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긴 의료인들 나이팅게일 vs 박에스더 왼쪽 부터 나이팅게일, 박에스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너도나도 인문학의 위기와 중요성을 역설하는 요즘이지만,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을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은 미약하다. 먹고 살기조차 버거운 현대인들에게 ‘사람’이라는 주제만큼 생뚱맞고 골치 아픈 게 또 어디 있을까. 내 몸 하나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웃을 돌아보라는 말은 때때로 주제넘은 오지랖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을 오롯이 타인을 위해서 바친 여성들이 있다. 의료인이라는 직업을 넘어 헌신의 본을 보인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그리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는 스스로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 낮은 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굳은 의지로 불가능을 현실로 이룬 그녀의 짧고 강렬한 인생은 남을 돌보는 행위가 숭고한 희생이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임을 일깨운다.
질병이 아닌 병든 사람을 간호하다, 나이팅게일
『 하수구 위에 지어져 정신을 잃을 정도의 악취가 가득한 스쿠타리 병원. 괴혈병, 이질, 장티푸스, 콜레라로 신음하는 이들, 팔다리가 잘린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이 침상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사방에서 득실거리는 파리와 구더기를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지네에 놀란 간호원이 자신은 환자부터 돌보겠다고 말했다. 나이팅게일은 침착하고 분명하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여길 깨끗하게 하는 거라며, 우선 빨래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크림전쟁 당시 나이팅게일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다. 나이팅게일은 좋은 간호를 위해선 청결한 환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의료진은 세균이 질병의 원인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부상병은 거의 방치되거나 모자란 비품으로 견뎌야 했다. 나이팅게일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 인맥과 사재를 털어 옷과 약을 마련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수학을 이용했다. 일괄되고 정확한 통계는 그녀의 과학자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통계 작성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른 입원, 부상, 질병, 사망 등의 내역을 상세히 기록했다. 사람들이 복잡한 숫자의 나열을 어려워하자 도표를 작성해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영국 정부에 병영 위생 개선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그녀가 통계를 내기 전까진 아무도 크림전쟁에서 죽은 영국군의 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의 호소로 영국 정부가 움직였고, 개선 사업을 시작한 지 한 달 후 야전병원의 사망률은 42%에서 2%로 급격히 떨어졌다. 나이팅게일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입으로 지시를 내리는 사무관이 아닌 더러운 병상과 기구를 직접 씻어내고 청소하는 행동가였다.
부유하고 진보적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여러 교육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관심은 늘 가난한 이웃을 향해있었다. 때문에 여러 차례의 해외여행은 바캉스 보다는 병원 시찰, 요양원 참관의 현장 답사를 동반했고, 상류층이라는 신분을 활용해 의학 및 병원과 관계된 문헌을 쉽사리 입수할 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 함몰되지 않았던 나이팅게일은 17세 때 평생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이었다. 하루도 거스르지 않고 밤마다 부상병들을 돌본 나이팅게일, ‘등불을 든 여인’의 지혜와 따듯한 마음은 오늘날까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불굴의 의지로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다, 박에스더
『 끝없이 펼쳐진 하얀 눈밭을 달리는 당나귀 썰매. 세찬 눈바람이 에스더의 빨개진 얼굴을 때리고 흩날렸다. 그녀는 왕진 가방을 그러안으며 썰매꾼에게 좀 더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간 곳은 다 기울어져가는 초가집이었다. 절망에 빠져있던 아이의 어머니는 에스더가 나타나자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반색했다. 콜레라에 걸린 아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한 눈에 증상을 알아본 에스더는 전염병이 옮지 않도록 어머니를 격리시킨 후 가방에서 마스크와 장갑을 꺼냈다. 그리고 홀로 방 안에 들어가 침착하게 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
