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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이 아름다워지는 순간 - 코리안 루트를 따라서


탐험이 아름다워지는 순간 - 코리안 루트를 따라서 탐험이 아름다워지는 순간 - 코리안 루트를 따라서

SUMMARY

블루아이스에서 운석 찾기
74° 37.4'S, 164° 12.0’E.
남극 탐험의 시대

 로스빙벽
로스빙벽

블루아이스에서 운석 찾기​

남극에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블루아이스에서 운석 찾기. 극지연구소 지질운석 팀에서 운석을 찾는 과정은 <파이어볼>이라는 헤어조크 감독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다. 광활한 블루아이스 위에서 붉은 옷을 입은 대원들이 오 미터 간격으로 열을 지어 전진하던 모습. 감독은 그 장면을 헬기 안에서 먼 거리로 제법 긴 시간 동안 촬영했는데,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블루아이스 위에서, 어디 있을지 모를 운석을 찾겠다고, 그저 한 발 한 발 전진할 뿐인 인간의 한없이 작은 모습은, 고독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해 보였다. 이윽고 주먹만 한 운석을 발견한 한 지질학자가 눈물을 터뜨렸을 때, 그 눈물의 온도를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우주에서 날아온 돌 하나에, 왜?

 k루트 선단
k루트 선단

새해 첫 날. 나는 k루트 카라반에 특별보급품을 배달하는 헬기에 동승할 기회를 얻었다. 기지에서 220km 떨어진 데포에 들러 중간 급유를 한 다음, D2 빙저호 탐사팀과 k루트 전진팀 카라반을 차례로 방문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월동대원과 연구원들은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브라우닝 산으로 새해맞이 등반을 떠났다. 해가 지지 않는 밤을 보냈으니 의미심장하게 맞이할 일출도 없는 밋밋한 새해 아침이었지만 새날은 새날이었다.

한국에서 신년인사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는데, 새해선물을 보내려 하니 기지주소를 알려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글로벌 특급배송으로 보내면 아무리 남극이라도 2~3주면 도착할 거라고 자신하는 걸 보니 그저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께’ 라고 적힌 카드가 내 손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위경도만 찍으면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무엇이든 드론 같은 걸로 배달이 되는 날이. 그런데 주소를 뭐라고 알려줘야 하나?

74° 37.4'S, 164° 12.0’E.

남극, 북빅토리아랜드, 테라 노바 만, 장보고 기지. 아니면 74° 37.4'S, 164° 12.0'E.
오십 일 넘게 기지를 떠나 카라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해맞이 특별선물로는 신선식품 만한 게 없다. 계란, 유제품, 채소, 과일. 기지 안에서도 귀하디귀한 음식을 헬기에 싣고 하늘을 날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산타클로스의 썰매다.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본 남극대륙은 아름다웠다. 그 이상의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세상의 모든 감정을 흰 빛으로 발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롭고 뜨겁고, 두렵고 감미롭고, 섬뜩하게 황홀하고, 은밀하게 위험하고, 서글프게 부드러웠다. 빙하는 말 그대로 흐르는 얼음이었다. 눈의 문양은 바람의 속도였다. 크레바스는 아찔하게 매혹적이었다. 깊이와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희고 고운 입자들만이 한없이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때까지 들었던 모든 감정과 느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저 흰 빛. 그렇게 마지막 남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저 길을 가야 한다면.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저 흰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아름답고 쓸쓸한 남극 내륙
아름답고 쓸쓸한 남극 내륙

먼저 도달하리라!

탐험의 시대를 생각했다. 누구보다 먼저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쟁하던 시대. 정복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개썰매를 끌고 개를 잡아먹어가며 기어이 남극점에 최초의 깃발을 꽂은 아문센과, 최초뿐 아니라 탐험대 전원의 목숨을 잃게 만든 실패자이지만 끝까지 과학탐험을 놓지 않았던 스콧과, 대륙에 들어가기도 전에 난파되어 빙벽에 갇힌 채 634일을 견디고 전 대원이 무사히 귀환한 인듀어런스호의 섀클턴까지. 남극탐험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인물들 중에, 과연 누구의 방식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들은 왜 그렇게까지 애를 쓰는 걸까.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얼 얻기 위해.

헬기에서 내리는 순간 살이 에인다는 말이 몸에 속속들이 들어와 박혔다. 두툼한 방한장갑을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마비된 듯했다. 헬리콥터 로터 돌아가는 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고글 틈으로 비어져 들어와 볼이 쓰라렸다. 두려움은 공포로 변했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긴장을 늦추면 안 되겠구나. 두려움만이 나를 살리겠구나.
D2지점은 남극 해안에서 내륙으로 430km 떨어져 있고 해발 2천 미터가 조금 넘는 곳으로 한여름에도 영하 2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간다. 빙저호 탐사와 운석탐사를 위한 베이스캠프다. 빙저호팀은 빙하 아래 존재하는 호수의 지도를 그린다. 열시추 전문가가 빙하에 구멍을 내면, 탄성파 전문가가 그 구멍에 폭약을 설치하고, 인공적으로 지진파를 만들어 분석해 빙하 아래의 지형과 수로를 파악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
빙저호팀 이글루 내부
빙저호팀 이글루 내부
빙저호팀 이글루
빙저호팀 이글루

