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여성 해방을 외쳤던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여성 해방을 외쳤던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헤석
프라다칼로 vs 나혜석 왼쪽 부터 프라다칼로, 나혜석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말은 다룰수록 조심스럽다. 의도와는 다른 말로 오해를 사기도 하고 잘못 뱉으면 다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이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했다. 분명 존재하는 것들 중에는 언어로 전달하기 힘든 것들이 있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언어로 표현한 이들이 있다.
프리다 칼로(Frida Khalo, 1907-1954)는 어릴 적부터 감당하기 힘든 신체적 고통을 겪어야했지만 그에 좌절하지 않고 화가로서의 삶을 일궈냈다. 그리고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대한민국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羅蕙錫, 1896-1949)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모순에 침묵하지 않았다. 우직하리만치 사랑과 감정에 솔직했으며 여자도 사람답게 살아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 작가가 희귀한 시대에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두 사람. 그들의 파란만장하고도 불꽃같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귀 기울여보자.
고통과 절망을 예술로 승화한 프리다 칼로
거대한 전차는 버스를 처참하리만치 밀어붙이며 한참을 끌고 간 뒤에 멈춰 섰다. 독립 전쟁 기념일을 맞이해 들떴던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버스 안에 널브러져 있던 한 소녀를 진찰한 의사들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엄청난 고통을 버텨냈지만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의사가 되길 꿈꾸던 소녀는 병원에서 갇혀버렸다. 그녀는 겨우 움직일 수 있었던 한 손을 들어 붓을 집었다.
프리다 칼로(Frida Khalo, 1907-1954)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혼란스러웠던 멕시코 혁명의 와중에 태어난 칼로는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친구 없이 외롭고 고독하게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짙은 눈썹만큼이나 강단 있게 자신의 길을 닦아나갔다. 칼로는 사고 이후에도 낙관을 잃지 않았다. “아직 젊기 때문에 불운의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고 의사가 되지 못하는 대신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으므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척추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침대 위에 거울을 달고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사진가인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섬세함과 그림에 대한 관심, 명문 국립예비학교에서 배운 막시스트로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이 총망라된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일생 동안 나는 두 가지 커다란 사고를 당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린 시절 당한 전차 사고이고, 또 하나는 디에고와의 만남이다.” 성인이 된 칼로는 공산당 조직 모임에서 멕시코 현대회화의 아버지이자 벽화운동의 거장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다. 그는 배불뚝이 거구에 유별나고 즉흥적이었지만 칼로는 왠지 모를 매력에 사로잡혔고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 디에고의 세 번째 아내가 된다. 칼로는 남편의 여성 편력, 반복되는 유산과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그림에 매진했고 예술혼이라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결국 변치 않는 사랑으로 디에고를 용서한 칼로는 그가 준비한 마지막 축제 속에 많은 이들로부터 격려를 받으며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진정한 신여성, 나혜석
한 여자가 걸어간다. 신식 머리 모양에 단추가 달린 코트를 입은 그녀는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삿갓에 저고리를 걸친 두 노인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자의 등에 손가락질을 해댄다. ‘저것이 무엇인고. 아따, 그 기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한편 반대쪽에서 오던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며 흑심을 품는다. ‘고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 들었더라면...... 맵시가 동동 뜨는구나. 처다 봐야 인사나 좀 해보지.’ 그는 유부남인데도 그녀의 모양새가 보기 좋다며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시절, 조선의 한 신문에 실린 만평이다. <신여자>(1920)에 ‘저것이 무엇인고’란 제목으로 사회적 편견을 고발했던 이는 신여성의 효시, 나혜석이다. 그는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며 여성의 권리를 추구했다. 수원의 재력가 딸로 태어나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던 혜석은 친오빠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화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던 중 첫사랑 최승구를 만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예술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1916년 최승구가 병사하고 그 빈 자리에 다가온 것은 상처한 기혼남 김우영이었다. 그의 적극적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추구하는 것은 나혜석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그 뭣이 아니라 나혜석 이외의 모든 여성에게서도 구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며 거부한 혜석은 여성이자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여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한다. 그로인해 옥고를 치르던 시절 김우영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결혼을 승낙하는데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인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 그리고 전실과 사이에서 낳은 딸과는 별거케 해줄 것. 그리고 죽은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첫사랑의 무덤이 있는 산간벽지를 신혼여행지로 택했다. 김우영은 그녀의 자유분방함을 이해했기에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혜석은 조선 여성 최초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나혜석, <인형의 가[家] /> 中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선망을 누렸으나 그녀는 그게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에 의문을 가졌다.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기교만 조금씩 진보할 뿐 정신적 진보가 없어 나 자신을 미워할 만큼 괴로워”하던 차, 외교관인 남편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상과를 받아 부부는 3년간 세계 일주를 떠나게 된다. 시댁에 7개월 된 젖먹이를 비롯한 3남매를 맡겨두고 오랜 기간 해외에 체류한 것은 ‘정신적 진보’를 향한 나혜석의 간절함과 욕망을 짐작케 한다.
