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그림 산책

그는 과연 물을 보고 있는 것일까?

꽉 찬 화면 구성, 대담/강렬한 필묵법

그림 1. 강희안, <고사관수도>, 15세기중엽,
24.3x15.7cm,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선 초기의 문인화가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그린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이 그림은 크기(세로 24.3cm, 가로 15.7cm)가 아주 작은 그림이다. 그러나 작은 크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고사관수도>는 꽉 찬 화면 구성과 대담하고 강렬한 필묵법(筆墨法)을 보여주고 있다. 물가 주변의 바위에 한 문인이 턱을 괸 채 몸을 기대고 있다. 이 인물의 위에는 거대한 바위로부터 넝쿨 풀이 밑으로 뻗어 나가 있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는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와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들이 보인다. <고사관수도>의 작자는 오랫동안 강희안으로 전해져 왔다. 그 이유는 화면 왼쪽의 윗부분에 있는 ‘인재(仁齋)’라는 도장 때문이다. 강희안의 호는 인재이다. 아울러 강희안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인재라는 도장과 강희안이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고사관수도>는 그의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인재라는 호를 가진 사람은 많았다. 강희안의 이름인 희안(希顔)은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회(�回)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그가 인재라는 호를 가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이 그가 숭상한 유학 때문이다. 강희안의 동생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다. 그의 이름인 희맹은 맹자(孟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유교식 이름인 희안과 인재라는 호는 조선 전기에 상당히 유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공신인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의 호도 인재이다. 강희안과 성희안은 이름도 같았지만 호도 같았다. 따라서 <고사관수도> 위에 찍혀있는 ‘인재’라는 도장이 강희안의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도장의 주인공은 성희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사관수도>를 누가 그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편 <고사관수도>의 화풍(畵風)을 살펴보면 이 그림은 15세기 중반경의 그림이라기보다는 100년쯤 아래인 16세기 중반경의 그림이라고 여겨진다. 강희안은 15세기 중반인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시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 나타난 화풍은 16세기 전반에 중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화풍인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의 화풍이다. 이 화풍은 장로(張路, 1464년경~1538년경), 장숭(蔣嵩, 1500년경 주로 활동)으로 대표되는 후기 절파(浙派) 화풍으로 대담한 화면 구성, 호방(豪放)한 필묵법, 바위묘사에 있어 농담(濃淡)의 대비를 통한 강렬한 흑백 대조를 특징으로 한다. 절파는 15, 16세기에 유행했던 중국의 화파로 직업화가들이 주축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명나라 궁궐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절파 화풍은 이곽파(李郭派)와 마하파(馬夏派) 화풍을 수용하여 강한 먹의 농담 대조, 한쪽에 무게를 둔 화면 구성, 거칠고 변화가 심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는 도대체 어딜 보고 있는가

그림 2. 장숭, <어주독서도>, 16세기초, 비단에 엷은 색,
171.0x107.5cm, 북경 고궁박물원

표적인 광태사학파 화가인 장숭이 그린 <어주독서도(漁舟讀書圖)>를 보자. 장숭은 거대한 절벽을 시커먼 먹과 넓은 붓을 사용해 단번에 쓸어내리듯이 그렸다. 한편 이 그림의 아래쪽 물가에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와 갈대는 <고사관수도>의 화면 왼쪽 아래에 그려진 바위 및 갈대와 매우 유사하다. 아울러 바위 묘사에 매우 진한 먹인 ‘초묵(焦墨)’이 사용된 것도 이 두 그림이 지닌 공통점이다. 만약 <고사관수도>가 15세기 중반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할 경우 이 그림은 <어주독서도>보다 대략 50~60년 정도 일찍 그려진 것이 된다. <고사관수도>는 중국의 절파 화풍이 한국에 수용되어 탄생한 그림이다. 따라서 <고사관수도>가 <어주독서도>보다 먼저 그려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사관수도>의 경우 작자 및 제작 시기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그림의 주제이다. 본래 이 그림에는 제목이 없다. ‘고사관수’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사관수’는 ‘고사가 물을 보고 있다’는 뜻인데 동아시아회화사에서 ‘고사관수’라는 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사가 바위에 기대어 물을 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은 없다. 고사가 산속에서 폭포를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있다. 아울러 고사가 물가 근처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장면, 즉 ‘청천(聽川)’을 주제로 한 그림은 있다. 그러나 문인이 바위에 양팔을 기댄 채 물을 보고 있는 모습인 ‘고사관수’를 주제로 한 그림은 없다. 그런데 <고사관수도> 속 고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과연 그가 물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의 시선은 물에 가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바위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제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림 3.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 『개자원화전(芥子園�傳)』 (초편(初編), 1679년)

국의 화보(畵譜)인 『개자원화전(芥子園�傳)』(초편(初編), 1679년)의 권(卷) 3 「인물옥우보(人物屋宇譜)」에 들어 있는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이라는 판화를 보면 바위에 기대어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인물이 나타나 있다. 그 동안 <고사관수도>와 ‘고운공편심’의 유사성에 근거해 이들의 원조(元祖)가 되는 제3의 중국 그림이 존재했을 것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고사관수도>는 연대에 있어 ‘고운공편심’보다 빠르며 <고사관수도>와 유사한 화면 구성을 보여주는 중국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운공편심’에 보이는 바위에 기대어있는 인물은 어떤 것을 응시하고 있다. 반면 <고사관수도> 속 인물은 무엇인가를 쳐다보고 있지 않다. 그는 턱을 괴고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그는 물을 보고 있지 않다.

장자몽접, 호접몽

그림 4. 장로, <장자몽접도>, 16세기초, 크기미상, 비단에 수묵, 쇼토미술관, 토쿄

<고사관수도>의 주인공처럼 마치 자고 있는 듯한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는 장로(張路)가 그린 <장자몽접도(莊子夢蝶圖)>가 있다. 장자가 꿈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는 고사가 바로 이 그림의 주제이다. ‘장자몽접’은 ‘장수몽접(莊�夢蝶),’ ‘장주지몽(莊周之夢),’ ‘호접몽(胡蝶夢),’ ‘호접지몽(胡蝶之夢),’ ‘호접춘몽(胡蝶春夢)’으로도 불린다. ‘장자몽접’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몽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자는 어느 날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잠에서 깬 장자는 인간인 자신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자신으로 변한 것일까라고 자문(自問)하였다. 그는 하늘과 땅이 자신과 함께 생기고 만물은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호접몽을 통해 깨달았다. 만물이 하나가 된 경지는 장자가 주장했던 정신의 절대 자유의 세계이다. <장자몽접도>에서 장자는 좌우 곁에 호리병과 두루마리들을 두고 깊은 잠에 빠져있다. 장자의 머리 위로는 넝쿨 풀이 무성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장자몽접도>와 <고사관수도>는 화면 구성과 주인공의 자세에 있어 매우 유사하다. <고사관수도>가 장로, 장숭 등 광태사학파의 화풍을 바탕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장자몽접도>와 <고사관수도>는 화풍상(�風上)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고사관수도>의 주제 역시 장자의 꿈을 다룬 ‘장자몽접’일 확률이 높다. 절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에는 <장자몽접도>와 같이 고사(故事) 또는 역대의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逸話)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그림 5. 그림 1의 세부

<고사관수도>의 주인공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물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장진성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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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7-2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