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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여전히 진행 중인 선택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 오드리 디완의 영화 <레벤느망>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 오드리 디완의 영화 <레벤느망>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 VS 오드리 디완의 영화 <레벤느망>

벨문학상은 특정한 작품 하나라기보다 작가의 생애 전부에 주어진다. 2022년 수상자 아니 에르노를 보면 더욱 그렇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라는 선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범주를 따지자면 자전적 소설에 묶이겠지만 때로는 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수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릇 자기의 실제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제3의 서술자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는 근대 이후 소설의 명제를 생각해본다면,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늘 논쟁적이었다. 그런 아니 에르노의 작품 중에서도 체험의 시점에 비해 매우 늦게 출간된 소설『사건』이 동명의 영화 <레벤느망>으로 연출되었다. 1963년 10월에 시작된 이야기는 1964년 1월 21일에 끝난다. 3개월간 임신했었고, 불법으로 낙태를 했다. 그렇다면 과연 ‘사건’은 무엇일까? 임신일까, 낙태일까 아니면 그것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일까?

영화 <레벤느망>은 2021년 제78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964년 발생한 ‘사건’은 2000년에서야 출간되었다. 24살 생물학적으로 매우 어렸던 나이에 겪었던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40년 가까이 흐르고야 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이미 기록은 남겼지만, 그 기록을 다시 서술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태아를 ‘그것’이라 부르고 의사를 찾아가 중절 시술을 요구하지 못하고 ‘생리를 다시 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사진: Unsplash의Gonzalo Kenny

냐하면,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 중절은 병원에서조차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임신 중절 시술을 집도한 자, 의사들, 산파 전문의들, 약사들, 임신 중절 시술을 추천하고 용이하게 한 이들, 스스로 임신 중절에 나선 여성 혹은 동의한 여성, 임신 중절을 선동하고 피임을 선전한 자들은 모두 범법자가 되었다. 의사들은 중절이라는 단어를 꺼내지도 못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조차 고민을 나눌 수 없다. 임신과 낙태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퇴학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화의 주인공 ‘안’은 훌륭한 문학도이며 작가가 되고 싶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대학을 떠나는 수많은 여학생들처럼 학교를 떠나 학업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안에게 계획에도 없이 생겨버린 ‘그것’은 미래를 훼방 놓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미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안은 위험천만한 민간요법을 스스로에게 가하기도 하고 그마저 실패하자 결국 불법 시술자를 찾아 나선다. 이 모든 과정을 영화는 ‘안’으로 보여준다.

사진: Unsplash의 Taylor Deas-Melesh

화가 갖는 매체적 특성 때문에, 우리는, 관객은 ‘안’의 행위와 움직임을 통해 그녀를 보게 된다. 안의 눈빛, 걸음걸이를 통해 불안을 읽고, 목소리를 들으며 두려움을 짐작하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장면을 통해 안의 고립감을 발견한다. 세자르 영화제에서 신인여배우상을 수상한 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를 통해 관객들은 미처 상상해 내기 어려웠던 고독과 불안, 의지와 두려움을 목격하게 된다. 이 목격의 체험이 소설을 읽을 때 경험하는 상상적 공감과 완전히 다른 질감을 선사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결국 낙태가 성공한 순간은 그 모든 감정들을 압축적으로 폭발시키는 시각적 충격으로 전달된다.

면 소설은 읽는 내내 ‘나’의 내면적 고통과 불안을 훨씬 더 고백적으로 전달하며 무엇보다 그런 불합리한 긴장 속에 똑똑하고 건강한 20대 여성을 던져놓아야 했던 세상의 부조리를 선명히 제시한다. 자기 연민을 배제한 냉정한 묘사는 강렬한 감각으로 독자를 휘어잡는다. 특히 소설에서 강조되는 것은 프랑스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계급과 계층에 대한 인식이다. 노동자, 소상공인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고등교육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 자체가 희박하다. 임신한 20대가 된다는 것은 계급을 탈출해, 다른 계층이 되는 그 작은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 꿈과 미래와 같은 불투명한 낭만어는 소설 속에 훨씬 더 현실적인 언어로 대체되어 있다. 가난, 계층, 계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낙태를 선택한다고 말이다.

