펭귄들도, 호시탐탐 펭귄알과 새끼를 노리던 도둑갈매기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털에 하얀 성에가 앉은 웨델물범들만이 해안가에 더러 있을 뿐. 볕이 날 때까지는 그렇게 꼼짝 않고 누워 에너지를 비축하다가, 겨울이 오면 상대적으로 따뜻한 깊은 바다로 몸을 숨길 것이다. 물범들은 얼음구멍을 뚫는 고도의 기술을 가졌으니 숨구멍에 코만 살짝 내밀어 숨을 쉬며 겨울을 나겠지.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준 그 예쁘장한 아이는 잘 살아남았을까? 유난히 부끄럼이 많던 아이였는데. 워우웍 워우웍, 딱 그런 소리를 내며 지레 겁먹고 도망가곤 했는데. 부디 포악한 게잡이물범에게도 그리하길.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턱끈펭귄
아직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아기물범

극에서 기상예보는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이다. 기상청에서 파견된 예보관이 여러 데이터를 분석해 매일 아침 기상예보를 한다. 오늘의 날씨가 오늘의 모든 과제보다 우선한다. 기지 사람들의 안전이 그의 예측에 달려 있다. 기온 강수 바람 기압 습도 구름의 형태는 물론이고, 유빙의 움직임과 해빙과 결빙의 순간들까지. 오래 축적된 데이터와 첨단장비를 동원해 예측을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기상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바다의 얼음이 모두 물러가 있었다. 해빙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했는데. 먼 나라 통가 해저 화산이 폭발한 여파가 남극까지 이르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해일이 얼음을 박살내고 육지까지 밀려올라왔다는 걸, 해안의 얼음덩어리를 보고 알았다. 우리가 물범 연구를 하던 바로 그곳까지. 해일이 도착한 시간이 대낮이었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그곳에서 남극의 얼음 해일을 맞아야만 했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송수관이 부서져 며칠간 단수조치가 이뤄졌다. 세면실이 폐쇄되고 급식이 중단되었다. 우리는 한동안 캠핑을 하듯 간편식을 먹으며 지냈다.

해일로 유빙이 모두 밀려가고 적막함만 남은 로스해

지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처럼 유지되어야 한다. 발전기가 고장 나면 심장이 멈춘 것이다, 오폐수 시설, 식료품을 저장하는 냉장시설. 겨울에 기지를 지키는 월동대는 딱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기 통신 발전 안전 중장비 발전. 기지를 지키는 일과 더불어 매일의 연구과제도 수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을 유지하는 일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일은 혹독한 자연을 견디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남극은 남극이었다 년 전 세종기지를 방문했을 때, 월동대원들 모두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월동을 시작했을 때와 다음 해 월동을 마쳤을 때. 그들은 7개월 만에 방문객을 맞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손을 덥석 잡고 구석구석 안내를 해주었다.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음 먼저 흘렸다. 정에 굶주린 시골소년들 같았다. 사람이 그리웠다는 말은 나중에야 입 밖으로 나왔다. 매일같이 가족들과 화상통화를 하고 실시간으로 세상소식을 보고 들었어도, 그리운 건 그리운 거였다. 살냄새를 풍기는 실제 육체를 가진, 낯선 사람의 방문. 사람 냄새를 맡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이 신선한 달걀과 우유라고 생각했더랬다.

기지의 심장부 발전실

자는 아니었다. 18명의 동료들과 함께였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첨단장비로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저장고에는 보급선이 오지 않아도 2년을 버틸 만큼의 식품이 비축되어 있었고, 신선식품이 그리울 때는 식물공장에서 키워낸 상추나 배추를 먹었다. 도서관, 영화관, 체력단련실, 실내골프연습장까지, 여가생활을 위한 나름의 공간도 있었다. 하지만 남극은 남극이었다.

리자드가 한 번 불고 나면 길이 지워지고 색이 사라졌다. 언제 바뀔지 모를 바람의 방향은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매일의 연구과제는 수행되어야 했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통로를 확보해야 했다. 온통 흰빛의 정지된 풍경은 무료하고 갑갑했다. 해가 지지 않는 여름도 밤만 지속되는 겨울도 지긋지긋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위협은 혹독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였다. 밤만 지속되는 겨울에, 제한된 공간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똑같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발과정에 정신분석가까지 동원되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동지 무렵에는 사람들 사이에 살얼음이 끼었다. 세대 간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가 틈을 만들면 그 틈으로 블리자드가 불었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도 툭 스친 손길에도 날이 섰다.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누군가 낼름 먹어버렸다고 빈정이 상해 버렸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아이스크림인데. 냉동고에 가면 똑같은 아이스크림이 넘쳐나는데. 그깟 아이스크림에 괜한 부아를 낸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살얼음은 깨져서도 깨서도 안 되었다.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입김을 호호 불어 제 손을 녹여가며 살얼음의 겨울을 지나갔다.

남극 고지대로부터 얼음을 깎으며 초속 20m로 내려온 활강풍

빙하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 무를 마칠 때가 다가오면서 살얼음도 자연스럽게 녹아 없어졌다. 그러고 나자 그 얼음이 도대체 왜 생겨났던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대신 대견함이 남았다. 힘겨웠던 사람일수록 대견함이 더 컸다. 이발사와 사이가 틀어지면서부터 기르기 시작한 머리가 어깨까지 닿았는데, 그 모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지루해서 시작한 운동량이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세 시간으로 늘었다. 그러다 보니 역삼각형의 근육질 남자가 되었다. 지루함의 몸부림은 사라지고 자랑스러운 등근육만 남았다.

나온 남극의 시간을 풀어놓느라 저마다 우쭐할 때,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며 미소만 짓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에게는 뜨거움도 살얼음도 없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성과나 변화는 없었다. 아무리 들쑤셔 봐도 특별히 힘겨웠던 일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경이로울 뿐이었다고 했다.

한국시간에 맞춰 새해맞이 카운팅을 하고 있는 사람들

는 그저 지켜보았다고 했다. 눈과 바람이 만들어낸 눈길과 물과 바람이 만들어낸 나선형의 고드름이 생겨나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 모양과 길이가 매번 다르고 저마다 아름다웠다. 당신에게 남극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빙하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인간이 살 방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남극을 떠나는 날 극을 떠나는 날 함박눈이 내렸다. 쇄빙선을 타기 위해 헬기를 기다리는 그 잠깐 동안에 어깨 위에 소복이 눈이 쌓였다. 남극해에는 이미 결빙이 꽤 진행되어 있었다. 엉겨 붙고 켜켜이 쌓이고 불쑥 솟아오르며 두터워지는 얼음덩어리들이 꼭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기지에 남아 남극의 겨울을 통과할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의 방도가 아니라 자연의 방도를 깨닫게 될까? 떠났던 펭귄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할 때, 그렇게 다시 봄이 왔을 때.

쇄빙선을 타기 위해 기다린 헬기

자연도 인간도 살 방도를 찾는, 가장 단순한 공간 남극. 그곳에서 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곳에서 과연 나는……

천운영
글 / 천운영

소설가, 1971년생

저서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산문집 『돈키호테의 식탁』 『쓰고 달콤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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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5-2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