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한국의 잔 다르크, 설죽화

한국의 잔 다르크 설죽화 <전장을 누빈 여자들 /> 설죽화 vs 잔 다르크
전쟁은 남성의 소유다. 전쟁 역사에 기록된 이름은 대부분 남성의 것이며, 영웅담 역시 남자들의 전유물이다. 전쟁 속 여성은 대부분 약탈의 대상이 되거나 공물로 바쳐지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역사에 영웅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들이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전쟁영웅 잔 다르크.
그녀는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이끌어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 그녀는 전쟁 속 여성의 활약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존재다.
우리나라에도 잔 다르크 같은 여자 영웅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귀주대첩의 숨은 영웅 ‘설죽화’. 고려 병사들의 선봉에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장수 중의 하나로 역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이야기는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국의 잔 다르크라 할 수 있는 설죽화를 통해 그녀가 일궈낸 값진 성취를 말하고자 한다.
잔 다르크, 기적으로 오를레앙을 구원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을 종식시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느 양치기의 딸이다. 당시 영국과의 길고 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내부의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이때 평범한 농가의 딸로 자라던 잔 다르크는 ‘나라를 구하라’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당시 귀족들은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 다르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의심을 품은 샤를 왕세자는 그녀를 시험해보기 위해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신하들 사이에 숨어 그녀를 살폈지만, 잔 다르크는 변장한 가짜 왕세자가 아닌 진짜 샤를을 알아보는 신비한 능력을 보였다. 그 후에도 그녀에 대한 의심은 이어졌지만 잔 다르크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전장인 오를레앙으로 달려갔다.
“신의 뜻은 우리 프랑스에 있다!”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는 순백색 갑옷의 소녀는 순식간에 승리의 여신으로 떠올랐다. 잔 다르크의 출전으로 프랑스군의 사기가 치솟았고, 패색이 짙던 전세를 뒤집고 승리, 오를레앙을 탈환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하지만 승리의 영광도 잠시. 잔 다르크를 경계하던 귀족들은 샤를의 즉위 이후 그녀를 더욱 배척하고 급기야는 마녀로 몰아세웠다. 성녀에서 마녀로 곤두박질치게 된 잔 다르크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소수병력을 이끌고 다음 전장에 나간다. 결국 포로로 잡힌 잔 다르크는 종교 재판 끝에 이단 판결을 받고 화형당하고 만다. 19세의 어린 나이였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모함한 이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백년전쟁이 극적으로 끝난 후 잔 다르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그녀의 이름은 여성 영웅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설죽화, 곧은 의지가 전쟁의 꽃으로 피어나다.
설죽화는 고려의 병사 이관의 딸이다. 당시는 고려를 집어삼키려는 거란의 침입이 계속되던 시대였다. 1011년 현종 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벌어진 전투에 나선 이관은 결국 전사하고 만다. 이 소식에 설죽화는 크게 슬퍼하며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아 거란을 물리쳐 그 한을 풀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여인이 어떻게 전장을 나갈 정도의 힘을 기를 것인가. 긴 전쟁에 제대로 교육을 시킬 무인이 남아 있을 리도 만무했거니와 중세시대에 여자에게 무예를 가르치려는 사람도 없었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설죽화는 무관의 딸이었던 어머니에게 무예를 배웠다고 한다. 전장에 나가 사라진 남자들 대신 여자가 여자에게 힘을 물려줬다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사내 못지않은 무예 실력을 쌓았을지라도 준엄한 군법이 다스리는 전장에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장을 해 소년으로 모습을 꾸민 설죽화는 강감찬 장군과의 독대를 위해 자신을 장군의 친척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장군을 만나게 된 설죽화는 전쟁에 나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거란군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강감찬 장군은 뜻은 갸륵하지만 어리고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의 청을 거부했다. 설죽화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무예 실력만이라도 봐달라고 청했다. 그녀의 청룡도 솜씨를 본 강감찬은 나이답지 않게 훌륭한 실력이라며 감탄했고, 결국 설죽화의 의지를 인정, 소년군에 배치시켰다. 여러 전투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우며 공을 세운 설죽화는 마침내 전장의 선봉장으로 서게 됐다.
