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미술관

비운의 천재 나르시스트, 에곤 쉴레

비운의 천재 나르시스트, 에곤 쉴레 비운의 천재 나르시스트, 에곤 쉴레
누드화는 미술사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에곤 쉴레의 누드화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아름답게 이상화시키지 않은 신체, 마치 멍이 든 것 같은 피부에
고통스럽게 몸을 꼬고 있는 누드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고통을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그림들은 당시 사람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던 에곤 쉴레는 생전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너무 많이 앞서가서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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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비운의 천재 나르시스트, 에곤 쉴레비운의 천재 나르시스트, 에곤 쉴레

고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다

쉴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툴룬’에서 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쉴레는 아버지를 유독 따르고 존경했는데, 당시 중산층에 속했던 부모님 덕분에 한동안 부족함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쉴레는 이 유년기를 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 기억했다. 그는 연필 잡을 나이가 되자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역 앞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차와 풍경을 자주 그렸다. 믿기 어렵긴 하지만 훗날 어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쉴레는 두 살 때부터 드로잉을 했다고 한다. 이런 쉴레는 학창 시절 내성적인 아이였고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많은 교사들은 하나같이 쉴레의 드로잉 재능이 대단했다고 기억했다. 다만, 한가지 알고 봐야 할 것은 당시 쉴레에게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관념이 없었다. 때문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동생의 누드화를 그렸고 그것이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 하지 못했다. 쉴레의 가족은 한동안 화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고, 쉴레의 아버지 또한 매독에 걸리면서 난폭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병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 직장에서 잘리게 되었고 집안에는 점점 어둠이 몰려왔다. 매독으로 고통받던 아버지는 결국 정신에도 문제가 생겨, 종종 심각한 발작 증세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발작을 일으키던 아버지가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인 주식과 채권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쉴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과 인간의 본성, 고통을 보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가난만 남겨둔 채 1905년 세상을 떠난다.

성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쉴레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그는 성에 대한 트라우마와 집착을 보이게 되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성병, 그로 인해 괴로워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성에 대한 집착을 보이게 되었으며, 인간의 본능인 성욕을 미화하는 것이 아닌 거리낌 없이 혹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게 된다. 아버지가 떠난 후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던 백부 ‘레오폴트 치하첵’이 후견인이 되었고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다. 전통을 중시하는 학교였던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쉴레는 그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으나 너무나도 보수적인 분위기에 실망했다. 쉴레의 담임 교사도 진보적인 예술 흐름에 반대하며 단순 반복 훈련을 중시했다. 쉴레는 석고상을 먼저 그리며 실력을 쌓아야 했고 인체 해부학, 기초 드로잉 등 순차적으로 모든 것을 배운 후에야 모델 드로잉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지루한 과정을 참을 수 없었던 쉴레는 수업에 잘나가지 않고 반항했다. 교사 입장에선 쉴레가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고 쉴레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사탄이 너를 나의 반에 토해 놓았다!”.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역사적 만남

그러던 어느 날,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는 만나지도 말라는 교사들의 말에 쉴레와 친구들은 학교를 뛰쳐나오게 된다. 그런 쉴레의 관심은 자연스레 당시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던 <빈 분리파> 모임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곳은 클림트가 초대 회장을 맡았고 전통에 반대하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모임이었다. 쉴레는 1907년, 정신적 멘토인 클림트를 만나게 되었고 17살의 쉴레와 45살 클림트의 만남은 빈 미술계에 또 다른 천재의 출현을 예고했다. 클림트는 쉴레의 그림을 보며 그의 재능에 극찬을 보냈고, 쉴레는 클림트를 존경하며 그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후 쉴레가 자신만의 양식과 개성을 찾는 데 클림트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쉴레는 클림트의 영향과 지지를 받으며 그림을 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독자적인 예술의 주제는 바로 자신의 맨 몸, 그리고 인간의 누드였던 것. 그러나 쉴레의 누드화는 당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었는데, 그의 그림이 일반적인 누드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빈의 대중들은 피부도 뽀얗고, 8등신에 아름다운 누드화, 즉 누가 봐도 여신 같은 모습을 원했지만 쉴레의 누드화는 전혀 달랐다. 굉장히 흉하고 충격적이었다. 그의 누드화 속 신체를 보면 살은 거의 없이 메말라 있다. 또 비틀리고 잘리고 일그러져 있는 게 특징이다. 몸의 색은 마치 멍이 든 것처럼 얼룩덜룩 표현되어 있고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쉴레는 그림이 대상의 본질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 해체시킴으로써 '나'라는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었다. 병약하고 창백한 듯 보이는 그림 속 신체는 한 치의 가식도 없는 진짜 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이를 작품이 아닌 포르노라고 비난한다.

그림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

쉴레의 그림을 살펴보면 에로틱하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하다. 쉴레의 이런 표현들은 어린 시절 성병으로 죽은 아버지의 영향에만 기인하지 않았다. 바로 당시 빈의 이중성 때문이기도 했는데, 쉴레의 그림은 당시 신사들의 이중성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다. 20세기 전후 빈은 산업화 물결을 타면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일궈냈다. 하지만 산업화는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시켰고 시민 계층은 무너지고 점점 가난해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빈의 신사들은 겉으론 신사인 척 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비도덕적 행위를 일삼았다. 젠틀한 신사인 척 스스로를 포장했으나 정부를 두는 것은 당연했고 심지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매춘을 일삼았다. 때문에 쉴레의 이런 파격적인 성적 표현은 그들의 위선적인 세계를 겉으로 드러내어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했다. 솔직한 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냈고, 이를 본 대중들은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그림들을 누드화가 아니라 포르노라 강하게 비난했던 것이다. 쉴레는 인간 본성과 시대의 치부를 끄집어낸 그림을 그렸고, 그의 그림은 포르노 취급을 받았다. 불편했던 시대의 뒷모습을 솔직하게 표출한 그림이 진정한 그 시대의 누드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정우철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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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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