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에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되기 얼마 전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나는 운이 좋았다. 이때를 놓쳤다면, 아마 이삼 년쯤 계획을 늦춰야 했을 것이다. 캄보디아는 운이 좋지 않았다. 환전 없이 미국 달러를 그대로 쓰게 할 만큼 관광수입이 아쉬운 가난한 나라에 팬데믹까지 덮친 것이다. 앙코르와트 사원을 돌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면 어디서나 들려오던 중국어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아 묘한 적막감까지 느껴졌었다.
캄보디아에 대해서는 늘 두 가지 어울리기 어려운 호기심이 있었다. 하나는 순전히 이국적인 유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천 년의 세월을 밀림 속에서 잊혔다가 근래에 발견되었다고 해서 더욱 미스터리 같았던 앙코르와트였다. 다른 하나는 영화 <킬링필드>(1984년)에서 봤던, 살이 다 녹아내린 해골들이 가득한 잿빛 늪을 한 사내가 허겁지겁 건너는 장면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이 영화는 고등학교 때인가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했었다. 사람을 처형해 무참히 늪에 던져 놓았고, 그런 해골의 수가 수백수천에 달했던 광경은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신비로운 고대의 유적과 겨우 반세기 전에 일어난 반인류 범죄의 현장을, 캄보디아라는 하나의 기대 속에서 매치시키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에는 앙코르와트를 보러 캄보디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또 어느 때에는 킬링필드를 보러 캄보디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따로 노는 기대는,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가 서로 다른 감상 태도를 관광객에게 요구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북쪽의 밀림에서 융성하다 갑자기 사라진 앙코르 문명을 대표하는 사원이고, 외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그저 사심 없이 보고 즐기며 놀랄 것만을 요구한다. 이 불가사의한 문명을 놓고 외국인 관광객이 특별히 사유해야 할 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킬링필드는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엔 킬링필드는 겨우 1970년대에 있었던 일이고, 그 앞에서 관광객은 같은 인류로서 가져야 할 보편적인 윤리에 대해 곰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구태여 킬링필드를 찾았다면, 어째서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시민이 단 3년 9개월의 짧은 기간에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이미 사유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나는 시엠립의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야 현실의 캄보디아가, 사진이나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캄보디아와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상상의 기초로 삼을 정보가 빈곤했으니 달랐다기보다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해야 맞다. 나는 시엠립 시내가 아닌 앙코르와트 유적에 가까운 동네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저개발 국가의 도심 외곽이 어떤지 몰랐던 것이다. 호텔은 야외 풀장에, 근사한 캄보디아 음식이 나오는 식당에, 객실의 냉방시설은 훌륭했지만, 호텔에서 한 발짝만 나서면 벌건 흙먼지가 날리고 우연히 씨앗이 날아들어 자라게 된 듯한 열대 식물들이 차지한 서민 주택가가 있었다. 호텔 같은 번듯한 주택들도 있지만 주로 나무판자와 벽돌, 양철판과 천막으로 엮은 서민들의 집이 낮은 지붕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낙후된 동네를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들과,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개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시엠립 변두리의 개들은 대개 덩치가 크고 사나워 야생 개 같다. 동네 전체가 반쯤 개발되다 어느 순간 멈춰버려, 야생과 인간이 밀림을 반씩 나눠 쓰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앙코르 유적을 다 보려면 5일은 돌아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도 시엠립에 오고서야 실감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앙코르 왕국은 시엠립 동서남북 전역에 걸쳐 유적들을 남겼고, 남쪽의 앙코르와트에서 북쪽 산 속의 끄발 스피언까지 ‘툭툭’이라고 하는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반나절은 쉼 없이 달려야 할 만큼 광범위한 지역에 뚝뚝 떨어져 있다.
나는 매일 아침 호텔을 나와 툭툭을 대절해 해질 무렵까지 3일간 앙코르 유적을 돌았지만, 가이드북에 소개된 유적의 반도 볼 수 없었다. 앙코르 왕국은 시엠립의 밀림 속에서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계속됐고, 앙코르 유적은 그 6백 년의 시간을 담고 있다. 유적 하나하나도 둘러보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든다. 앙코르와트만 하더라도 거대한 석조 사원 위에 작은 사원을 올리고, 그 위에 더 작은 사원을 올리는 식으로 3층까지 쌓아 올렸고, 찬찬히 둘러보는 데 한나절은 걸린다. 나는 이곳이 너무 좋아 매일 아침 들러 구석구석까지 걷곤 했다.
앙코르 유적은 저마다 특색이 있어 어느 앙코르와트가 최고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미술관에 전시된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을 정도로 정교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반띠아이 쓰레이는 예술적인 가치만을 본다면 월등하다. 붉은 사암을 마치 나무를 깎듯이 세밀하게 깎아 온갖 조각 장식을 새긴 것을 보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죽하면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이곳의 조각상을 훔쳐 프랑스로 밀반출하려다 발각되었을까.