파리의 자유를 만끽하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던 중 혜석은 천도교 우두머리인 최린을 만난다. 그녀는 그 만남을 동지적 우의로 생각했으나 세간의 관심은 둘을 불륜으로 몰았다. 뒤늦게 교제를 알게 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혜석은 굴하지 않고 우뚝 일어나 예술에 매진하려 한다. 실로 구미에서의 다양한 경험은 그녀에게 미술 세계뿐 아니라 조선 여성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 주었다. 혜석은 이혼 전 다양한 글을 통해 여성의 사회 참여와 영향력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도움을 약속했던 최린의 배신, 김우영의 재혼과 사회의 냉소에 ‘이혼 고백서’를 발표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제도와 그들에게만 유리한 법률과 여권 부재를 지적했지만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시대를 앞섰기에 쓸쓸해야만 했던 여인, 나혜석. 자신이 믿는 것을 실천하여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신여성의 표본이었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틀 밖의 여인들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은 비극적인 삶을 영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도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만의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고 혁명가이자 여성 운동가로서의 삶을 확장했다. 그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여인상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뜨거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두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굴레에 안정되지 않았다. 정도는 다를지라도 인간은 모두 예술가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과 속박에 의해 점차 그 기질을 상실하게 되고 세습에 길들여진다.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은 공산주의와 식민지라는 제한된 분위기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칼로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던 육체의 틀에 속박되었고, 나혜석은 유교사상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제도 안에 머물러야 했다. 특히 혜석의 시대는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해야하는지 정답처럼 강요했지만 그녀는 가식을 버렸다. 나혜석이라고 두렵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지금 이 길을 걷는 나는 희생되겠지만 미래의 여인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늘 조선여성 전체의 진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나를 사람으로 만드는/사명의 길을 밟아서/사람이 되고저(‘인형의 가’, 1921)’ 그녀는 겉모습만 신식이 아닌, 내실이 있는 신여성이었다. 비록 그녀의 후기를 옥죄었더라도 ‘이혼고백서’는 그날까지 억눌려 온 한국 여성의 인간 선언이었던 것이다.
강한 자의식이 동반된 사랑은 타인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었기에 어떤 면으로는 상식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인다. 칼로는 마침내 용서를 통해서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데, 분노의 감정보다 더 강한 사랑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고 상대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 치하의 조선 사회는 그 외모가 신식이었더라도 내면은 여전히 구식이었다. 남녀 차별이 엄존한 시기에 ‘사람이면 다 존귀하다’고 외쳤던 나혜석. 그녀의 외침은 오늘날 그 오명을 벗고 눈부시도록 뜨거운 빛을 발하고 있다. 다행히 그녀가 남긴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혜석의 노력, 틀리다고 믿는 것에 침묵하지 않았던 용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그림
채한율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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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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