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시인, 이옥봉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시인 이옥봉
허난설헌 vs 이옥봉 왼쪽 부터 허난설헌, 이옥봉
16세기 조선은 한국 문학사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조선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문화적 성황을 일컫는 말)’로 일컬어지는 문화적 전성기였다. 우주와 인성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이 꽃피며 문물이 흥성한 시기였고 여성의 문학 활동이나 처신에 대해 후대처럼 경직된 태도를 지닌 때가 아니었던 까닭에 정실 마님을 비롯한 첩의 자식인 서녀 출신 여성도 문화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지만 남편이나 자식의 덕이 아니라 자신이 창작한 시로써 널리 그 이름을 남겼다. 허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이옥봉(李玉峰, 미상~1592)은 서녀라는 신분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문장과 독보적인 시풍을 선보여 ‘천고의 절창’이라 극찬을 받았다. 사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오래 애송되었지만 조선이라는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두 여인의 삶, 시작(時作)을 향한 그들의 열의와 슬프고도 아름다운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한다.
꿈많은 신동에서 서리 맞은 꽃으로, 허난설현
“신선들의 생활은 마치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고, 속세에서 벗어난 이상향은 참으로 흥미롭구나. 대체 누가 이것을 쓴 것이냐?” 구운몽의 저자이자 당대 조선 소설문학의 선구자인 김만중, 그는 우연히 장안에 유행하던 산문시를 접한 뒤 극찬을 했다. 그리고 이 글의 저자가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신동이라 칭송 받아 마땅한 명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문에서 태어난 허초희는 오라비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익히다가 불과 여덟 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이라는 한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조선의 사회 모순을 비판한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그녀의 동생이었는데 두 사람은 곧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던 이달에게 본격적으로 문학 교육을 받게 된다. 여자에게 이름은 필요 없다고 천대하던 시대에 허초희는 스스로 난설헌이라 호를 짓고, 이내 자유분방한 시풍을 구사하면서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을 꿈꾸는 천재시인으로 성장했다.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시를 짓던 난설헌. 15세에 명문가의 자제 김성립과 결혼한 후 그녀의 삶은 극도로 불행해진다. 난설헌은 글을 쓴다는 이유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시어머니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학식과 인품이 모자랐던 남편은 어려서 천재소리를 들었던 아내에게 열등감을 갖고 밖으로만 돌았다. 어린 신부는 얼마 후 친정 부모님을 여의었고 오빠들마저 귀양살이를 하러가면서 외로운 나날을 홀로 버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던 딸과 아들까지 전염병으로 잃게 되자 난설헌은 모든 삶의 의지를 상실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碧海浸瑤海)/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靑彎倚彩彎)/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芙蓉三九楹)/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紅隋月霜寒)” -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차가운 서리 달빛 속에 떨어져 내린 스물일곱 송이의 붉은 연꽃, 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시를 남긴 채 27세에 숨을 거뒀다. 유언의 따라 그녀의 시는 모두 불에 탔지만 허균은 그녀가 친정집에 남겨둔 시와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것들을 모아 『허난설헌집』을 발간했고,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 편의 시로 사람을 구하고 연분을 잃은 이옥봉
남편이 소도둑으로 잡혀갔다는 말에 산지기의 아내는 절망했다. 어찌하면 좋을지 시름시름 앓던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이 떠올랐다. 시 읊는 걸 즐기는 옥봉이라면 억울함을 풀어줄 글을 써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늙은 아내는 난처해하는 옥봉의 치맛자락에 간곡히 매달렸다. 옥봉 역시 파렴치한 아전들이 소를 잡아먹고는 다른 이에게 죄를 씌운 걸 짐작했지만 글을 쓰지 않기로 한 남편과의 약조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산지기 아내는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며 애원했고, 그 절실함에 결국 옥봉은 붓을 들고 만다. 절필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옥봉이 써 준 문장을 통해 산지기는 결국 누명을 벗고 관아에서 풀려났다. 그의 아내에게 ‘이 몸이 직녀가 아닌데 낭군이 어찌 견우시리오?(妾身非織女 郎豈是牽牛)’라고 적은 시를 주었는데,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니므로 ‘견우(牽牛)’ 즉 소를 끌어간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는 말로 죄가 없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 편의 시가 관가의 사법 판결을 뒤바꿨던 이 ‘필화사건’을 가능케 한 재치 있는 솜씨의 주인공은 조선 명종 때의 인물인 이옥봉이었다.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의 서녀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몹시 총명했다. 옥천의 군수이자 제법 문학적 명성이 있던 이봉은 딸아이와 놀이하듯 시를 주고받았고, 옥봉이 조금씩 천재성을 드러내자 딸의 시 공부를 위한 책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어엿한 처녀가 되어가면서 옥봉은 자연스레 자신만의 시풍을 갖추게 되었고 장안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뛰어난 시를 읊어 유명인사가 된다. 그러다 옥봉은 조원이라는 선비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본래 옥봉은 서녀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결혼을 기피했었지만, 조원을 알게 된 후 스스로 남편을 택하고 첩살이를 자청한 것이다.