사진: Unsplash의Marcelo Leal

런 선택의 당위성은 병원에서 만난 같은 대학 수련의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수련의는 낙태 성공 후 하혈 때문에 병원에 실려 온 ‘나’를 하위 계층 여성인 줄 알고 하대하고 멸시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민망해한다. 임신, 출산, 그리고 임신 중절은 얼핏 전적으로 개인의 욕망에 묶인 사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우 사회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우는 비련의 여주인공과 같은 사치스러운 신파는 『사건』에 끼어들 틈이 없다.

신 영화 속에선 동급생들, 같은 수업을 듣고 기숙사에 머무는 당시 또래 여성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훨씬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오토픽션(Auto-fiction)의 특성상 소설이 완전히 나에게 몰입해, ‘나’ 중심의 주관적 세계의 고백이자 형상화라면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세상 속의 ‘나’를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임신 후 허기로 친구들의 음식에 손을 대고, 단체 샤워실에서 예민해지는 모습, 조금이라도 남성과 가까워질 요량이면 서로를 헤프고 위험한 여자 취급하는 기숙사 친구들을 보자면 마치 보호색으로 몸을 감춘 채 떨고 있는 여린 초식동물들을 보는 듯하다.

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임무, 낙태가 성공하는 순간, 출산과 버금가는 고통을 삼키는 ‘안’의 억눌린 비명에 달려와 주는 사람은 기숙사 친구이다. 보수적이면서도 융통성 없어 보였던 그녀조차 차마 ‘안’을 외면하지 못한다. 안의 몸에 매달린 이질적이면서도 참담한 ‘그것’을 안이 해결할 수 없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하자, 그녀는 손을 내민다. 그것이 그녀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을, 당시의 관습과 도덕을 위배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안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 Unsplash의Josh Applegate

사가 ‘낙태’라고 쓰느냐, ‘유산’이라고 쓰느냐에 따라 학적부에 남겨질 기록이 달라진다는 두려움도 의사의 ‘유산’ 선언으로 사라진다. 법은 잔인하고 폭력적이었지만 그 주변의 사람들은 오히려 무릅쓰고 친절을 베푼다.

소설 속 ‘나’는 사건이 지나간 이후, 또 다른 오후 어느 날, 신부에게 중절 사실을 고해한다. 그러나 성당에 공감은 없고, 신부에게 속죄를 돌려받지는 못한다. 그날 ‘나’는 “종교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라고 쓴다.

람은 살아가면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절체절명의 순간, 해야만 하는 선택 앞에 놓인 순간 삶은 비극이 된다. 법, 관습, 생명의 경계, 모든 것을 위반해야 하는 두려움 앞에 결국 자기만의 선택을 한 주인공, 영화 속 ‘안’과 소설의 ‘나’는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다.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가 합법화되기 전에 매년 250여 명의 여성이 불법 임신 중절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다행히 ‘나’, ‘안’, 아니 에르노는 생존했다.

사진: Unsplash의Koshu Kunii

니 에르노는 여전히 투쟁하며 살아간다. 세상이 허락하는 쉬운 길을 편하게 걸어가는 데에 아니 에르노는 만족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열흘 뒤인 2022년 10월 16일 아니 에르노는 물가 상승에 따른 대책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 선두에 섰다. 아니 에르노의 말과 글은 생존 기록을 넘어서는 고발이자 현실을 바꾸는 무기이다. 내 삶을 던져 다른 삶을 건져낼 수 있는 작가, 영화 <레벤느망>과 소설 『사건』은 그런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강유정
글 / 강유정

강남대 글로벌문화학부 교수, 1975년생

저서
『타인을 앓다』 『시네마토피아』 『영화글쓰기강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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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4-2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