빙저호(Subglacial lake)는 남극대륙 빙하 아래에 있는 호수다. 1976년 동남극에서 최초로 발견된 이후 남극대륙에 400여 개 이상의 빙저호가 존재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다. 처음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1980년대만 하더라도 빙저호 환경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무균 상태일 거라 예상했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가 두꺼운 얼음 층을 투과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수백만 년이 지났을 테니까. 하지만 미국의 윌란스 빙저호(Lake Whillans) 탐사에서 4천여 종에 이르는 박테리아와 고세균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니까 빙저호 팀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박테리아를 찾기 위해 그 추위 속에서 빙하를 뚫고 있는 것이다.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빙하 아래, 빛도 들지 않는 호수의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진팀은 그곳 D2까지 가기 위한 길을 내는 것이다. 크레바스를 피해 일일이 탐침을 꽂아 안전을 확보하며. 다음 목적지 돔C 프랑스-이탈리아 콩코르디아 기지까지 같은 방식으로, 총 1740km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헬기에서 내려 카라반까지 불과 십여 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나는 죽음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들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캠프에서 있었던 일들을 끝도 없이 풀어냈다. 씻지 않고 버틴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태우지 않고 얼려둔 배설물이 얼마나 쌓였는지. 고장 난 발전기 때문에 얼마나 춥고 힘든 날들을 보냈는지. 방문객을 위해 그들이 직접 눈을 깎고 쌓아서 만든 이글루에 들어가 커피도 나눠 마셨다. 산타클로스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k루트의 성과는 내게 그저 숫자에 불과했었다. 해안이 아니라 내륙기지를 운영하고 다양한 연구 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육상루트 확보는 나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했었다. 꼭 극점에 가까운 곳에서 과학연구를 해야 하는지에 의문을 가진 사람 중에 하나였다. 어쩌면 나는 탐험과 루트를 정복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아문센이 그랬던 것처럼.
후에 기지로 귀환한 k루트 팀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직 대원들의 안전만을 생각했다는 산악인 출신의 안전대원들과, 카라반 발전기 피스톤불리 같은 선단의 모든 장비들을 자신의 몸보다 귀히 여기는 중장비대원들과, 영하 40도의 추위에서도 맨손으로 전선을 연결해 폭발물을 설치해야 했던 통신대원과, 침울한 순간마다 특유의 쾌활함으로 긴장을 풀어주던 스물 세 살의 해병대 출신 청년과, 매일 아침 눈얼음을 녹여 물을 만들고 대원들의 식사를 챙겼던 의사선생님과, 전진과 퇴보 사이에서 위험과 좌절의 순간에 결정을 내려줘야만 했던 대장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임무와 역할이 달랐지만, 그 모든 구성원이 가지고 있던 한 가지의 목표는 이것이었다. 살아서 돌아간다. 오래전 탐험의 길을 걸었던 아문센과 스콧과 섀클턴이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

탄성파팀
탄성파팀
빙하 협곡을 따라 모여있는 물범들, 사진에는 검은 점처럼 보인다.
빙하 협곡을 따라 모여있는 물범들, 사진에는 검은 점처럼 보인다.
빙하는 흐른다.
빙하는 흐른다.

출남극을 며칠 앞두고 마침내 나는 마지막 운석탐사에 동행했다. 이전에 11kg에 달하는 거대운석을 발견했다는 엘리펀트 모레인 블루아이스 지역이다. 블루아이스는 빙하가 태양빛에 녹기도 하고 강력한 활강풍에 깎이기도 하면서 표면의 눈이 벗겨지며 푸른색의 속살을 드러낸 빙하다. 수백 수천 년 쌓이고 다져져 만들어진 얼음덩이를 깎아낼 정도니, 바람의 세기가 사람이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억세다. 내가 경험한 가장 추운 곳이었다. 몇 분 만에 카메라 장비가 꺼졌다.

블루아이스
블루아이스

남극에서 운석을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아니라 얼음 위에서 티끌 찾기. 운석을 직접 본 적도 없는 초보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대체 무얼 눈여겨봐야하는지, 가도 가도 흰 눈과 푸른 얼음뿐. 몇 겹으로 껴입은 탓에 움직임은 굼뜨고 공기는 확연히 희박했다. 이렇게 계속 걷기만 한다고 없는 운석이 나타날 것도 아니고. 한 개도 찾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다. 무전기에서 운석을 찾았다는 빙고 소리가 들리면 조급함은 더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운 건 결코 아니었다. 이 지구도 언젠가 우주의 파편이 되어 머나먼 행성에 운석으로 떨어지는 날이 있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두려움이 들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얼음과 바람과 태양빛만 오롯하게 느껴지던 어느 순간, 내게서 나오는 숨소리만 가득한 그 순간, 운석이 나타났다. 내가 찾았다기보다 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빙고,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먼지만큼의 비밀을 공유한 기분이 들었다. 우주와 교신을 튼 느낌. 고마웠다.
내 눈 앞에 나타난 운석은 소멸하지 않은 우주의 파편. 태양계 생성과정의 초기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이 기록된 역사서.
누군가는 빙하를 파고 들어가 지구생명체의 기원과 진화의 메커니즘을 알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블루아이스를 걸으며 외계생명체의 존재 여부와 생존방식에 대한 단서를 찾고. 또 누군가는 바다 깊은 곳에 마이크로폰을 넣고 심해어의 움직임을 그려보고. 또 누군가는 또 무언가를 향해 한 걸음 할 걸음 걷고 있는 그 시간. 탐험의 시간은 그리하여 아름다워진다.

블루아이스 위 운석
블루아이스 위 운석
천운영
글 / 천운영

소설가, 1971년생

저서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산문집 『돈키호테의 식탁』 『쓰고 달콤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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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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