1019년,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 발발했다. 나라 곳곳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고려군을 뚫지 못해 회군하려는 거란군을 강감찬 장군의 군대가 외나무다리에서 막아섰다. 그 선봉에 흰 말 위에 올라탄 설죽화가 있었다. 그녀의 공격을 필두로 고려군은 거란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설죽화는 허겁지겁 퇴각하는 거란군을 뒤쫓았다. 아버지의 원수인 그들을 단 한 명도 살려둘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후방에 숨어있던 거란군 병사가 활을 당겼다. 화살은 그대로 설죽화를 꿰뚫었고 그녀는 달리던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승전보가 울렸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기쁨에 취하기도 전에, 병사들은 죽어가는 설죽화에게 몰려들었다. 그제야 그녀가 남장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은 크게 놀랐다. 설죽화는 자신이 여자였으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고국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강감찬 장군은 설죽화를 ‘고려의 꽃’이라 일컬으며 공신의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비록 역사서에 설죽화의 이름이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녀가 세운 위대한 업적과 놀라운 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왔다.
한계를 넘어 모두를 이끈 여성 영웅
설죽화와 잔 다르크는 모두 남자들의 소유로 여겨졌던 전쟁에 나가 싸운 여성들이다. 아마조네스를 비롯해 여성들이 전쟁에 나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들이 살던 시대에는 여성이 전장의 선봉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승리의 전리품이 되기 일쑤였고, 끌려가 정절을 잃기라도 했다간 죽음을 강요받거나 환향녀라 손가락질 당했다. 그런 시대에 직접 검을 들고 전장에 뛰어나간 설죽화와 잔 다르크는 ‘돌연변이’와도 같았다.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진영의 선봉에서 군사들을 이끌었다. 사람을 이끄는 빼어난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수많은 군사들이 그녀들을 따르진 않았을 것이다. 잔 다르크에게는 ‘천사의 계시를 받은 성녀’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설죽화는 비록 남장을 했다 하더라도 오직 그녀가 지닌 강인한 힘과 의지만으로 선봉장의 자리에 올랐다.
남장을 한 작은 소녀가 어떻게 군사들의 가장 앞에 설 수 있었을까? 또 역사서에 기록되지도 않은 그녀의 이야기가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라지거나 퇴색되지 않은 힘은 무엇일까?
전장은 무력이 지배하는 곳이지만 설죽화가 수많은 병사들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힘이 남자보다 월등히 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설죽화가 지닌 무엇이 강감찬 장군과 병사들의 마음에서 감동을 이끌어 냈을까? 외적에 의해 가족을 잃은 원통함과 복수심, 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맹렬한 의지가 아니었을까?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약점을 극복하고 싸움터로 나가고자 했던 그녀의 의지와 노력이 명장 강감찬의 마음을 흔들었다. 혼란의 시대, 죽음까지 불사하며 침입자를 무찌르기 위해 싸운 설죽화의 기합이 고려군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설죽화는 한국 역사상 3대 대첩으로 불리는 귀주대첩 승리의 숨은 주인공이 되었다.설죽화의 이름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은 이처럼 여성의 몸으로 한계를 극복해 싸운 그녀의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한 모바일 게임에 설죽화라는 이름의 여전사 캐릭터가 추가됐다는 소식이 게임 마니아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껏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설죽화는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 속 흔한 여성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화살과 검이 보이지 않을 뿐 모질고 험한 사건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터라 한다면, 지금은 어느 때보다 설죽화라는 이름의 가치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 가치는 힘과 성별, 그 어떤 굴레에도 갇히지 않고 당당히 이겨낸 ‘진정한 강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죽화의 뜻은 ‘눈 속에 핀 대나무꽃’이다, 차가운 땅을 뚫고 자라난 대나무꽃처럼, 한계를 넘어 목표를 이루고자 했던 그녀의 강인한 아름다움을 이제부터라도 많은 이들이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
미루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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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7-3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