바푸온은 평지에 세워진 앙코르 유적 가운데 전망이 가장 높은 곳이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이 사원은 높이가 40미터라고 하는데, 올라가는 층계가 가팔라 겁부터 난다. 바푸온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 이 거석 유적들이 19세기가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울창한 밀림이 없는 온대지역에서만 살아온 탓이었다. 40미터나 되는 사원 꼭대기에서 바라보는데도 빌딩처럼 키 큰 열대 나무들이 코앞에서 시야를 잘라먹어, 수풀이 아닌 인공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관광지로 개발된 지금이 그 정도였다.
바이욘은 앙코르와트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유적이다. 사암을 잘라 탑처럼 쌓아올리고는 사람의 얼굴처럼 깎아낸 ‘사면상’으로 유명하다. ‘사면상’은 탑 하나에 동서남북으로 인간의 얼굴을 새겨 붙여진 이름이다. 이 탑들은 돌과 돌 사이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사암은 다른 돌보다 부드러워 돌 두 장을 포개놓고 마구 문지르면 딱 붙는다고 한다. 사암은 시엠립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호텔 앞 도로의 벌건 모래들도 이런 사암에서 나온 것이다. 바이욘의 사면상은 보면 볼수록 신화 속 거인족의 유골을 마주한 것같이 기괴하고 신비로워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곳도 두 번이나 찾아가 몇 시간씩 머물다 나왔다.
따 프롬은 영화 <툼 레이더>에서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휘감고 있는 고대의 사원으로 나와 유명세를 탄 곳이다. 영화에서도 엄청났는데, 실제로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앙코르 왕국이 몰락한 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수백 년 동안, 나무 씨앗이 날아와 사원의 돌 틈에 뿌리를 내려 이런 장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펑(Spong)’이라는 이 나무는 은색의 뿌리 갈래 하나가 기둥처럼 굵고, 길이도 사원의 지붕에서 바닥까지 덮을 만치 길었다. 이 나무들은 여전히 자라고 있어서 사원을 무너뜨릴 정도이기 때문에 현재 성장억제제를 주사하고 있다고 한다. 수상 사원 닉 뽀안을 둘러싼 호수는 꼭 망자들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광경을 보여준다. 잔잔한 호수 위로 죽은 듯한 검은 나무줄기들이 비죽비죽 솟아있는 광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앙코르 유적을 보고 나는 프놈펜으로 내려와 킬링필드를 봤다. 앙코르 유적의 비현실적인 광경에 취해 있다가, 150만 명이나 죽임을 당한 현실적인 킬링필드 현장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킬링필드는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해 내버린 곳을 말한다. 캄보디아 전역에 수백 곳이 흩어져 있고 시엠립에도 한 곳이 있었다. 프놈펜 시내에도 있는데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했던 S-21 뚜얼슬랭 수용소와 한 코스로 묶어 하루에 돌아볼 수 있다. 호텔 앞에 항상 대기 중인 툭툭 기사에게 투어를 부탁하면 된다.
캄보디아 인구의 5명 중 1명이 희생된 반인류 범죄임에도 이 대학살을 다룬 연구는 양이 많지 않다. 아시아가 세계 역사의 변방이고 캄보디아는 거기서도 더 변방인 탓일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20세기 세계 역사를 다룬 책에서도 ‘제3세계’로 묶여 몇 줄 언급만 하고 지나간다. 필립 쇼트의 『폴 포트 평전』은 그래서 캄보디아의 현대사가 궁금한 이들에게는 단비 같은 책이다. 이 놀라운 책의 맺음말에서 작가 필립 쇼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사원 가운데 하나인 앙코르 유적지는 캄보디아인의 저력뿐만 아니라, 쇠미해진 역사를 무참히도 선명히 보여”(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8년, 837쪽)준다고.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는 여러모로 극단에 놓인다. 하나는 인류가 이룰 수 있는 찬란한 문명의 극치이고, 하나는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반인류 범죄의 극치이다. 하나는 기원을 낱낱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고대이고, 하나는 희생자의 유골과 핏자국이 여전히 남아있는 현재이다. 하나는 사심 없이 소요하듯 둘러볼 수 있는 순전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고, 하나는 같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윤리를 끊임없이 사유하게 하는 반성의 대상이다.
프놈펜의 킬링필드 박물관과 뚜얼슬랭 박물관의 입구에서는 한국어 지원이 되는 오디오 가이드를 나눠준다. 설명을 들으니 우리 한국에서 재정적 지원을 해준 모양이다. 정확한 한국어 문장으로 녹음된 걸 보니 원고도 한국인이 작성한 듯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캄보디아의 현대사와 대학살이 이뤄졌던 현장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해 준다. 나는 이 가이드 덕에, 내가 그동안 서구 문명에 미혹되어 잊고 지냈던 아시아의 현대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일어났던 대참사들에 대해서는, 20세기 후반의 냉전에 책임이 있는 나라라면 누구나 일정 정도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우리 한국 역시 냉전 시기, 국제정치의 역학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고, 미국의 편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캄보디아를 이용했다. “베트남전쟁 중에 미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 떨어뜨린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참전국이 사용한 폭탄의 세 배였다. 그중 캄보디아에 떨어뜨린 폭탄은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의 세 배였다.”(421쪽) 인도차이나반도의 나라들은 여전히 냉전의 상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