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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의 정점을 찍다, 바우덕이

흥의 정점을 찍다 바우덕이 비천하지만 뛰어난 재능 가진 여자들 황진이 vs 바우덕이 왼쪽 황진이 오른쪽 바우덕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다. 금월 전국 5대 광역시와 주요 기업들은 대규모 콘서트부터 SNS 이벤트까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각종 행사를 마련해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국내외에서 열린 K-POP 콘서트가 성황리에 마무리되면서 한류가 ‘한’의 문화를 ‘흥’의 문화로 승화시켜 세계적 공감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한류는 드라마와 아이돌 가수들을 통해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성장했지만 실질적인 ‘대한민국 연예인의 효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더욱이 그 엄격한 시대에 감출 수 없는 흥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여성들이 있었다. 여자라는 성이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지던 시대에 활짝 피었으니 가히 꽃 중의 꽃이라 하겠다.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신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이다. 당대 최고의 사대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시가와 그림을 즐겼다. 오늘날까지 수차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고, 조선시대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매력적인 여성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황진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어 ‘진정한 아이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인물 ‘바우덕이’가 있다. 그녀는 사당패 역사상 최초의 여성 우두머리였다. 사당패가 사오십 명의 독신 남성으로 구성되고,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정점으로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알면 그녀의 위치가 얼마나 파격적인 것인지 와 닿는다. 엄격한 사회규범 속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었던 그녀의 행보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짚어보자.
매력적인 여성상의 대표, 황진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황진이는 본래 개성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첩의 딸인 서녀였기에 당시의 신분 제도인 종모법에 따라 전출되어 누군가의 소실이 되는 것이 수순이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기녀의 삶을 택한다. 흔한 기생들의 꿈인 사대부의 첩 자리를 박차고 자신의 의지로 기생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황진이는 용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예술적 감각 또한 뛰어났다.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작품은 정교한 완성도와 함께 뛰어난 문학성을 자랑한다. 시, 그림, 노래와 춤, 악기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성리학과 고전 지식에도 해박했다. 기녀의 삶을 즐기기만 한 게 아니라 사대부의 이중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군자를 유혹하기도 하고 불가의 생불을 파계시키기도 했다. 황진이하면 흔히 팜므 파탈의 매력을 떠올리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시쳇말로 ‘뇌가 섹시한’ 여성임에 틀림없다. 비록 미천한 신분임에도 예술가적 기질과 학식, 남다른 도전정신을 갖춘 그녀는 살아생전 개성의 여류명사로 이름을 알렸고, 사후에도 뛰어난 역사적 인물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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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 정상에 우뚝 선 바우덕이
19세기 말 조선의 장터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춤,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 온통 사내들로 구성된 남사당패의 놀이판에 유독 구경꾼들의 눈을 잡아끄는 한 어름사니가 있었다. 날렵한 몸매, 보기 드문 미모와 고운 맵시에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마음을 뺏겼다. 자신의 키보다 훌쩍 높이 매단 줄 위에 올라 갖은 걸음으로 재주를 부리는 그녀, ‘바우덕이’라 불리는 김암덕이었다.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바우덕이는 부모를 잃은 후 다섯 살 무렵부터 남사당패 안에서 자랐다. 일찍이 줄타기, 무동, 풍물 등 사당패의 모든 기술들을 섭렵한 그녀는 가는 곳마다 돋보이는 매력과 출중한 실력으로 인기를 독점했다. 결국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꼭두쇠로 선출되었고, 열다섯의 최연소 우두머리가 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지친 인부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름난 재인들을 불러 놀이판을 펼치게 했다. 초청된 바우덕이의 재주에 감명을 받은 대원군은 그녀의 가무를 칭찬하며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만 받을 수 있는 옥관자를 하사했다. 하층 천민 출신의 유랑 예인이 왕으로부터 공식적인 평가와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지나가면 다른 놀이패는 깃발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고 한다.
그녀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곧 ‘바우덕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조선 팔도에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지 않았다. 고된 유랑 생활 때문이었을까. 겨우 스물하나의 어린 나이에 폐병을 얻은 것이다. 가족과도 같은 사당패를 떠나 안성 청룡사에 머물던 그녀는 같은 단원인 남편의 간병을 받다가 스물 셋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지금도 안성에서는 바우덕이의 노래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그녀의 비범했던 신명은 남사당패와 풍물패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멈추지 않고 자신을 확장시킨 진정한 여인들
신분의 특성상 황진이와 바우덕이 모두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황진이의 작품은 기생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남은 것도 얼마 없으며, 바우덕이가 몸 담았던 놀이패 역시 지주나 양반 등 지배층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황진이와 바우덕이가 아무리 빼어난 활약을 한다한들 정사에 기록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의 활약상에 대해선 여러 야사와 곳곳에 흩어진 자료들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황진이는 그녀의 빼어난 예술성과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었을까, 지금에 와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오늘날에는 TV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이니 가히 연예인에 버금간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황진이에 비해 덜 알려졌더라도 바우덕이 역시 정3품의 벼슬까지 하사받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수십명의 남자들로 가득한 놀이패 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통솔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바우덕이의 춤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졌다. 왕이든 천민이든 그녀의 관객일 뿐이었다. 바우덕이가 놀이판을 예술의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우덕이가 나이와 신분의 벽을 넘어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빼어난 기예와 능력 때문이라면, 그토록 빼어난 기예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건 아마도 남사당패에서 해왔던 춤과 노래, 곡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은 아닐까?
어릴 때부터 남사당패 속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춤과 노래, 곡예를 배우게 됐겠지만, 남자들로 가득한 그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하루빨리 남사당패를 나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남사당패에서 춤과 노래, 곡예를 배우고, 우두머리까지 올라간 것은 바우덕이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바우덕이가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춤과 노래, 곡예를 누구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녀가 이룬 성과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악착같이 매달려 노력하고 개척해나간 결실인 것이다.
놀이판이란 게 본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면 놀이꾼은 흥 넘치는 춤사위로 화답하고, 놀이꾼과 관객들이 주고받는 몸의 언어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한다. 힘든 노동이 많았던 옛 시절, 민중들은 바우덕이의 한판 놀이로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바우덕이의 춤, 노래, 곡예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온전히 사람들에게도 전해진 셈이다.
한자 이름 김암덕(金岩德)을 한글로 풀면 바우덕이라 한다. 이름 때문일까. 안성 청룡사에 위치한 그녀의 묘는 바위 위에 있다. 비록 작고 연약한 여자였지만, 강하고 묵직한 삶을 살다간 바우덕이. 그가 보인 무대는 ‘번성하여 잘 되어간다’는 뜻의 흥의 사전적 의미처럼 한 시대에 정점을 찍었고, 지금도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림
채한율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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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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