혼인 당시 조원은 옥봉에게 앞으로 다시는 글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약조를 받아냈다고 한다. 또는 결혼 후에도 소실을 대동하고 명사들 앞에서 시를 한 수 지어 올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 조원의 태도가 어느 쪽이었든지 옥봉은 결국 시를 썼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결혼한 지 약 10년이 흘러, 이웃의 부탁으로 써 준 글이 조원의 화를 산 것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필치에 탄복한 파주목사는 산지기를 풀어 주었지만 남편은 옥봉을 내쫓았다. 소실이긴 했지만 여자의 시가 여러 사람에 의해 회자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사대부의 눈에 똑똑한 여인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옥봉은 울며 사죄했지만 조원은 끝내 그녀를 다시 보지 않았고, 평생토록 남편을 그리며 시를 짓던 옥봉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평생이한성신병(平生離恨成身病)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平生離恨成身病)/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酒不能療藥不治)/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衾裏泣如氷下水)/밤낮을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日夜長流人不知)”
그 후 조선은 전란에 휩싸여 이옥봉의 종적 또한 묘연해졌고, 그로부터 40여 년 후 조원의 아들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신으로부터 『열조 시집』을 받아본다. 수십 년 전 중국 동해안에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의 괴이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감겨있던 종이에 적힌 글은 모두 빼어난 작품이라 책으로 출간했고, 명나라 사람들은 극찬을 하며 오래도록 애송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돌아가지 못한 서러움 때문에 자신이 쓴 시 수백 장을 온몸에 감고 바다에 뛰어든 이옥봉. 시와 함께 죽음을 택했던 서글픈 말년은 그녀가 남긴 훌륭한 작품들과 함께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현실의 억압 속에서 시(時)라는 자유를 택하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허난설헌과 이옥봉. 오늘날에야 그들을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평가하지만 그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작(時作) 때문이었다. 그런데 글을 지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쫓겨나고 시댁에서 모진 구박을 받아야했음에도 그들은 줄곧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왜 자신을 다 내어버릴 정도로 시 창작에 매달렸던 걸까?
아마도 시라는 것이 문학의 최고봉이기 때문이 아닐까. 다양한 언어예술 중에서도 작가의 주관적이고 독특한 시각이 돋보이는 문학 장르, 시. 당대의 여성들은 꿈꾸기 힘겨운 예술 교육을 받았던 허난설헌과 이옥봉은 누구보다 높은 언어 구사력과 관찰력, 그리고 창의력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그 목소리가 담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내외법의 규범이 그들을 가로막았고, 어릴 때부터 시를 짓고 자란 두 여인은 기꺼이 자신이 보고 배웠던 대로 말하는 법을 택했다. 현실과는 달리 제한 없는 상상의 나래 속에 펼쳐지는 말의 놀이 속에서 아마도 그들은 자유로웠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자연과 인생 등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두 사람은 예술가로 성장했고 자기만의 고유한 시각을 가진 시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허난설헌이 억압받는 여성의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욕망, 아름다운 관능을 시에 담아냈다면,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징을 기막히게 살려낸 이옥봉의 시는 청아함과 동시에 여성답지 않은 굳세고 건강한 느낌이 묻어난다. 시화집의 기록들이 옥봉의 시를 ‘화장품 냄새’나 풍기는 부인의 시를 초월한 것이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허난설헌의 남동생인 허균은 이옥봉의 시재에 탄복하고 ‘자신의 누이 못지않은 천재 시인’이라 평한 바 있다.
글을 안다는 이유로, 시를 쓴다는 이유로, 단지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억압된 사회의 굴레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옥봉. 그녀는 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실이 됐고,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억눌려 살았다. 그녀는 순전히 타인을 돕기 위해 다시 붓을 들었고 그로 인해 모든 걸 잃었지만, 마지막까지 시를 놓지 않았고 시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허난설헌과 달리 사후 먼 해외에서부터 그 가치와 존재를 인정받은 이옥봉은 ‘여류’이기 이전에 고귀한 사람이자 아름다운 예술가였다. 비록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남은 역사는 그녀를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림
채한율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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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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