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성작가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은 이탈리아의 여성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이다. 고향인 나폴리를 배경으로 딸, 아내, 엄마를 주인공으로 연대기적으로 그려낸 ‘나쁜 사랑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뒤이어 나온 ‘나폴리 4부작’(『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녀는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가디언》지의 칼럼에서 그녀는 “페미니즘 역사가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완전한 우리가 될 수 없고, 우리 스스로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결점, 잔인함, 죄, 미덕, 기쁨, 언어, 이 모든 것은 남성의 위계 속에 순종적으로 새겨져 있으며, 실제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규범에 따라 처벌되거나 칭찬받으면서 우리는 지쳐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주성을 지니고 우리가 누구인지 입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본명도 숨기고(‘엘레나 페란테’는 필명),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녀의 소설에는 여성에 대한 그녀의 관점이 잘 묻어 있다. 7편 모두 여성의 삶과 정체성을 향하고 있다. 주인공들은 단순히 억압된 여성,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차별과 고통에 피상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 본질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일관성도 지닌다.
페란테의 여성들은 섬세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 민감하며 자존감이 높다. 깊고 날카롭고 격정적이며 잔인하리 만치 냉정하고 거침이 없다. 이런 그들의 의식과 감정을 페란테는 솔직하고 적나라하며 때론 원초적이고 파괴적인 언어와 서사로 드러낸다. 생생하고 감각적인 문장은 추상적으로 표현되곤 하는 여성 정체성의 의미와 모습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통찰한다.
그렇다고 페란테의 소설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으로만 꼭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같은 접근은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손해일지 모른다.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에 의해서만 억압되고 상실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남성이 여성의 적’이란 이분법적 시각은 페란테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여성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감정들을 공유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페미니즘
거창하지 않다. 구호를 외치며 제도와 역사를 향해 부딪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인공 각자의 삶과 인간관계, 연대 속에서 상처를 확인하고 그것을 넘어 ‘여성의 진정한 자아찾기’를 섬세하고 끈기 있게 모색한다. 그 길에 비극도 있고, 상처도 많지만 굳이 ‘여성’으로만 가둘 필요는 없다. 비록 페미니즘을 자처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나’와 ‘여성’에서 ‘나’만을 무조건 옹호하고 선택하는 극단과 무모함에 빠지지 않는다.
결말부터 던져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잃어버린 사랑』을 보자. 스물셋과 스물다섯 살의 딸을 둔 마흔일곱 살의 대학 영어강사인 레다가 자신의 삶으로 ‘모성애란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묻는다. “모성애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인가?” “여성에게 아이는 정말 신의 축복일까?” “어머니로서 당신은 어떤 모습인가?” “어머니란 굴레에 갇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가?”
두 딸이 헤어진 남편에게로 가버린 후 해변으로 여름휴가를 온 레다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아름답고 젊은 여성 니나와 그녀의 어린 딸 엘레나이다. 흔한 휴양지의 풍경이고, 스쳐지나가도 그만인 만남이다. 그런데 레다는 니나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여성의 정체성에, 모성애의 실체에 접근한다.
그녀가 어머니와 두 딸에 대한 회상으로 드러내는 모성애는 기존의 숭고하고 아름답고 희생적인 모습만이 아니다. 모성애가 주는 행복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주체적 삶을 위해 그것을 깨버리는 모습은 어둡고 무섭고 가식적이며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중적이다. 레다의 어머니가 그랬고, 레다 자신이 그랬다.
어린 딸을 두고 늘 도망쳐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해 자신은 절대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한 레다. 그녀는 임신도, 출산도, 그리고 심지어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진정한 내 모습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서’ 어린 두 딸을 버리고 떠난 것도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3년 뒤에 ‘아이들과 함께할 때보다 아이들이 없을 때 내 자신이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더 절망적’이어서 돌아온 것도 역시 자기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어머니로서 삶의 가치와 정체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모성에 대한 그녀의 이중성은 ‘내 몸 안에 있는 생명체를 격렬하게 사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벌레의 독처럼 혐오하고’, 내가 만든 생명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나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딸을 사랑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싶은 마음과 딸들을 추방하고 자신만의 삶을 찾고 싶은 레다에게 니나는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이고 딸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매달리는 엘레나가 미워 그의 인형을 훔치고, 니나가 남편과 아이로부터 벗어나 자기의 삶을 살아가도록 설득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레다는 안다. 어머니로서 ‘미래에서 내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절망과 후회는 없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고 모든 일이 뻔하게 느껴져서 감각이 무뎌지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어지러이 뒤얽힌 욕망과 꿈의 타래 이외의 그 어떤 번뇌도 나의 사유를 방해하지 않는 그런 상태’이니까. 그래서 딸들의 “엄마! 뭐하세요? 왜 통 전화를 안 하셨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알려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란 장난기 섞인 말에 “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단다”라고 웃으면서 말해 줄 수 있다.
소설과 다른 2가지
매기 질렌할 감독의 <로스트 도터>는 소설보다 생동감이 있고 자극적이다. 두 가지가 달라서 그렇다. 소설이 레다의 회상에 무게를 많이 둔 반면, 영화는 현재에 시선을 더 오래 두면서 니나(다코타 존슨 분) 가족들과 레다(올리비아 콜맨 분)가 훔친 엘레나의 인형으로 스릴러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양한 감정을 담은 레다의 시선, 눈웃음과 눈물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한다. 또 하나는 소설이 딸들과의 관계와 감정으로 레다의 모성애에 천착했다면, 영화는 어머니가 아닌 성적 욕망과 선택의 자유를 갈구하는 여성으로서의 레다에게도 비중을 두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과 변주이다. 끝이 어디를 향하든 페란테의 문장이 아닌 영상으로 레다의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이중적이고 미묘하고 대립되는 감정과 의식을 드러내고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여성감독의 섬세한 감성과 터치로 소설에서의 그것들을 비교적 충실히 표현하려 애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이탈리아 소설이 미국 영화로 넘어오면서 바뀐 작은 변화들이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영화의 욕망인 대중성도 무시할 수 없다. 오로지 여성의 자아 찾기에만 집착하는 페미니즘 영화는 남성 관객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도 그것을 알고 있다. 큰 줄기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레다가 딸들에게 오렌지 껍질을 끊어지지 않고 뱀 모양으로 벗겨주는 것이 가진 상징성의 확장, 딸들에게 모질게 했던 행동의 깊은 후회로 모성애를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나면 제목이 서로 바뀌었다는 느낌이 든다. 원제가 ‘어둠의 딸(La figlia oscura)’이란 사실을 알면 더욱 찜찜하다. 미국에서 소설의 제목을 ‘잃어버린 딸(로스트 도터)’로 바꾸고 영화도 같은 제목으로 만든 것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추측이 불가능한 ‘잃어버린 사랑’으로 한 것은 엉뚱하다. ‘나쁜 사랑 3부작’을 위한 작명이라면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소설에서 레다가 잃어버린 것은 딸이고, 영화에서 레다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다. 읽고, 보고나면 안다.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어 낫 언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