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그림 산책

나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자화상(自畵像)>(그림 1)은 현존하는 동아시아 자화상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매우 적었다. 그 이유는 신분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직업화가 또는 궁정화가(궁중화가)들은 그림을 그려 생활했기 때문에 자존감이 적어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다. 반면 문인화가들은 문인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학자라고 생각했지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문인화가들 역시 자화상을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서양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화가들이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의 화가들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이들이 자화상을 그린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자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자화상은 자신을 그림 구매자에게 알리는 명함과 같은 그림이었다. 서양의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려 후원자들 및 그림 고객들에게 주었는데 그 이유는 화가로서 자신의 능력과 명성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였다. 자신의 재능을 주변에 널리 알림으로써 더 많은 후원자와 고객을 확보하고 또한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하여 서양의 화가들은 자화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림 1. 윤두서, <자화상(自畵像)>, 1700년 전후, 종이에 엷은 색, 38.5x20.5cm, 해남 녹우당 소장

자는 적지만 동아시아에서 자화상을 남긴 화가들은 문인화가였다. 문인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자의식, 자신이 처해있던 상황 등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중국의 경우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서 또는 만주족에게 명나라가 망했을 때에 일부 문인화가들은 자신이 처해있던 개인적 또는 정치, 사회적 상황을 전하기 위하여 자화상을 남겼다. 문인화가들은 개인적 고난, 사회적 혼란, 망국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화상을 그렸다.일본은 중국 및 한국과 달리 과거제도가 존재하지 않아 문인들이 없었다. 따라서 전근대 일본을 이끈 지식인들은 선승(禪僧)과 학식을 겸비한 사무라이들이었으며 이들은 자화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화가들은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들이었다. 도화서에서 궁중용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던 화원은 중인 출신으로 자의식을 가질 만한 처지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다. 명분을 중시한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문인화가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화상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은 단지 재미삼아 그림을 그린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화가로서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다. 실제로 문인화가였던 조영석(1686~1761)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이것을 알게 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그를 궁궐로 불러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어진(御眞)을 모사하라고 명했지만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왕의 명령임에도 자신은 화가가 아닌 사대부라서 따를 수 없다고 조영석은 항변하였다. 문인화가들은 조영석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자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자화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두서는 왜 자화상을 남긴 것일까?

두서는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윤두서가 이러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당쟁 때문이었다. 윤두서는 남인이었다. 당시 정국을 주도한 정파는 노론이었다. 윤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저명했던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자였으며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宗孫)이었다. 그는 태어난 후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윤이후(尹爾厚, 1636~1699)의 사촌형인 윤이석(尹爾錫)의 양자가 되어 집안의 종손이 되었다. 윤두서는 가문의 종손으로 큰 부자였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한양에서 보냈다. 윤두서는 벼슬하기 위하여 과거 시험에 몰두하였다. 1693년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남인의 정치적 실각으로 결국 벼슬을 포기하고 종가가 있는 해남으로 내려와 살다가 죽었다.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재야 지식인으로 평생을 보냈던 윤두서는 그림을 그려 쌓인 울분을 달랬던 것 같다. 윤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은 벼슬을 하지 못한 재야 지식인들이었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이들은 좌절감, 불만, 스트레스를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를 통해 해소하려고 했던 것 같다. 중국에서도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은 재야 지식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고관(高官)으로 유명한 화가가 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벼슬을 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시간이 많았다. 벼슬이 없으니 이들에게는 공무도 없었다. 벼슬한 사람은 공무에 지쳐 한가하게 그림을 그릴 시간도 없었으며 그림을 그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반면 재야 지식인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학문에 매진하거나 또는 그림을 그려 가슴 속의 울분을 삭였다.

그림 2. 윤두서, <채과도(菜果圖)>, 《윤씨가보(尹氏家寶)》, 1700년 전후, 종이에 수묵, 30.0x24.2cm, 해남 녹우당 소장

《윤씨가보(尹氏家寶)》에 들어있는 윤두서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가 그림에 매우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채과도(菜果圖)>(그림 2)는 그릇에 담겨있는 수박, 참외, 가지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이다. 윤두서는 서양화법으로 음영법(陰影法)으로도 불리는 명암법(明暗法)에 정통했다. <채과도>는 그가 명암법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그는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명암을 만들어 수박, 참외, 가지의 모습을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해 냈다. 윤두서의 이러한 화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은 <자화상>에서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뚫어져라 앞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정교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보통 초상화를 그릴 때 화가는 먼저 종이에 밑그림을 그린다. 이후 그는 이 밑그림을 비단에 옮겨 그려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처음부터 종이에 그려졌다.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보통 종이에 그려졌다. <자화상>에 나타난 윤두서의 모습은 문인이라기보다는 기골이 장대하고 좌중을 압도할 것 같은 위엄을 지닌 무인(武人)과 같은 모습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예리한 눈빛, 굳게 다문 입술에서 윤두서가 매우 강건한 기질과 과묵한 성품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하여 차마 그의 눈을 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자화상의 압권은 바로 털의 묘사에 있다. 윤두서는 얼굴에 나 있는 털 하나하나를 매우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그렸다.

섬세한 묘사, 정교한 붓질

그림 3. 그림 1의 세부

염과 구레나룻의 묘사는 너무도 섬세해서 보는 이들을 경탄하게 만든다(그림 3). <자화상>에서 윤두서는 직업화가들을 능가하는 마치 고도의 장인적인 솜씨로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먹으로 그리기 때문에 작은 실수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림에서 이와 같이 정교한 붓질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 자체가 실로 놀랍다. <자화상> 속의 윤두서는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면을 꿰뚫어 보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서 평생 벼슬을 꿈꿨으나 남인이었기 때문에 벼슬을 포기해야 했던 그의 울분과 분노를 느낄 수 있다.이 자화상을 통해 윤두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형형한 눈빛에서 그가 지니고 있었던 자의식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림 4. 그림 1의 세부

<자화상>은 정교하고 세밀한 붓질, 완벽한 구성상의 균형과 조화, 살아있는 것과 같은 생동감과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술적인 완성도 외에 화가 자신의 내면 의식을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화가들의 자화상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자화상>과 같은 강렬한 자화상은 동아시아 그림 중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그림은 현재 얼굴 부분만 남아있지만 본래는 몸체까지 그린 그림이었다. 목탄으로 몸체가 그려졌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몸체를 그린 부분이 완전히 지워져서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이다. 윤두서 이전의 동아시아 화단에서 <자화상>과 같은 강렬한 자화상은 그려진 예가 없다. 또한 1700년 이전에 윤두서의 <자화상>과 같이 정교하고 사실적인 자화상은 그려지지 않았다. 윤두서가 <자화상>에서 선보인 극사실적인 사생(寫生) 능력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윤두서의 <자화상>은 정면상이라는 혁신적인 구도, 극도의 사실적인 묘사, 강렬한 자의식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동아시아에서 그려진 자화상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림이다.

장진성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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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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