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그림 산책

북악산 아랫마을에서 활동하던 동네 화가 - 정선과 <북원수회도>

선(鄭敾, 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북악산 아랫마을에서 활동하던 동네 화가였다. 이후 그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며 정선은 저명한 화가가 되었다. 그 시간은 매우 길었다. 정선은 1676년 백악산(현재의 북악산)의 서쪽 기슭 아래 동네인 한양 북부 순화방(順化坊)의 유란동(幽蘭洞)(현재의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 정선이 태어났을 때 정선의 아버지인 정시익(鄭時翊, 1638~1689)은 39세의 중년이었다. 어머니인 밀양 박씨(1644~1735)의 나이도 33세였다. 정선의 집안은 대대로 명망 있는 사족(士族)이었으나 증조부 이래로 벼슬을 하지 못해 한미한 집안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정선은 몰락 양반의 후예로 살아가게 되었다. 정선이 직면했던 고난은 혹독한 가난이었다. 정선이 14세 되던 해(1689년)에 부친 정시익이 사망하면서 그는 홀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비록 집안이 누대로 벼슬을 못 해 한미하게 되었어도 재산이 있었으면 정선은 열심히 과거 공부에 전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정시익은 곤궁한 유생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가난은 정선에게 대물림되었다.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겸재정동추애사(謙齋鄭同樞哀辭)」에서 정선의 극심한 가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정선은 몹시 가난하여 “밥과 찬이 없는 끼니조차 자주 걸렀으나 일찍이 옳지 않게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밥을 먹기 힘들 정도로 정선은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14세 소년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가난이었다. 조영석이 “일찍이 옳지 않게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라고 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선은 비록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구차하게 이웃의 명문 집안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호소하고 도움을 받으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선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 재능인 그림 잘 그리는 능력을 활용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그림 1. 정선,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 1711년, 비단에 담채, 34.4 x 39.0cm, 국립중앙박물관

선은 화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영석이 “공(정선)은 날마다 정진하고 익혀서 (그림의 기초인) 육요육법(六要六法)을 정밀하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우리 동쪽 나라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 중 이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공은 옛 그림을 널리 보고 공부를 또한 열심히 하여 앞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세상에 많이 내놓았다”라고 말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정선은 그림 공부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림의 기초가 되는 사항을 열심히 익혔으며 여러 옛 그림을 공부하였다. 화가가 된 정선이 20~30대에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명성이 없었던 화가였던 정선은 여전히 곤궁하게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699년 24세 무렵에 결혼한 정선은 먼저 딸 둘을 낳았다. 정선은 이후 두 아들인 정만교(鄭萬僑, 1704~?), 정만수(鄭萬遂, 1710~1795)를 낳았다. 둘째 아들을 낳은 1710년, 정선은 어머니, 부인, 두 아들, 두 딸을 돌보아야 하는 7인 가족의 가장이었다. 1711년 그는 신태동(辛泰東, 1659~1729)의 도움을 받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금강산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금강산의 유명한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며 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그는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온 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을 제작하였다(그림 1). 이후 그의 금강산 그림은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이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림 2. 정선,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 1716년, 비단에 담채, 39.3 x 54.4cm, 국립중앙박물관

선이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화가가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1716년경까지 정선은 인왕산과 북악산 근처에 살았던 세도가들인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의 모임과 행사 장면을 그리는 일을 주로 맡았던 것 같다. 이 점은 그가 1716년 가을에 제작한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에서 살펴볼 수 있다(그림 2). <북원수회도>는 공조참판을 지낸 이광적(李光迪, 1628~1717)이 자신의 회방년(回榜年)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집이 있는 장의동(藏義洞) 일대에 사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베푼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또는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 속에 들어있다. 회방은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만 60세인 회갑을 넘겨 사는 것은 장수를 의미했다. 따라서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지났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회방은 큰 영광과 명예로 여겨졌다.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회방을 기념하여 이광적에게 꽃을 하사하고 대궐로 그를 불러 술을 내렸다. 이광적은 이 해에 89세였다. 그는 1656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들은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되었다.

그림 3. 그림 2의 세부
그림 4. 그림 2의 세부

광적은 회방을 맞이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동네 사람들, 즉 ‘동중인(洞中人)’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연회에 초대된 인물들은 모두 백악산과 인왕산 근처에 살면서 학연과 교유를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동네 사람들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이광적과 가까웠던 15명의 노인들이 참석했으며 이들의 아들과 손자들도 함께 모였다.

<북원수회도>에는 이광적의 집 사랑채에서 벌어진 잔치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방안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노인들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실내의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이광적이 초대한 동네 노인들이며 실내의 오른쪽에는 보이는 인물들은 이들의 아들들이다. 방 안에 있는 아이들은 동네 노인들의 손자들이다. 섬돌에는 잔치를 도울 여성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들 주변에는 음식을 올릴 소반들이 보인다(그림 3). 사랑채 뜰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장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화면에는 머리에 음식을 이고 오는 두 명의 여성들, 마당에 남여(籃輿)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마꾼들, 솟을대문 바깥에 서 있는 마부와 말들, 모임에 늦게 참석했는지 홀로 걸어오는 노인이 나타나 있다(그림 4). 정선은 부감시(俯瞰視)를 사용하여 이광적의 집 주변과 잔치 장면을 포착하였다. 그는 건물의 세부까지 꼼꼼하게 그렸으며 인물들의 자세와 동작을 세심하게 묘사하였다. <북원수회도>는 정선이 이광적의 회방연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그러나 정선은 회방연 장면만을 클로즈업해서 그리지 않고 이광적의 집 전체를 배경으로 잔치 장면을 그렸다. 즉 그는 회방연 자체만을 ‘기록’하지 않았다.

선이 회방연 장면을 그릴 화가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에 살던 고위 관료 및 부유한 양반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716년 3월에 정선은 주변의 추천으로 관상감(觀象監) 소속의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가 되었다. 이광적의 회방연이 열린 것은 이 해 가을이었다. 정선은 천문학겸교수(종6품)라는 관직을 받아 관상감에서 일하는 관료였지만 동네 화가로도 활동했던 것이다. <북원수회도>에 보이는 관지(款識)에는 “북장동인 정선 원백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리다(北壯洞人 鄭敾元伯 敬寫)”라고 적혀있다. 이와 같이 정선은 40대 초에 동네 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는 국중(國中) 최고의 인기 화가로 성장하였다.

장진성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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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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