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여기, 전쟁의 잔혹한 순간을 담은 그림이 있다.
바다에 인접한 도시 곳곳에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에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들라크루아는 왜 이 참혹한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던 것일까?

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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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의 수도, 터키 이스탄불
  • 제리코와의 운명적 만남

    외젠 들라크루아는 1798년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17세에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의 제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바로 이때 같은 제자지만 자신보다 일곱 살이 많은 재능 있는 화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테오도르 제리코였다. 1819년 27세의 제리코는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로 떠오르는데, 이 작품은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당하면서 149명의 선원과 승객 중 15명만 살아남은 사건을 그린 것이었다. 제리코는 사건 현장을 생생하게 담기 위해 생존자를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조사하고, 정신병원과 시체안치소에 찾아가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게다가 실제 크기와 같은 뗏목을 제작한 뒤에 조난 현장을 재연하기까지 했다.

  •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가 되기까지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표류 끝에 구조선을 발견하는 생존자들의 극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제리코. 그의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스승에게 배운 신고전주의 화풍에 머무르지 않고, 루벤스의 바로크주의와 제리코의 낭만주의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 1822년 살롱전에 <단테의 조각배>를 출품하면서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지옥의 강을 건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후 들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의 학살>,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극적으로 담아내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성장한다.

  • 국왕의 주문으로 완성한 역사화

    실력을 인정받은 들라크루아는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리프 1세에게 역사화를 주문 받는다. 당시 베르사유궁은 프랑스의 과거 영광을 기리는 박물관을 조성하기 위해 각종 예술품을 모으고 있었는데, 프랑스 기사들이 주축이 된 4차 십자군 원정에 대한 그림을 요청한 것이다. 1841년 들라크루아는 왕이 주문한 작품인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을 공개한다. 이 그림은 1204년 4차 십자군 부대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십자군 전쟁은 원래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시작된 것인데, 4차 십자군이 침공한 곳이 이슬람 국가가 아닌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이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 성전의 추악한 진실을 재현하다

    4차 십자군의 목적지는 원래 이집트였다. 유럽 각지에서 3만여 명의 병사를 모아 베네치아에 집결한 뒤 배를 타고 이집트로 원정을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권력다툼에서 밀린 비잔틴 제국의 왕족이 찾아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주면 이집트 원정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한다. 결국 십자군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고, 사흘 동안 끔찍한 약탈과 살육을 벌인다. 들라크루아는 성전이라 불렸던 십자군 전쟁에서 벌어진 추악한 사건의 현장을 치밀한 고증과 과학적인 원근법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1831년 들라크루아는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발표하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역사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여행 정보

  •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HALUK COMERTEL)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지만 두 차례의 화재로 인해 기존 건물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537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성 소피아 성당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커다란 돔과 대리석 기둥, 모자이크 등 비잔틴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이후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종, 제단 등이 사라지고 첨탑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면 비잔틴 양식과 이슬람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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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3-1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