당시 조선인들은 ‘코쟁이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며 양의사를 두려워했다. 여성들은 다 큰 처자의 몸뚱이를 남정네에게 보여줄 수 없다며 의원을 꺼렸다. 홀 부인으로부터 의학을 공부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은 점동은 망설인 끝에 수술로 완치된 환자를 직접 목격한 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주로 음식을 만들 때나 쓰던 칼을 사람에게 사용한다는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겨웠지만 에스더는 생각의 틀을 바꾸고 이를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받아들였다. 사회의 통념을 따라가지 않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먼저 생각한 그녀. 판단의 중심엔 늘 병든 사람을 고쳐주겠다는 소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관련그림 - 1
이후 이화학당에 입학해 세례를 받은 점동은 16세에 박유천과 결혼해 남편의 성을 붙이는 서양의 풍습을 따라 ‘박에스더’라는 이름을 얻었다. 1894년 홀 부부는 평양에 한국 최초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고, 에스더 부부는 그곳에서 청일전쟁의 부상자들을 간호했다.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자 에스더는 직접 마을을 돌며 “병원으로 오라!”고 호소했다. 아프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할 것이 아니라 청소를 하고 씻어야 한다고 외쳤다. 닥터 홀이 전염병으로 죽자 에스더는 홀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가 본격적인 의학 공부에 도전하게 된다.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교(현 존스홉킨스대)에 최연소로 입학한 에스더. 낯선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학업에 매진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졸업을 3주 남기고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에스더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의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밤낮없이 연간 수천 명의 환자를 돌본 그녀는 매년 5천여 명의 여성 환자들을 치료했고, 콜레라가 퍼지가 죽음을 무릅쓰고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돌았다. 강연을 통해 여성 교육과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지속적인 의료 계몽 활동 펼치며 간호학교와 맹아학교 건립에도 힘썼다. 하지만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킨 탓에 남편과 같은 폐결핵을 얻었고, 과로가 겹쳐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그녀가 죽은 지 22년 후인 1932년, 홀 부인의 아들인 셔우드 홀은 결핵으로 안타깝게 사망한 박에스더를 기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다. 결핵 예방 및 결핵 환자 치료 기금 마련을 위한 것으로 셔우드 홀은 “박에스더가 아니었다면 씰의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신적인 의술과 희생의 삶
나이팅게일과 박에스더는 어린 나이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의료인으로 살겠다’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다. 두 사람의 가정환경과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다르지만, 당시에는 전염의 가능성 때문에 다들 의사나 간호사가 되길 꺼려했고 이들을 천대했다. ‘여자가 무슨 병을 고치냐’는 편견 역시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개화기라는 시대에도 박에스더가 속한 세계에 남존여비 사상은 여전했기에 그녀의 선택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나이팅게일도 응원과 지지만 받았던 건 아니다. 그녀의 가족들은 간호사가 되려는 나이팅게일의 결심을 마치 스스로 하녀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과 같다며 만류했다. 두 사람은 왜 누구보다 험난하고 개척된 적 없는 길을 가기로 택했던 것일까?
이들은 다른 이의 고통을 보는 눈과 공감하는 마음을 넘어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했던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는 누가 가르쳐준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신체적인 고통을 겪는 이들,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한 아프고 병든 자들을 그저 바라만볼 수 없었던 두 사람. 놀라운 점은 다른 누가 그 일을 대신 해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심한 데 있다.
마침내 뜻을 이룬 뒤에는 그 능력과 경험을 자신의 품격과 명예를 높이는 데 사용하고도 싶었겠지만, 이들은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 순수한 열망을 단순히 감정이입을 잘 하는 여성의 특성이나 DNA에 내재된 모성애적 본능 때문일 것이라 치부할 순 없다. 박에스더는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과 생명까지 바쳤다.
박에스더는 단순히 질환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소외당한 조선 여인들의 서글픔을, 물리적 거리 때문에 진료를 받지 못하던 이들의 고통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서양 의학 자체를 믿지 않았던 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 ‘사람’을 살리겠다는 순수한 꿈으로 불가능을 현실로 이뤄낸 그녀의 노력과 용기, 의사가 된 이후에 보여준 헌신적인 삶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일을 하던 늘 가장 중요한 가치를 기억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림
채한율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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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